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10,13).
제2절 기도의 길
2663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 각 교회는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상황에 따라,기도의 언어, 곧 말과 음악과 동작과 성화 등을 신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기도의 길들이 사도들의 신앙 전통에 충실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교도권의 권한이며,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는 그 기도의 길들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사목자들과 교리 교사들의 일이다.
성부께 드리는 기도
2664그리스도교 기도의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뿐이다.우리의 기도는,그것이 공동체적이든 개인적이든,소리를 내어 하는 것이든 마음속으로 하는 것이든,예수님의 ‘이름으로’하는 기도가 되어야만,성부께 다다르게 된다.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은 성령께서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길이다.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2665하느님 말씀과 전례 거행으로 양육되는 교회의 기도를 통하여,우리는 주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교회의 기도는 그 누구보다도 성부께 드리는 것이지만,기도는,전례의 모든 전통 안에서,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문들을 포함하고 있다.교회의 기도 안에 도입된 일부 시편들과 신약 성경에 따라,다음과 같은 호칭들로써 그리스도를 부르면 바치는 기도를 우리 입으로 외우며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하느님의 아들,하느님의 말씀,주님,구세주,하느님의 어린 양,임금님,사랑하는 아들,동정녀의 아들,착한 목자,우리의 생맹,우리의 빛,우리의 희망,우리의 부활,사람들의 친구.
2666그러나 이 모든 호칭들을 집약하는 이름은,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강생하실 때 받으신 이름,곧 ‘예수’라는 이름이다.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의 입술에 담을 수 없지만,하느님의 ‘말씀’은,인성을 취하심으로써,우리에게 그 이름을 건네 주셨기 때문에,우리는 그 이름을 ‘예수’,‘야훼YHWH는 구원하신다.’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예수라는 이름은 모든 것,곧 하느님과 인간,창조와 구원의 경륜 전부를 내포한다.‘예수님’을 부르면서 기도드리는 것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요,우리 안에 계신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예수님의 이름만이 그 이름이 의미하는 현존을 내포한다.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으며,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2668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늘 기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겸손되이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으로 자주 되풀이한다면,이 기도는 “말을 많이 함”(마태6,7)으로 흩어져 버리지 않고,오히려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게 한다.”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어느 때라도’가능한 것이니,그것은 다른 일에 덧붙여서하는 부수적인 일이 아니라,오히려 단 하나의 중요한 일로서,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행동에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시키는 일이다.
2669교회의 기도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듯이,그분의 성심을 공경하고 존경한다.교회의 기도는 인간이 되신‘말씀’을 흠숭하며,인간에 대한 사랑으로,우리의 죄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 성심 또한 흠숭한다.그리스도교 기도는 구세주를 따라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총독 관저에서 골고타와 무덤에 이르는 14처는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한 걸음씩 따라가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
기억하소서,주님,먼 옛날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자애를.
(시편25,5-6)
“진리”란 ‘추상적인 진실성’이라기보다 오히려‘믿을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앤더슨).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라고 말씀하셨다.
“제 구원의 하느님”은 과거에 나를 구하셨고 미래에도 나를 구하실 하느님이다.카시오도루스에 따르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첫째는 하느님이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고,둘째는 인내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그분이 보상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옛날부터”라는 말은,하느님의 본질은 불변하기에 그의 백성은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 그분을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주님의 자비와 계약의 충실성이 강조되고 있다.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우리에게 있으며(아우구스티누스),우리가 은총을 받는 것은 우리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카시오두루스).
시편 25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25편의 시인은 주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그가 걷고자 하는 주님의 길은 시편1편에서 제시하는 의인의 길과 다르지 않다.그는 주님의 가르침이 그를 구원해 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지만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어려움들을 체험한다.무엇보다도 원수들이 그의 기를 죽이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그를 미워한다(2.19절).게다가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죄가 있음을 안다(7절).그래서 나약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도 괴로워한다.그는 마음의 곤경과 고난,비참함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또한 주님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죄를 용서받아야 함을 느낀다(11.18절).시인에게 주님은 선하고 바르며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다(8절).시인은 주님을 자기 인생의 스승으로 모신다(8-10절).그리고 하느님이 동행해 주시고 자신을 올바른 길로 직접 인도해 주시길 기도한다.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길이며,그분이 스승으로서 이끌어 주시고 동행해 주신다.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라고 말씀하셨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 著/바오로딸)
앞의 명칭들로 불리기 전에 신은 ‘나의(당신의,그의)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불리다가 세대가 증가하면서 혈연 관계의 명칭이 복잡해지자‘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렸다(탈출3,6.15-16;4,5참조). 이 세 가지 특별한 호칭은 서로 관계없던 세 예배 집단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그러다가 이 세 집단이 후에 모세의 야훼 신앙 속으로 융합되면서 그 모든 선조들의 신들이 동일한 신으로 이해된 후부터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씨족의 창시자나 지도자에게 신의 계시가 내려진 다음 그 창시자나 지도자가 신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의해 신에게 바쳐지는 제의와 예배의식이 뒤따르는 씨족 종교들의 형태에 따라 족장들은 이스라엘 초기시대의 계시를 받아들인 사람들이고 제의를 설립한 사람들이다.또 구약의족장 전승에서 처음부터 있었던 특별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후손이 번성하리라는 것과 팔레스티나 땅을 주리라는 약속이었다.이 약속들은 목장을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아가던 유목민들의 소망을 보여주며 생활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한 기본 토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성경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종교의 창시자로서 구체적인 골격을 형성한 것으로 드러난다.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이스라라엘의 신앙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사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경의 중심 주제인 구속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하느님은 땅과 자손을 약속하신다
(창세12,1-3참조). 이 하느님의 약속은 거듭 보증되면서
(창세13,14-16;15,5.18-21;18,18-19참조)모세에게도 다시 주어졌다
(탈출3,6-8;6,2-8등 참조).약속의 땅,가나안이 주어짐으로써 실현되기 시작한 이 하느님의 약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궁극적인 선조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족장들의 신앙이 야훼 신앙 안으로 흡수되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깊이 있고 굳건하게 형성되었다.
(성서 못자리 입문 이스라엘 역사37-38쪽/서울대교구 성서사목부)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 이상 검은 물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넘어짐에 대하여/정호승)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