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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4(주일) 민수기 22:1~20 ‘하나님께 복받은 백성은 무엇으로 사는가?’
모든 사람들이 복받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의 개념을 다섯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수하는 것, 두번째는 부자로 사는 것, 세번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 네번째는 평생 사는 동안 근심없이 마음의 평강을 누리는 것, 마지막으로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 것, 이것을 오복(五福)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는 복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하나님은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복받은 백성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적용하며 주님의 음성 듣고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1.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1~6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 맞은편에 있는 모압평지에 도착하여 진을 칩니다. 모압왕 발락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을 보고 크게 두려워합니다(3절). 모압왕은 메소포타미아의 신접하다고 소문난 발람을 통해 그들을 저주의 주술로 치려고 미디안 장로들을 발람에게 보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합니다(6절).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압왕 발락은 나도 죽고 남도 죽일 수 있는 악한 일을 꾸미게 됩니다. 딤후1:7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지배하게 놓아둔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소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주신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고 했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염려를 이기지 못하면 염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사41:10)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두려워하지 않음’이 아니라 ‘믿음’이란 말입니다 시편 91편을 보면, 시인은 여러 가지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처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시91:3,5).
독일 에르푸르트에 가면 루터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에는 시편 118편 17절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루터의 삶과 어울리는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은 살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위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당시의 세태를 보면서 “왜 악인이 잘 됩니까?”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의인이 고통을 당하되 왜 악인이 의인을 핍박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해답을 얻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해답은 구약의 하박국과 신약의 바울 그리고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개혁자 루터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보를 통해 신앙인의 위대한 해답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악인의 교만과 악인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듯한 것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바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 됩니다.
‘믿음’은 히브리어로 ‘에무나토’입니다. 이 말은 공평, 견고, 확실, 영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공평하게 살고, 견고하게 살고, 확실하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과 루터에 의하여 이 말씀이 해석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학적인 대립을 가졌던 펠라기우스 학파는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인 율법에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을 만큼 행위가 온전한 자가 있습니까?
욥기 22:3에는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인간 가운데는 행위가 온전한 자가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위가 온전한들 그 온전히 인간의 기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7번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사랑을 많이 베풀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치며 고쳐달라고 하던 맹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한센 환자 가운데 고침 받은 후에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나은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많이 베풀어도, 위대한 행동을 해도 구원은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라는 침몰하는 배에서 필사적으로 뛰어내리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세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이 말이 64회나 나타납니다. 이 말은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방주 밖은 죽음이지만 방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삽니다. 믿음은 세상의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방주입니다.
요한복음 6:47에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합니다.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은 살게 하는 것입니다. ‘믿다’라는 용어는 성경에 272번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적용)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혼자 두려워하며 번민하다가 그릇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2.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7~14절).
모압과 미디안 장로들이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가 발락의 말을 전합니다. 발람은 복채를 가지고 온 사신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합니다(8절). 이 때 하나님이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12절).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12절). 비록 이스라엘은 죄 때문에 광야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이는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징계이지 파멸을 위한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기에, 세상의 어떤 공격과 저주를 받을 때라도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그 저주가 복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은혜의 창고’를 갖고 계십니다. 그 창고에 은혜를 가득하게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31:19)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들을 적극적으로 기대하고 바라고 얻고 누리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복받은 성도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가지 종교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력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타력 종교입니다.
자력 종교의 핵심은 자신의 인생문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는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불교, 도교, 힌두교가 그렇습니다. 열심히 도를 닦고 손바닥이 닳도록 비비고 백배도 모자라서 천배를 하고, 고행을 하고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 깨끗한 심성을 갖고 깨끗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근심과 고뇌와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침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신적인 존재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바로 ‘자력 종교’입니다.
그리고 타력 종교가 있는데, 타력종교의 핵심은 자기 스스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문제도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종교가 바로 타력종교입니다. 그래서 절대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 타력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타력 종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 성공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로마서 8:7 말씀입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설명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성경은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100%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 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도 아무런 자격도 아무런 공로와 어떠한 이유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죽어 마땅하고 지옥가야 마땅한 저와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심판과 절망과 저주와 죽음에서 영원한 축복과 소망과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오
여기서 ‘은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이 말은 ‘기쁘다’, ‘감사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은혜는 비와 같습니다. 비가 없으면 인간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비가 적당히 오는 지역은 문화가 발달합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합니다. 사막에는 문화가 일어설 수 없습니다. 인류 문명은 강을 끼고 발전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은혜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단비가 적당히 때에 따라 내려야만 죄인된 인간이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에도 죄인이 용서받고 사함 받는 원리는 없습니다. 이 은혜라는 것은 성경안에 , 기독교에만 있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랬습니다.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 하노라”(요삼 2절)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내 영혼도, 나의 범사도 잘되고 강건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성공의 비결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속에 사는 길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시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복받을 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곤란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도리어 복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3. 오직 순종함으로 삽니다(15~20절).
