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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하 康濟河 1891. 6. 1 ~ 미상)】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서 부단장으로 활동
1891년 6월 1일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창성읍(昌城邑) 평로동(坪路洞)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지회(芝會)이며, 이명으로 강기수(康記守), 필성공(必成功)으로 불리었다.
1919년 4월 1일 평북 창성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천도교 장로였던 강제희는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 신용철·강이달·선우명·문창수·한선학 등과 함께 창성 읍내 서문 밖에서 민중 2,000여 명을 모아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병과 합세한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2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4~5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제 경찰이 주동자를 색출하자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이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때 강제하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넘어간 1919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서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1919년 4월 펑톈성(奉天省) 안둥현(安東縣)에서 조재건·함석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다. 조직 간부는 총재 안병찬, 단장 함석은, 서기 장자일, 간사 박영우 등이었고, 주요 구성원은 주로 20대 청년이었다. 대부분 근대적인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평북 지방 출신들이다. 강제하는 단원들을 여러 차례 국내로 밀파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조선인 관공서 관리들의 사직을 권고하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고,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議員團) 내한 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정운 등과 함께 국내에 들어가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경계가 엄중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경 관뎬현(寬甸縣) 장음자(長陰子) 대한독립청년단의 수령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대한독립청년단은 다른 독립군단과 규합하여 군자금 모금 및 무기 구입뿐 아니라 국내 암살대의 규모도 크게 늘려 더욱 활발한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권업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이해 8월 30일 남만주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통군부(統軍府) 대표 등 71명이 참석하여 결성되었다.
일제 측의 대한독립청년단 수령 강제하에 관한 보고(1920.10.29) [판형3] |
통의부의 중앙기구체제는 총장과 그 산하의 10개 부서, 비서과, 사판소를 겸비하여 군정과 민정을 아우르는 군정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해 말에는 12월 29일에서 1923년 1월 8일까지 11일간 개최된 대한통의부 제1회 중앙의회에 참석하여 대한통의부의 조직 개선에 참여하였다.
1923년 통의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갈등이 첨예화하자 그해 5월, 북간도의 이범윤·조성환·현천묵·김규식·김좌진 등 35명, 지린성 윤주영·나중소 등 22명, 서간도의 이천민·오동진 등 78명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연서(聯署)하였다.
12월경 통의부의 기구가 군사 방면에 더욱 주력하는 방식으로 개편되었다. 총장 아래 민사·군사·재무·학무·교통·실업의 6부를 두고, 각 부의 부장 아래 해당 기구를 배치하는 등 편제의 효율성을 기하였다. 강제하는 6부 중 교통부를 담당하는 교통위원직을 맡았다.
1924년 1월 통상회의가 개최되자 행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통의부 중앙의회가 이전 조직을 개편하면서 행정최고부에 김동삼·김이대·현정경·이종건·김동석·이웅해·오동진·김병조와 함께 행정위원 10인에 선출되었다. 이들에게 행정상의 모든 책임이 있었다. 행정위원들은 각각의 하위 행정 기구를 전담하였는데, 법무위원장 대리직을 맡았다.
통의부의용군 훈련 장면(1922) [판형2] |
5월 초 선전위원회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통의부는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백광운 등이 조직을 이탈하여 임시정부 직속의 참의부를 결성하는 등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중앙간부들은 내분과 이탈로 인한 조직의 분열을 최소화하고자 조직을 재정비하여 5월 말 재정 조목을 새롭게 개정하고 행정위원도 다시 선출하였다. 이때 현정경·김이대·신팔균·김동삼·오동진·이종건·김창환·백남준 등과 함께 행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경 학무위원장직을 수행하였으며, 9월부터 1925년 중반까지는 통의부의 중앙위원장이었던 현정경을 도와 재무부장직을 맡았다.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단의 통합으로 정의부(正義府)가 새롭게 출범된 뒤 이듬해 봄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의부는 중앙조직을 중앙위원제로 결정하고 중앙행정위원 등 간부진을 구성하였다.
