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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의 핵심 교설을 말하다> 독서 요약 : 김대우 지음, 2023.08.10. 불교시대사 발행, P.226. 15,000원
01.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
-금강(金剛)은 이 세계에서 어떤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본래청정심을 말한다.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일컬어지는 금강반야바라밀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과 대각(大覺)과 원각(圓覺)과 본각(本覺)과 해탈(解脫 : 무여열반)과 진여(眞如)와 본래청정심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의미가 다 같은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다른 말로 하면 本心(佛心), 本性(佛性), 本覺(佛覺)이고, 무상정등정각이며, 본래청정심이다. 本心의 성품이 本性이고, 本心의 覺性이 本覺이다.
-경(經)이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교설로, 즉 미혹(迷惑)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미혹의 사상심(四相心)에서 벗어나 본래청정심을 체득하여 무량무변공덕(無量無邊功德)의 세계인 성불(成佛)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공덕(功德)이란 국어사전적으로는 여러 사람을 위하여 착한 일을 많이 쌓는 일인데, 불교에서는 게으름 없는 수행에 임하여 無我의 경지를 체득하고. 사상심(四相心)에서 완전히 벗어난 본래청정심에 들어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인 成佛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02. 생멸심(生滅心)·분별심(分別心)·사량심(思量心)
-생멸심이란 생각(번뇌와 망상과 잡념)이 일어났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말하고, 분별심이란 옳다, 그르다 등과 같이 구분하고 차별하는 마음을 말하며, 사량심이란 좋다, 나쁘다 등과 같이 헤아리는 마음을 말한다.
-생멸심과 분별심과 사량심이 일어나고 반복될수록 어두운 업(業)이 쌓인다. 생멸심과 분별심과 사량심은 그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 그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불교의 바른길에 들어 공덕의 문이 열린다.
-생명심과 분별심과 사량심은 미혹과 망상과 어리석은 마음의 집합체인 사상심(四相心)에 다 포함되어 있다.
-수행하는 자는 그 마음을 큰 비위서 그 어떠한 칭찬이나 존경의 말에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또 어떠한 욕설과 악담과 비방에도 그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마음일 때, 불교의 바른 길에 들어 공덕의 문이 열린다.
03. 사상심(四相心)
-상(相)이란 일체의 물질적인 것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심과 분별심과 사량심을 말한다. 사상심(四相心)에는 4가지가 있다. 이 4가지의 어두운 죄업(罪業)이 쌓이면 숨을 거둔 뒤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거나 불행의 씨앗이 된다.
(1)아상(我相) : 내 몸이 있음을 인식하는 자기중심의 마음이다. 자기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아집과 아만(我慢)의 상이고, 내가 최고라는 이기심이며, 미혹의 어리석은 마음이다.
(2)인상(人相) : 내 몸이 남의 몸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여 편 가르기를 하는 차별상의 마음이다. 내편은 승승장구하고 상대편은 몰락하기를 바란다. 그 예로 당파싸움과 나라간의 전쟁 등이 있다.
(3)중생상(衆生相) : 내 몸에 애착을 두고 좋아 보이는 물질, 재물 등 모든 것에 대한 탐욕과 집착의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이 있게 된다. 또 자신은 범부 중생이므로 성불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하여 수행을 하지 않는 마음이기도 하다.
(4)수자상(壽者相) : 내 몸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무병장수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헐뜯기도 하고 손해를 입히기도 하며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사상심(四相心)은 미혹과 번뇌와 망상과 망견의 총 집합체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사상심(四相心)의 세계다.
-아상(我相)이 있음으로 인하여 인상(人相)이 일어나고, 인상이 있음으로 인하여 중생상(衆生相)이 일어나며, 중생상이 있음으로 인하여 수자상(壽者相)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아상(我相)이 일체상(一切相)의 근본이다. 아상(我相)이 없어지면 일체상(一切相)이 없어진다.
-나(我)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도 무량무변공덕의 본체인 본래청정심은 없어지지 않는다. 본래청정심이 참나(眞我)이기 때문이다.
