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글 | 스텔라 박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오의 복음서 6장 9~13절 (공동번역 성서)
현재의 삶은 늘 내게 화두를 던진다. 머리 빠지게, 정말 뚜껑이 열리도록, 깊이 참구하게 한다. 한 번 뻥 뚫리면, 소위 ‘한 소식’ 하면 그 뿐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후로도 정말 정기검진하듯 끊임 없이 도전해온다.
하기야 다겁생래 지은 업장, 즉 덧입혀진 조건, 채색된 그 모든 것들이 그리 쉽게 떨어질리 없다. 아무리 본래 마음 자리를 봤어도… 왜냐…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급 브레이크를 밟아도 기차는 바로 브레이크를 밟은 자리에서 서지 못하고 앞으로 밀려 나간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돈오점수에 한 표를 던진다. 성철스님은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에 대해 “깨치지 못한 거짓 선지식이 알음알이(知解)로 조작해 낸 잘못된 수행이론”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지눌 스님과 성철 스님이 맞짱 뜨시는데 내가 “지눌스님 화이팅!”하는 것이 뭔 의미가 있을까… 그저 아님 말고…일 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내가 돈오점수가 맞다고 한다고 맞지 않는 것이 맞아질리도 없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밝히 알 뿐이다.
어쨌든 최근의 나의 경험이다. 쓰고 보니 내가 뭐 한 소식 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말하기도 거시기 하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거시기 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제한된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는 나와 내가 경험하는 세계 모두를 바라보는 의식임을 확연히 알았지만 과거의 습이 남아 있다. 몸을 나라 여기는, 내 생각을 나라고 여기는, 형성된 것들을 나라 여기는…
순간순간 깨어서 바라보다가 홀연히 깨닫는다. 내가 하고 있는 놀이를… 나는 이 녀석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점검한다. 그러니 선사에게 가서, 스승에게 가서 점검받을 필요도 사실은 없다. 자기자신이 가장 잘 안다. 자등명법등명이다.
나에 대한 평가, 비난, 사람들의 대응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던 순간이 왔다. 참 별 거 아닌 게 아프게 다가왔다. 마치 산에 올랐을 때 눈앞의 큰 바위가 아니라, 내 신발 안에 들어간 모래보다 약간 큰, 아주 작은 돌조각이 내게 가장 아픈 것처럼…
그래서 철저히 느껴봤다. 평소 선정을 닦으면, 즉 대단한 삼매의 기쁨이라기보다 고요함, 다시 말해 현재에 대해 탐착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으며 완전히 현재와 함께 흐르다 보면 그 고요함과 평화의 맛을 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은 몸에 기억된다. 근육으로 기억된다.
방석 위가 아니라, 삶이라는 실전 문제가 펼쳐질 때, 그 변화무쌍한 움직임 속에서 잠깐 잠깐씩 몸이 긴장할지 모르지만 내 몸은 늘 삼매의 저항 없음, 고요함으로 되돌아간다. 아니, 이렇게 고요함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깨어 있는 의식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몸이 긴장하고 있다고 알아차리면 “지금 긴장하고 계십니다. 내려놓으십시오.”라고 충직한 신하가 아뢰듯, 몸에게 말해준다. 그러면 너무 가까이 봐서 크게 보이던 문제로부터도 잠깐 떨어져 관조하게 되고 내려놓게 되고 다시금 긴장이 사라지고 이완하게 되면서 마음도 긴장을 풀게 된다.
그런데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 제법 난이도 높은 것을 푸셨군요.”라면서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온다. 이 난이도 높아진 문제는 하도 미묘하여 잘 알아차려지지도 않는다. 겨우겨우 알아차린 후, 몇날며칠을 고민하다보면 괴로움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상하다. 아무 것도 안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괴롭지?” 남들의 평가며, 따돌림 당한다는 느낌이며, 모두 내 마음이 지은 것이잖아. 모든 게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오는데... 나는 지금 이 세상에 뭘 내보내고 있지?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또 한 차례 섬광이 스쳤다. 그래…. 인정...나(형성된 나) 워낙 재수 없는 X이야. 그걸 인정해버린 것이다. 하하하… 그래, 바로 그거다.
