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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신앙칼럼 스크랩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8)/중동과 아프리카의 주인이 된 함(Ham)의 장남 구스(Cush)
에바다 추천 0 조회 84 14.06.05 15: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8)

중동과 아프리카의 주인이 된 함(Ham)의 장남 구스(Cush)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조덕영박사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창세기 10:6)


구스 후손들의 정착지


구스는 함의 자녀였다. 함은 노아의 두 번째 아들이었다. 함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을 낳았다. 함의 장남 구스의 후손들은 스바(세바, Seba)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십드가였다. 스바는 남서부 아라비아에서 홍해를 건너, 지금의 수단 지역으로 들어가 스바족이 되었다(시 72:10; 사 43:3; 사 45:14).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십드가도 모두 아라비아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하윌라는 셈족 욕단의 아들 하윌라와는 다른 인물이다(창 10:29; 대상 1:23). 삽다는 아라비아 고대 도시 “사바타”의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구스의 이들 네 자녀 가운데 창세기 10장은 라아마의 아들 스바(쉐바, Sheba)와 드단(Dedan)만을 소개하고 있다. 왜 이들만 소개되었는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구스의 후손 가운데, 라아마의 후손들이 창세기에 기록될 만큼 당시 잘 알려진, 주목할 만한 가문이 되었음은 틀림없다고 본다. 아브라함이 소실 그두라를 통해서 낳은 여섯 자녀 가운데 욕산의 아들들 이름을 스바와 드단으로 지은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대상 1:32-33).


요세푸스는 구스가 에디오피아(주: 성경은 에디오피아, 일반 맞춤법은 과거는 이디오피아, 요즘은 에티오피아로 표기, 여기서는 성경의 어법을 따름)인의 조상이라고 전하고 있다. 칠십인 역(Septuagint)은 구스를 아이디오피아(Α?θιοπ?α)로 번역하고 있다. 에디오피아(Ethiopia)는 “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구스인들이 모두 검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구스 후손을 단순히 에디오피아만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구스는 또 다른 한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중동 땅 중심에서 이름을 떨친 유명한 니므롯(Nimrod)이었다. 이들 역사적 이름과 지명들을 살펴볼 때 구스 후손들의 초기 정착지는 고대 앗수르 지역과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포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스의 후손들은 요세푸스가 말하듯 단순히 지금의 에디오피아만이 아닌 이집트 남부인 수단 지역과 에디오피아, 그리고 아라비아 남부와 중동 앗수르 지역에 고루 정착하였으며, 그곳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전역과 아랍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볼 수 있겠다.


구스의 아들 니므롯


구스의 아들 니므롯은 이 세상 최초의 정복자요 용사였다. 그의 영역은 시날 땅 바벨론, 에렉, 악갓, 갈레에서 시작하어 앗수르, 니느웨, 르호봇 일, 갈라, 그리고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세운 큰 성 레센에 까지 이르렀다. 시날은 바벨론을 의미하는 말이며(단 1:2), 에렉(일명 우룩)은 바벨론 동남쪽 40km 떨어진 전설적인 길가메시의 고향이며, 악갓은 수메르 제국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아카드 제국의 지역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갈레는 에렉과 바벨론 사이에 위치한 ‘닙푸르’(Nippur)의 중요한 도시였다. 니느웨는 요나 선지자가 간 바로 앗수르 왕국의 수도로, 우리나라의 유엔 파병군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모술 지역 근방을 말한다. 앗수르 전설에는 “니누스”를 앗수르의 건설자라고 말한다. 니누스는 “니므롯”을 말함이 분명하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앗수르를 ‘니므롯의 땅’이라고 불렀다(미가 5:6).


성경(공동번역)은 니므롯을 여호와께서 알아주시는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기게 할 만큼 고대에 유명한 자였다. 고대 수렵 상황을 모르는 우리들로서는 주님 은혜로(=앞에서, 리프네 아도나이) 용감하고 힘센 사냥꾼이 되었다는 이 말의 본뜻을 구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도움이 될 수 있다. 700년경 나타난 히브리학자들이 해석한 사본인 예루살렘 탈굼(Targum)은 니므롯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사냥과 여호와 앞에서 악함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들에 대한 사냥꾼으로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판단을 떠나 니므롯의 판단을 따르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강한 자 니므롯처럼 사냥과 여호와 앞에서 악함에 있어 강하다’고 했다.”