04. 허상(虛相)
-이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형상(形相)과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형상(形相)들은 모두가 다 허상(虛相)이다. 그것들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고, 또 명을 다하여 숨을 거둠과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자기에게서 영영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자녀권속들에 대해서도 애착하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디에도 속박되거나 걸리지 않는 마음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 사상심(四相心)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본래청정심을 체득하여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인 성불(成佛)에 도달한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은 참된 자기가 아닌 것을 참된 자기로 착각하여 사상심(四相心)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대육신도 이 세상의 인연에 의하여 잠시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서 100년도 못가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허상이다.
-물러나지 않는 심심(信心)으로 수행을 거듭하여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눈에 들어오는 일체의 모습과 형상들에 대하여 탐착하는 마음과 집착하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지면 본래청정심에 들어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인 성불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금강경>의 교설이다.
05. 마굴(魔窟)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한 광명의 세계로
-마굴(魔窟)의 세계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과 말과 뜻으로 죄업을 지으며 살아가는 미혹의 세계를 말한다.
*불교의 삼독(三毒)은 탐진치(貪-팀힐 팀. 嗔-성낼 진, 痴-어리석을 치)이고, 불교의 삼업(三業)은 신구의(身-몸 신, 口-입 구, 意-뜻(마음) 의)이다.
-수행생활을 등지고 외면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어두운 죄업만 짓는 개인이나 단체를 가리켜 마魔)의 굴(窟)에 들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①돈 버는 일과 ②여행가고 노는 일과 ③잠자는 일과 ④자기 자신이 좋아하고 중독된 일에만 몰두하여 살아간다면 축생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들과 같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것을 마魔)의 굴(窟)에 들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상생활과 병행하여 수행이라는 목욕을 통하여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죄업의 때를 깨끗하게 씻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죄업이 자꾸만 쌓여서 목숨을 마친 뒤에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대로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것이 불교의 여러 경전 및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성불(成佛)에 도달하면 영원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깨끗한 경지가 끝이 없다. 무량한 광명이 무량한 어두움을 일시에 몰아낸다. 성불(成佛)에 도달하면 무량한 광명의 세계에 입성한 것이므로 억겁에 지은 죄업이 일시에 소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여기에 이르러 인과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남과 동시에 일체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06. <금강경> 수지독송(受持讀誦)의 공덕(功德)
-수지(受持)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고, 것이고, 독송(讀誦)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수시로 몇 번이고 읽어보아서 그 내용을 확연히 알고, 사상심(四相心)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으로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리저리 헤아려서 어떤 내용은 맞는 것 같고, 어떤 내용은 틀린 것 같다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거나 외우지 말아야 한다. 신명을 다 바쳐 금강경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마음이 지극해야 하고 밝고 맑은 청정심의 순수한 마음으로 읽거나 외워야 한다.
07. 바른 견해=정견(正見)
-불교에 입문한 불자(佛子)들이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 정견(正見)이다. 정견이 무너지면 계속해서 육도윤회(六道輪回)의 세계에 속박되어 헤매기 때문이다.
-정견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1)첫째, <금강경>의 교설을 믿어야 한다. 범부 중생일지라도 금강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기억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정견이 확립되고 수행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범부 중생이므로 성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열등의식을 버려야 한다. 누구나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믿어야 한다.
(2)둘째,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철칙을 믿어야 한다. 인과응보의 철칙이란 불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주의 근본원리다.
-그런데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인과의 법칙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많다. 악업을 많이 짓고 있음에도 재물을 모으고 부유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인과법칙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과거 전생에 선업을 닦아 복을 지었으므로 인하여 금생에 이르러 복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생의 악업의 과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금생에 쌓은 악업의 과보는 금생의 말년에 받거나 아니면 내생에는 반드시 불행한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시차를 두고 도래하는 현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견(正見)을 무너뜨리는 일로서 제일 위험한 것은 사주·관상 및 점을 보러 가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복업(福業)을 짓는 일에 손상을 가져오고, 영원한 광명의 세계에 드는 성불의 길에 손상을 가져올 뿐, 인생행로의 복덕과 광명을 불러오는 일에 전혀 공덕이 되지 않는다.