같은 해 지린성 화뎬현(樺甸縣)에 민족 교육기관인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설립하고 재무(財務)로 활동하다 후일 교장이 되어 정의부의 중추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의부에서는 관할 지역에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중등교육을 위하여 싱징현(興京縣)에는 화흥중학교, 류허현(柳河縣)에는 남만주학원 등을 설치하였다. 1925년 봄 정의부에서 필요한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2년제 교육기관인 화성의숙을 설립하자 숙장(塾長, 교장)인 최동오와 더불어 간부학교를 운영하였다. 학생은 정의부 독립군 중대의 추천과 관할 현의 우수한 학생들을 지명 선발하여 입학시켰다. 교장으로 근무할 당시 김일성도 화성의숙의 학생으로 수학하였다.
이해 하반기에 이르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둘러싸고 이견이 갈라진 중앙의회가 해산되고 1926년 1월 지방대표들이 모여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조직하였다. 군민대표회는 새로운 중앙의회를 구성할 때까지 대임대표회(代任代表會)를 두어 중앙 행정 사무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이해룡·현익철과 함께 3명의 대임대표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대임대표위원은 행정 당국을 감사하고 당국의 필요한 요구를 승인하였으며 행정위원회를 개최할 수 없을 때는 그 사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2월에는 중앙위원으로서 관뎬현의 정의부 군인을 모집하는 담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의부 중앙의회는 이해 4월 1일부터 정규군 양성을 위하여 청년들을 모집할 위원을 선정하여 만주 각 현에 파견하였다. 관뎬현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청년 모집은 일본과 중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고자 중학생을 모집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10월 24일~11월 19일 지린성 판스현(磐石縣)에서 개최된 정의부 제3차 중앙회의에서 중앙위원 11명에 선출되었다. 중앙위원들은 이제까지의 내분과 대외 분쟁을 일소하고 세력 간의 힘을 합쳐 조직의 세력을 만회하고자 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해 말인 12월 7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선혁명자후원회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28년 5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한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가 개최되자 정의부 대표로서 이청천·이관일 등과 함께 만주 지역 독립군단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9년 3월 1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창당 회의에서 이석·최동오·현익철·유동열·이세·고활신·김이대·현정경 등과 더불어 23명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현재 북한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91년 6월 1일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 창성읍(昌城邑) 평로동(坪路洞)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지회(芝會)이며, 이명으로 강기수(康記守), 필성공(必成功)으로 불리었다.
1919년 4월 1일 평북 창성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천도교 장로였던 강제희는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 신용철·강이달·선우명·문창수·한선학 등과 함께 창성 읍내 서문 밖에서 민중 2,000여 명을 모아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병과 합세한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2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4~5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제 경찰이 주동자를 색출하자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이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때 강제하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넘어간 1919년,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서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1919년 4월 펑톈성(奉天省) 안둥현(安東縣)에서 조재건·함석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다. 조직 간부는 총재 안병찬, 단장 함석은, 서기 장자일, 간사 박영우 등이었고, 주요 구성원은 주로 20대 청년이었다. 대부분 근대적인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평북 지방 출신들이다. 강제하는 단원들을 여러 차례 국내로 밀파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조선인 관공서 관리들의 사직을 권고하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고,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議員團) 내한 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정운 등과 함께 국내에 들어가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경계가 엄중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경 관뎬현(寬甸縣) 장음자(長陰子) 대한독립청년단의 수령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대한독립청년단은 다른 독립군단과 규합하여 군자금 모금 및 무기 구입뿐 아니라 국내 암살대의 규모도 크게 늘려 더욱 활발한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권업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이해 8월 30일 남만주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통군부(統軍府) 대표 등 71명이 참석하여 결성되었다.
일제 측의 대한독립청년단 수령 강제하에 관한 보고(1920.10.29) [판형3] |
통의부의 중앙기구체제는 총장과 그 산하의 10개 부서, 비서과, 사판소를 겸비하여 군정과 민정을 아우르는 군정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해 말에는 12월 29일에서 1923년 1월 8일까지 11일간 개최된 대한통의부 제1회 중앙의회에 참석하여 대한통의부의 조직 개선에 참여하였다.