그렇다고 뭐가 문제인가. 그냥 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 되지. 나로 하여금 세상에 섞이지 못하게 하고, 늘 외톨이이게 하고, 겉돌게 하고, 외롭게 하고, 고독감에 가슴 아프게 하고, 눈물짓게 하고, 울먹이게 하고, 잠못들게 하고, 밤바다로 질주해 나가 “아~~~~~~~~~~~”하고 소리지르게 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마음공부 하게 하고, 방석 위에 꾸준히 앉게 하고, 침묵 속에 머무르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와 세상을 받아들이게 하고, 모두 나임을 깨닫고 ‘세상’이라 이름지은 것을 돕는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한 원동력은 바로 그 문제였던 것이다. 몸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였던 것이다.
주변에 재수 없는 인간들이 있어도 “그 역시 내 판단일 뿐, 내가 덧씌운 의견일 뿐, 제대로 보고 있지 않구나”, 하고 내려놓으면서 왜 재수없는 자신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걸까. 껄껄껄…웃는다. “재미있고만…“
하지만 나는 안다. 당분간 이 편안함이 계속되다가 또 어느 시점이 되면 삶이 또 다른, 조금 더 어려운 문제를 내게 제시할 것을… 그러면 또 머리 싸매고 “이건 뭐지?” 하면서 박터지게 고민하고 “왜 이런 일이…” 하는 날이 올 거다.
그런데… 몇 차례 이런 시험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그 시험마저도 저항을 내려놓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 같다. 물론 와봐야 알겠지만…
대승불교가 형성 발전되던 시절에 가르침을 편 예수는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기도할 때, “주의 기도(The Lord’s Prayer)”를 가르쳤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 부분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라고도 번역된다. 시험… 물론 영어 단어는 유혹(Temptation)이지만 그 유혹이 발가벗은 아름다운 여인의 몸 하나(색)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로 하여금 경계에 끄달리게 하는 모든 것들, 즉 안이비설신의로 경험하는 색성향미촉법 모두가 우리들을 유혹에 빠지게 할 수 있다.
1차적으로 그 경계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몸의 감각에 늘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타라 브락이 <받아들임(Radical Acceptance)>라는 책에서 밝혔고 UCLA MARC의 MAPs 클래스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이 도구는 RAIN이라는 머릿글자로 이뤄져 있다. Recognize, Allow, Investigate, Not Identify...의 약자를 모은 것인데 이제껏 ‘스텔라의 마음공부’ 칼럼에서 주구장창 썼던 내용이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허용하고 몸의 감각을 과학자가 관찰하듯 하라는 것. 그 과정 속에서 부정적 감정을 일으킴으로 활성화됐던 편도체의 활동은 잦아들고, 영장류의 뇌인 좌측 전전두엽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몸과 마음은 정상화(Regulate) 된다.
부처님 법을 완전히 이해해 자신이 누군인줄 여실히 알고, 바로 자기 자신인 타인들에게까지 그 법을 전하던 예수 보살마저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나는 내 안의 관자재보살에게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내 안에 계신 관자재보살님.
우리 존재의 근원인 관자재보살로 존재함으로써
부족하다는 의식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어 바라는 바가 없고
빼앗으려 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온전한 풍요와 평화의 선법계, 천상계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만큼의 양식이 이미 주어졌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우리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둘로 나누지 않고
그가 바로 나임을 알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나라 믿는 이 자가 세세생생 지은 업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시고 용서하소서.
시험이 다가올 때 시험인 줄 알게 하시고,
지금 현재 이대로 아무 문제없음을 알게 하소서.
늘 보는 자로 머물게 하시고
형성된 모든 것들이 생멸함을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가운데 지켜보게 하소서.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제 뜻대로 마시고
관자재보살 뜻에 따라 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
이 세계와 우주 모두가 관자재보살로부터 나왔습니다.”
시험에 드는 것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시험에 대한 알아차림도 더 깊어질 것이고 결국에는 시험에서 자유로워질 터이다. 당신이 시험에 들지 않기를… (꼭 그런 것은 아니다만…) 시험에 들었을 때 시험에 든 것을 알기를… 그리고 무릎을 일으켜 일어나기를…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