08.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
-본래청정심에 들었다는 것은 사상심(四相心)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또한 형형색색의 모든 형상(形相)과 일체의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지를 말한다. 본래청정심에 이르지 못하면 일체가 미혹(迷惑)이고, 미망(迷妄)이며, 망견(妄見)이고, 망상(妄相)이며, 환상(幻相)이다. 중생은 탐욕의 혼돈 속애서 미혹과 망견과 망식을 ‘참 나’로 착각하는 가운데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심으로 인하여 본래청정심이 덮여져 있다. 본래청정심이 곧 성불(成佛)이다.
-서기 800년대 중반, 중국의 설봉대사는 17세에 스님이 되어 수행에 정진하였다. 87세가 되었을 때, 제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숨을 거둔 뒤에 육신은 부패하지 않을 것이니, 화장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고 명하였다. 그 뒤 오래도록 육신이 부패하지 않으므로 중국의 황제는 석탑을 조성하여 그 탑에 봉안토록 당부했다. 그가 생전에 수행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던 복건성 설봉산 숭성사(崇聖寺) 경내의 석탑에 봉안되어 등신불(等身佛)이 되었다. 설봉대사의 수제자인 운문대사(雲門大師)와 대만의 청엄법사(淸嚴法師)도 등신불이 되었다.
-한국인 출신 등신불이 계시니, 바로 지장법사(地藏法師)이다. 신라 효소왕의 왕자로 테어나 99세에 입적하여 12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생생한 모습으로 중국의 구화산 <육신보전>에 등신불로 봉안되어 있다. 등신불은 중국에 10인, 대만에 3인, 홍콩에 1인, 베트남에 1인이 계신다. 일본에는 불교가 융성한 나라답게 모두 21인의 등신불이 계신다.
09. 중생은 실체 없는 의식작용을 참나(眞我)라고 알고 있다.
-불교수행의 본체(本體)는 ‘참 나’인 본래청정심을 체득하는 것이다. 본래청정심에 들기 위해서는 미혹의 거짓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여실이 알아야 한다. 거짓된 마음이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심(四相心)이다. 실체가 없는 거짓된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이란 미혹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과 잡념의 자아의식을 완전히 비워서 무아(無我)의 경지에 드는 것을 말한다. 무아의 경지에 들어도 본래청정심은 없어지지 않는다. 본래청정심은 나의 본체(本體)이기 때문이다.
10. 만나기 어려운 희유한 진리
-사람은 명이 다하여 숨을 거둔 뒤에 또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또 부처님의 더없이 거룩한 정법(正法)의 가르침을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다.그런데도 중생들은 수행의 시간을 낼 수 있음에도 수행을 하지 않고 외면하는 이들이 수 없이 많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정치, 바둑, 낚시, 마약 및 음주, 도박, 게임, 조직폭력배 단체 가입 활동 등의 마업(魔業)에 중독되어 지혜가 어두워지고 온갖 실수와 악행을 저지른다. 전쟁범죄의 참상은 형언할 수 없다. 이러한 악행들은 인과응보의 법칙대로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 축생의 몸을 받아 태어난다면 수행을 할 수 없으므로, 탐하는 마음(貪), 화나는 마음(嗔), 어리석은 마음(痴)의 삼독심(三毒心)만 자라게 된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을 때, 일상생활과 병행하여 꾸준히 수행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몸에 때가 쌓이면, 자기 스스로 목욕을 해서 때를 씻는 것과 같이, 과거 전생 억겁 전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저질러지고 쌓여진 죄업을 씻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수행이라는 마음의 목욕을 통하여 죄업을 소멸시켜 맑혀야 한다. 수행은 자기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자기가 지은 죄업은 그 누구도 대신하여 소멸시켜 줄 수 없다. 가족이라도 대신할 수 없다.
11. 수행(修行)
-<금강경>에서 사상심(四相心)은 실체가 없는 환상(幻相)임을 말한다. 사상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육도윤회(六道輪回)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짓된 나를 벗어나는 길은 무아(無我)의 경지에 드는 수행이 있을 뿐이다. 참된 나를 깨닫는 길은 본래청정심을 체득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선(禪) 수행과 더불어 염불(念佛) 수행을 한다면 금상첨화다. 선 수행에는 ‘이뭣꼬?’에 몰입하는 화두선(話頭禪)아 있고, 그리고 그 마음이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들어 있되, 흐리멍텅하거나 또는 졸지 않으면서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깨어 있는 묵조선(黙照禪)이 있다. 이 둘은 일반 불자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수행이므로 난행도(難行道)라 한다.