1923년 통의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갈등이 첨예화하자 그해 5월, 북간도의 이범윤·조성환·현천묵·김규식·김좌진 등 35명, 지린성 윤주영·나중소 등 22명, 서간도의 이천민·오동진 등 78명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연서(聯署)하였다.
12월경 통의부의 기구가 군사 방면에 더욱 주력하는 방식으로 개편되었다. 총장 아래 민사·군사·재무·학무·교통·실업의 6부를 두고, 각 부의 부장 아래 해당 기구를 배치하는 등 편제의 효율성을 기하였다. 강제하는 6부 중 교통부를 담당하는 교통위원직을 맡았다.
1924년 1월 통상회의가 개최되자 행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통의부 중앙의회가 이전 조직을 개편하면서 행정최고부에 김동삼·김이대·현정경·이종건·김동석·이웅해·오동진·김병조와 함께 행정위원 10인에 선출되었다. 이들에게 행정상의 모든 책임이 있었다. 행정위원들은 각각의 하위 행정 기구를 전담하였는데, 법무위원장 대리직을 맡았다.
통의부의용군 훈련 장면(1922) [판형2] |
5월 초 선전위원회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통의부는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백광운 등이 조직을 이탈하여 임시정부 직속의 참의부를 결성하는 등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중앙간부들은 내분과 이탈로 인한 조직의 분열을 최소화하고자 조직을 재정비하여 5월 말 재정 조목을 새롭게 개정하고 행정위원도 다시 선출하였다. 이때 현정경·김이대·신팔균·김동삼·오동진·이종건·김창환·백남준 등과 함께 행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경 학무위원장직을 수행하였으며, 9월부터 1925년 중반까지는 통의부의 중앙위원장이었던 현정경을 도와 재무부장직을 맡았다.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단의 통합으로 정의부(正義府)가 새롭게 출범된 뒤 이듬해 봄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의부는 중앙조직을 중앙위원제로 결정하고 중앙행정위원 등 간부진을 구성하였다.
같은 해 지린성 화뎬현(樺甸縣)에 민족 교육기관인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설립하고 재무(財務)로 활동하다 후일 교장이 되어 정의부의 중추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의부에서는 관할 지역에 초등교육을 의무화하여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웠으며, 중등교육을 위하여 싱징현(興京縣)에는 화흥중학교, 류허현(柳河縣)에는 남만주학원 등을 설치하였다. 1925년 봄 정의부에서 필요한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2년제 교육기관인 화성의숙을 설립하자 숙장(塾長, 교장)인 최동오와 더불어 간부학교를 운영하였다. 학생은 정의부 독립군 중대의 추천과 관할 현의 우수한 학생들을 지명 선발하여 입학시켰다. 교장으로 근무할 당시 김일성도 화성의숙의 학생으로 수학하였다.
이해 하반기에 이르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둘러싸고 이견이 갈라진 중앙의회가 해산되고 1926년 1월 지방대표들이 모여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조직하였다. 군민대표회는 새로운 중앙의회를 구성할 때까지 대임대표회(代任代表會)를 두어 중앙 행정 사무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이해룡·현익철과 함께 3명의 대임대표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대임대표위원은 행정 당국을 감사하고 당국의 필요한 요구를 승인하였으며 행정위원회를 개최할 수 없을 때는 그 사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2월에는 중앙위원으로서 관뎬현의 정의부 군인을 모집하는 담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의부 중앙의회는 이해 4월 1일부터 정규군 양성을 위하여 청년들을 모집할 위원을 선정하여 만주 각 현에 파견하였다. 관뎬현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청년 모집은 일본과 중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고자 중학생을 모집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10월 24일~11월 19일 지린성 판스현(磐石縣)에서 개최된 정의부 제3차 중앙회의에서 중앙위원 11명에 선출되었다. 중앙위원들은 이제까지의 내분과 대외 분쟁을 일소하고 세력 간의 힘을 합쳐 조직의 세력을 만회하고자 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해 말인 12월 7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선혁명자후원회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28년 5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한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가 개최되자 정의부 대표로서 이청천·이관일 등과 함께 만주 지역 독립군단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9년 3월 1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창당 회의에서 이석·최동오·현익철·유동열·이세·고활신·김이대·현정경 등과 더불어 23명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현재 북한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