모압 귀족들이 발람의 거절을 발락에게 전하자, 발락이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또 다시 자기 집에서 유숙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19절). 발람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듣고도(12절), 또다시 그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묻는데, 이는 그에게 은금을 탐하고 하나님과 타협하려는 악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발람의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복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서,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말씀에 순종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영적인 능력과 축복은 말씀을 잘 듣고 믿음으로 행할 때 나타납니다.
정말 축복받기를 원하면 말씀 듣는 태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 태도에는 사람됨과 인격도 들어있지만 축복도 들어있습니다. 강의를 듣는 태도에 학생들의 미래의 성적이 들어있는 것처럼 말씀을 듣는 태도에 성도들의 미래의 축복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딴 생각을 하고, 비판적으로 듣고, 가볍게 흘려듣고, 팔짱을 끼고 들으면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선배나 윗사람이 누구를 끌어주려고 합니까? 말을 경청해서 잘 듣는 사람을 끌어주려고 합니다. 듣는 태도가 나쁘면 능력이 좋아도 별로 정이 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듣는 태도가 좋으면 능력이 부족해도 아주 정이 갑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지 않고 봉사하는 마르다보다 먼저 말씀을 겸손하게 듣는 마리아에 대해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목회자가 원하는 사람도 봉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겸손하게 듣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봉사를 해야 그 봉사가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 듣지 않으면 봉사하면서도 부작용이 생기고, 봉사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대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가정문제, 부부문제도 잘 듣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듣지 않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내 말을 들어주세요!”라고는 하지만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을 듣겠습니다!”라고 하는 태도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원하면 말씀을 듣는 태도부터 바꿔야 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의 문이 열리면 축복의 문도 열릴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잘 듣고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28:1b) 축복은 말씀을 잘 듣고 나서 그 말씀대로 잘 행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가끔 하나님 말씀이 내 뜻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축복의 기회입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이방 왕의 포로였지만 말씀대로 살았을 때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순종한 사람들의 복 받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렙다 과부가 한 병 기름밖에 없었지만 순종의 기회가 왔을 때 순종하자 병에 기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기회가 없다고 탄식하지 말고 순종의 기회가 왔을 때 순종해야 합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순종의 기회가 축복의 기회입니다. 순종의 기회가 왔을 때 순종하면 여지없이 축복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순종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순종합니다. 진짜 순종이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진짜 순종하면 진짜 축복이 주어집니다. 결국 복을 받고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순종의 차이입니다. 복된 존재가 되려면 자기 방식대로 살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적용)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내 욕심대로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큐티인간증] [허락하지 않으신 이혼, 안병민]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녔으나 말씀 없이 살다가 불신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후 아내와 함께 해외 유학을 떠난 저는 한인교회에서 주일예배만 드리고 공동체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행복한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았지만, IMF 외환위기로 환율이 급등하면서 유학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아내는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가출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아내를 고소한 뒤 이혼소송을 준비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떠올라 이혼에 대한 고민을 잠시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 안에서는 ‘반드시 이혼하겠다’는 분노와 욕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음행의 이유 외에는 배우자를 버릴 수 없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이혼 사유를 정당화했습니다(마 19:9). 이처럼 저는 모압 왕 발락이 보낸 고관들을 자기 집에 유숙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겠다고 한 발람처럼 모순된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8,19절). 그러니 아내가 저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함에도 저는 욕설을 퍼부으며 완악하게 이혼을 강행했습니다.
이후 자유로운 싱글이 된 저는 오히려 이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이전보다 더욱 음란하고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재혼했지만, 연이은 사업실패와 극심한 가정불활를 겪으며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믿음의 공동체를 만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저의 죄가 조금씩 깨달아졌습니다. 더럽고 음란한 나의 죄를 보지 못하고 전처를 정죄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이혼을 감행한 죄를 회개했습니다(13B절). 그러자 비록 하나님을 떠난 것 같은 삶을 살았지만 제가 저주받지 않고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12절). 이제는 날마다 교회 공동체에 저의 죄를 고백하면서 불신결혼과 이혼을 고민하는 지체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사명을 잘 감당하길 소망합니다.
적용1)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원하는 대로 합리화하지 않겠습니다. 적용2) 지체들의 불신결혼이나 이혼을 막을 수 있도록 저의 죄와 삶을 낱낱이 전하며 권면하겠습니다.
결 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점술사 발람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낱 점쟁이에게 만군의 여호와께서 굳이 나타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사주를 받아 복을 빌어 준 사람에게 복을 주고, 저주를 내려달라고 하는 사람에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어서 방문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복 받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사람들이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고, 건강해서 오래 살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 그런 복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하나님과 직, 간접으로 연결되어 받는 복을 말합니다. 단순히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복만이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복은 미래적이고 영적이고 비가시적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는 물질이 좀 부족해도, 하는 일이 잘 안 풀려도, 병약해서 오래 살 것 같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복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진정 복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이 진실된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사는 복! 그래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복이 진짜 복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계에서 가지는 풍성한 코이노니아, 그것을 누리는 웰빙! 그것이 받은 복이고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받은 백성입니다. 이를 확신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하여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