-세속의 일반불자들이 비교적 실천하기 쉬운 선(禪) 수행은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리되, 여기에 몰입하여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선정(禪定)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이와 같이 사상심(四相心)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드는 수행이 거듭되는 것은 생멸(生滅)이 없는 대자유의 각성(覺醒)에 이르는 수행이므로 이것은 선(禪) 수행이다.
-염불(念佛)은 일체의 미혹에서 벗어난 마음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심은 부처님 본체의 마음을 염(念)하여 끊어짐이 없는 수행을 거듭하는 것이다. 즉, 부처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드는 수행을 거듭하는 것이다. 일체의 미혹에서 벗어난 마음이 진정한 염불이다. 따라서 <금강경>의 교설은 선 수행인 동시에 염불 수행이다. 선 수행을 통하여 삼매(三昧)에 드는 것이나, 또는 염불 수행을 통하여 삼매(三昧)에 드는 것은 다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화엄경)에는 부처님 다음의 지위 즉, 부처님 버금가는 십지보살(十地菩薩)은 처음부터 끝까지 염불 수행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대집경>에는 불교가 쇠퇴하는 말법 시대에는 염불수행에 의지해야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현시대에 대한민국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염불수행의 방법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 무량광불(無量光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중에 한 분을 선택하여 그 명호(名號)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계속적으로 염송(念誦)하는 것을 염불수행이라 한다. 무량광불은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아미타불의 화현(化現)으로 나투신(=나타나신) 보살들이다.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토록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에 드는 길은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의 시간을 배정하고 게으름 없이 무아의 경지에 드는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식관(數息觀)의 선 수행과 병행하여 염불 수행을 하는 것이다. 염불삼매는 모든 삼매의 왕이라고 하여 보왕삼매(寶王三昧)라고도 한다. 염불삼매는 능히 모든 번뇌와 지나간 세상의 모든 죄업을 소멸시켜 준다.
-‘나무아미타불’의 나무(南無)는 온 생명을 다 바쳐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阿彌陀)는 무량무변공덕의 세계를 뜻하고, 불(佛)은 원만하고 원융무애하며 위없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은 무량무변공덕의 원만하고 원융무애하며 위없는 깨달음에 목숨 바쳐 귀의한다는 뜻이다. 염불 삼매에 들면 사상심(四相心)에서 벗어나 손해와 이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언제나 마음이 밝고 맑아서 늘 마음이 평안하다.
12. 중요한 것은 수행이다.
-수행을 외면하고 등지는 것은 어둡기 짝이 없는 마(魔)의 굴(窟)에 드는 것과 같다. 반면에 게으름 없이 수행 정진하는 것은 광명(光明)이 넘치는 보배의 동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수행을 하기 위해 이 세계에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세계는 끝없이 혼탁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비인간화의 현상이 무수히 일어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축생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중생들은 혼탁한 이 세계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죄업을 지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혼탁한 이 세계에서 수행을 하지 않고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인 성불에 이르는 길은 없다. 가족 중에 누가 대신하여 대리 수행을 해주지도 못한다. 그리고 가족들을 참불자로 성장시켜야 한다. 자녀 권속들과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재산도 살아생전에 잠시 인연했던 것뿐이다. 명(命)이 다한 후에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영원히 자기의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했다. 일장춘몽과 같이 순간에 불과한 이 세계에서 재물과 자녀 권속들에 집착하느라 수행을 외면하고 등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나타난 보물을 잡으려고 집착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영겁에 걸쳐 누릴 수 있는 아주 큰 보배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저질러지고 쌓여진 죄업은 초능력자에게 매달리며 기도해도 소멸시켜주지 못한다. 내가 지은 죄업은 내 스스로 수행이라는 목욕을 통하여 소멸시킬 수밖에 없다.
13. 무아(無我)
-불교수행은 사상심(四相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상심이란, 미혹(迷惑)과 미망(迷妄)의 탐착과 집착과 애착과 번뇌와 망상 등, 일체의 어리석은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지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범부(凡夫) 중생에게 나라고할 만한 것은 없다. 범부는 사상심(四相心)으로 ‘참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의 경지에 들고 사상심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증득한 후에는 ‘참 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본래청정심이다.
-무아(無我)는 사상심(四相心0에서 벗어난 자리이고, 일체의 미혹된 마음에서 벗어난 자리이며, 그리고 삼라만상이 실체 없음을 깨달은 자리이다. 무아의 경지에 들어도 본래청정심은 없어지지 않는다. 본래청정심은 나의 본체인 동시에 일체 공덕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14. <금강경>의 교설을 따라 수행생활을 실행한 공덕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은 흔히 이 세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존엄한 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수행의 중요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가 명이 다하여 숨을 거둠과 동시에 자기가 탐착하고 집착하며 애착했던 귀중한 보석과 재물과 자녀 권속들이 모두가 다 사라지고 없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똑같이 구제되어야 한다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일으키는 이를 가리켜 신심(信心)이 견고한 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교설을 배우고 익히는 이가 반드시 간직해야 하는 마음가짐은 자기도 성불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간직하고 반드시 성불에 도달하겠다는 굳건한 믿음과 서원(誓願)이 있어야 한다.
-온 우주 모든 세계에 성불(成佛)의 공덕을 능가할 공덕은 없다. 성불의 공덕이란 영원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깨끗한 대자유, 대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수많은 빈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제한 보시(布施)의 복덕은 많고 많으며 크고 크다. 그런데 이보다 더 복덕은 <금강경>의 교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그 뜻을 설명해주는 일이다. 금은보화에 의한 구제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만의 구제이지만, <금강경>의 교설은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인 성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온 우주 모든 세계에서 성불에 도달한 공덕(=위없는 깨달음)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
15. 중생을 다 구제하리라.
-중생은 제각각 사상심(四相心)과 미혹의 번뇌와 망상과 자아의식이 다르므로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천만가지의 차별심과 분별경계가 벌어진다. 그리하여 다툼과 분쟁과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
-사람은 마땅히 자기 자신이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움과 아울러 자기와 인연 닿는 모든 이들에게 <금강경>의 교설을 전하여 끝까지 교화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타인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자기 자신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검은 구름을 몰아내어 보시와 자비와 지혜의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16. 성불(成佛)
-성불이란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뜻한다. 영원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깨끗하며 대자유, 대해탈의 경지가 끝이 없어,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에 든 것을 말한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다한 업무량에 시달린다. 바쁘게 일을 하는 와중에 뇌에 과부하가 걸려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순간이 있다. 이것이 습관화되면 10분 내지 20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 잠시 잠깐 지난 것으로 착각하여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무기(無記)에 빠졌다고 한다. 무기에 빠지면 자기 스스로 無我의 경지에 든 것으로 착각하여 수행에 방해가 되고, 뇌의 활성화를 막아 지혜가 어두워진다. 담배를 피워 뇌를 식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담배 한 개비 피우는 시간 동안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식관(數息觀)의 선(禪) 수행과 병행하여 부처님 명호(名號)를 염송(念誦)하는 염불수행을 하면 가장 효과적인 뇌의 휴식방법이 된다. 그리하여 無我의 경지에 들어 사상심(四相心)에 벗어나 본래청정심을 체득하고, 무량무변공덕의 세계인 성불에 도달한다.
-탐욕과 집착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 망상, 잡념 등의 혼미한 파도가 넘치는 이 세계는 혼돈의 바다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교설은 그런 혼돈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튼튼한 배와 같다.
17.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
-무주상보시란 어디에도 집착하는 바 없고, 내가 보시했다는 상(相)을 내거나 생색내는 바 없이 사원에 재물로 보시하거나 또는 어려움을 겪는 타인에게 물질적으로 베풀거나, 육체적인 노력으로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불교의 경전 내지 <금강경>의 교설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을 ‘진리의 무주상보시’라 한다.
-재물로 진리의 도량(道場)인 사원에 무주상보시를 실천함으로써 사원을 지키는 것은 영원한 진리와 공덕에 젖어드는 것이다. 물질은 순간이고, 진리는 영원하다.
-자기에게 해악을 끼친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그에게 원수라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금강경>의 가르침을 전하여 교화하는 마음은 진리의 무주상보시다. 원수라는 개념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오직 구제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자비심으로 충만할 때 참 불자(佛子)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어느 의사가 마음이 아주 평안한 사람의 피를 쥐에게 주사한 결과 그 쥐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활동했지만,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 사람의 피를 쥐에게 주사했더니 그 쥐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고 한다.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그의 혈액은 독으로 변한다. 따라서 심장과 간에 큰 손상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온갖 질병이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는 살아생전에 이 세계에서 좋아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하여 집착의 마음과 원망과 문노의 억울한 마음을 내려놓고 없애야 한다. 미혹과 어리석은 마음의 집합체인 사상심(四相心)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토록 육도윤회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과거 전생 무량억겁 전부터 헤아릴 수 없이 무량한 세월을 지나오면서 몸을 바꾸어가며 나고 죽음을 거듭하는 것이 중생들의 실상이다. 사상삼(四相心)에서 벗어난 무아의 경지인 본래청정심에 들면 원망과 분노와 철천지원수라는 치별심의 개념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모두가 한 생명이고 한 뿌리임을 깨닫게 된다.
-금생에 마약에 빠지거나 술에 취하기를 거듭하면 악한 마음이 발동하고 지혜가 퇴보하여 내생에는 축생으로 태어난다. 금생에 악행의 범죄를 많이 저지르면 내생에는 굶주리는 아귀세계에 떨어지거나 또는 지옥에 떨어진다. 육도윤회(六道輪回)의 세계란, 천상계, 인간계, 싸우기를 일삼는 아수라계, 축생계, 굶주리는 아귀계, 지옥계를 말한다.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면 수행생활을 실행할 기회가 없다. 무주상보시를 실천함과 아울러 수행생활을 실천하여 무아의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망상과 망견과 미혹의 집합체인 사상심(四相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본래청정심에 입성(入聖)해야 한다.
-과거 전생에 善行의 복업을 아주 많이 지었다면 천상계(天上界)에 들어 오랜 세월동안 복락을 누린다. 그러나 그 복락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자기가 지은 복력(福力)이 다 소진될 때가 있고, 그에 따라 인간세계로 떨어지거나 또는 그 이하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천상에 나고자 하는 원(願)을 세우지 말고, 성불에 이르고자 하는 원(願)을 세워야 한다.
-전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善業을 지었으나, 자기가 지은 복력이 빈약하면 사람으로 태어나되, 가난한 과보를 받아 태어나서 애로가 많아진다.
18.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囑)
-선호념에서 선(善)의 의미는 일체의 차별을 떠난 일체선(一切善)을 말한다. 이러한 일체선에 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비인간화의 길에 들지 않아야 하고 수행정진을 통하여 무아의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 선호념이란 부처님께서 중생들로 하여금 본래청정심에 입성(入聖)하여 일체선의 경지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옹호하는 대자비심이다.
-선부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연 닿는 사람들에게 잘 전하여 그들을 교화하여 구제하라고 당부하시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다.
19. 환몽(幻夢)
-이 세계에서 지어지고 만들어지며 작위적(作爲的)인 일체의 모습과 현상(現相)들이 실체가 없는 환영(幻影)과 같으므로, 이것을 여실히 관찰하여 실체 없는 거짓된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계에서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현상(現相)을 사(事)라 하고, 그 현상으로부터 벗어나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걸리지 않는 자유인이 된 것을 이(理)에 들었다고 한다.
-본래청정심을 깨달아 체득하면, 자기 자신으로 믿었던 사대육신(四大六身)과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자기 자신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모두 환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거의 마음은 지나가 버렸으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은 머무름이 없으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얻을 수 없다. 이것을 깨달아 과거, 현재, 미래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에 구속되지 않고 속박되지 않는 원융무애한 대자유의 경지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은 그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잡을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무엇을 얻으려 하고 잡으려 하며 소유하려 해도 목숨을 마친 뒤에 자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얻으려 하거나 구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만 본래청정심에 입성(入聖)한다.
-이 세계에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계에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에만 공덕을 쌓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금강경>의 가르침을 얻어 만나서 그 뜻을 알기란 백천만겁이 지나도록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안다면 수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몸을 가지고서 어찌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승자(大乘者)와 최상승자(最上乘者)란 성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견고한 서원(誓願)을 일으킨 사람을 말한다. 이 세계에서 부귀영화와 명예와 무병장수와 오욕락 등등, 세속적인 가치에만 집착하여 거기에 매몰되면 성불에 이르고자 하는 견고한 원력(願力)과 신심(信心)을 일으키지 못한다.
20. 무위심(無爲心)으로 행하는 수행이 참 수행이다.
-행함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무위심이 참 수행이다. 공기를 들어 마시되, 마신다는 생각 없이 마시는 것과 같이 아상(我相)을 내지 아니하고 수행하는 즐거움에 빠져들어야 한다.
-성불에 도달했다는 생각마저 벗어난 경지가 성불이다. 즉, 성불의 경지를 사량(思量)하여 헤아리지 말고 수행생활을 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21. 즉비(卽非)의 가르침
-즉비(=즉, 아니다.)의 가르침이란 부정의 이면에 긍정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정을 통하여 긍정을 불러오는 가르침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에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다.”라는 아리송한 대목은 “중생이 수행 정진하여 성불에 도달하면 더 이상 중생이 아니다.”라는 뜻인 즉비(卽非)의 가르침이다.
-‘<금강경>이 <금강경>이 아니고 그 이름이 <금강경>이다‘란 즉비의 가르침은 <금강경>의 교설이 苦海의 세계를 건너게 해주는 튼튼한 배와 같다. 그 배에 의해 육지에 도달했다면 그 배는 버려도 되는 것처럼 성불에 도달하면 <금강경>은 버려도 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한국불교의 큰 스승인 무비대사(無比大師)는 불전에 삼천배(三千拜)를 하는 것보다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그 뜻을 타인에게도 설명해주는 공덕이 더 크다고 했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다”는 과거의 마음은 지나가 버렸으니 없는 것이고, 현재의 마음은 머무름이 없으니 집착할 바가 못 되며,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과거의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오늘의 고생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며,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근심걱정에 사로잡히는 마음은 그 실체가 없는 환상(幻相)이라는 뜻이다. 실체가 없는 환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것은 미혹의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라는 즉비(卽非)의 논리를 깨달아야 한다. 본래청정심 즉, 본각(本覺)은 언어와 문자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깨달음의 당체(當體)이다.
-아들이 며느리에 빠져 어머니를 소홀히 대할 때, 시기질투심이 발생해 괴로움에 빠져들 때에는 ‘아들이 아들이 아니고 그 이름이 아들일 뿐’이라고 직관해야 한다.
22. <금강경>에 다음의 사구게(四句偈)라도 전하여 알려주면 무한한 공덕(功德)을 있다고 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 눈에 들어오는 모든 현상(現象)과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意識 境界에서 일어나는 일체상(一切相) 즉, 일체의 미혹은 그 실체가 없는 虛妄이라는 것을 깨달아 無我의 경지에 들면, 청정각성(淸淨覺性) 즉, 여래에 입성(入聖)한다. |
不應住色生心(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붕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 而生基心(응무소주 이생기심) | 마땅히 눈에 보이는 일체의 모든 모습과 현상(現象)에 집착하고 속박되어 일어난 마음이 아니어야 한다. 마땅히 소리와 향기와 미각과 촉감과 의식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집착하고 속박되어 일어난 마음이 아니어야 한다. 마땅히 어디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속박되지 아니하며 머무는 바 없이 성불에 들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 유형의 물질과 무형의 의식작용과 눈에 들어오는 모든 모습들 즉, 現象은 지난밤 꿈과 같고 환상(幻相)과 같으며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또한 아침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으므로 응당 이것들을 直觀하여 바로 보아야 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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