이 말은 니므롯이 사냥에 능한 자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자로 유명해지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육식이 허락된 당시 사냥이 무조건 악한 행위는 아니었으나, 능란한 사냥 솜씨는 곧 권력 지향의 힘을 누리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니므롯은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가진 죄성 가운데 타인을 억압하고 권세를 누리기 위한 폭력적 권세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홍수 이후 최초 문명의 땅이었던 시날 땅 바벨론(바벨)의 초기 주인은 니므롯이었다. 즉 이곳에 성읍을 건설하고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의 원조는 분명 니므롯이었다. 인류는 여기서 언어의 분산을 경험하고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다.


구스족과 성경


성경은 구스족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구스는 구스 땅 이름과 구스 사람의 이름으로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과 꾸준히 접촉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모세오경 뿐 아니라 역사서(대상, 삼하, 대하, 에)와 경험서(욥, 시), 선지서(암, 나, 습)에 두루 등장하고 특별히 대선지서(사, 렘, 겔, 단)에 많이 등장한다.


구스가 이스라엘 민족과 접촉이 많았다는 증거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하여 아론과 미리암에게 비방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민 12:1). 마하나임 근방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다윗 왕에게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알려주려고 달려간 자도 구스인이었다(삼하 18:21-23). 시드기야 왕 당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기원전 587년경), 이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여기고 바벨론에 항복해야 된다’고 예언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대적자들에 의해 선지자 예레미야가 물 없는 우물 진흙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그를 구한 궁중 내시 에벳 멜렉(Ebed-Melech)은 구스 사람이었다. 그는 시드기야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아 있을 때에, 용감하게 왕에게 나아가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자들은 악하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에게 담대하게 나아가 ‘성 안에 빵이 다 떨어졌으니 우물 속에 그대로 두면 잘못하다가는 선지자가 굶어 죽는다’고 시드기야 왕을 설득, 간청한다. 결국 그는 우물 속에 던져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헝겊과 낡은 옷을 밧줄과 함께 내려 주어 그를 우물 속에서 끌어올린 의리의 사람이 되었다(렘 38:7-13). 예레미야 38장의 내용은 예레미야가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히 자기를 구해 준 이 구스 사람의 의로운 행동에 얼마나 감격하였는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구스족과 이스라엘의 접촉사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솔로몬 왕과 스바 여왕의 역사적 만남이 있다. 고대 아랍 국가였던 스바의 여왕은 직접 솔로몬을 찾아 왔다. 성경은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과 지혜를 어려운 문제로 친히 시험코자 함이었다고 했다(왕상 10: 1-13; 대하 9:1-12). 또한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가 묻는 말에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알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왕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시종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관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스바 여왕은 자신이 자기 나라에서 들은 솔로몬의 행위와 지혜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고 고백한다.


스바 여왕은 본래 솔로몬의 명성을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친히 본즉 자기가 들었던 솔로몬의 명성은 들은 내용의 절반도 못 되니 솔로몬의 지혜와 복은 자신이 들은 소문보다 더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스바 여왕은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이에 그가 금 일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왕에게 드렸으니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드린 것처럼 많은 향품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더라”(왕상 10:1-13)고 기록하고 있다.


오빌에서부터 금을 실어온 히람의 배들이 오빌에서 많은 백단목과 보석을 운반하여 오매, 왕이 백단목으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의 난간을 만들고 또 노래하는 자를 위하여 수금과 비파를 만들었으니 이 같은 백단목은 전에도 온 일이 없었고 오늘까지도 보지 못하였던 것들이었다. 솔로몬 왕은 왕의 규례대로 스바의 여왕에게 물건을 준 것 외에 또 그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주니, 이에 그가 그의 신하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놀라운 사건은 많은 에피소드와 아름다운 전승과 설화를 인류 역사에 남겨 놓았다. 이들 전승은 페르시아 전설과 에디오피아 왕국, 그리고 이슬람 경전 꾸란(코란)에까지 변형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또한 많은 예술 작품 등으로 승화되어 지금까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럼 이 스바 여왕의 나라는 과연 어디였을까? 북부 아바리아에서 시작된 ‘스바’는 기원전 2천년 중엽 아라비아 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옛 스바족들의 고대 왕국 ‘사바’는 지금의 예멘 지경인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 구석에 위치하여 있다. 즉 스바 여왕 당시의 영역은 지금의 아라비아 남부(예멘) 지역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스바 여왕의 영역은 홍해 건너편 에디오피아에까지 이르렀다.


구스(에디오피아)와 대한민국


구스의 일족이 에디오피아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우물 구덩이에 갇힌 예레미야 선지자를 용감하게 구한, 의리 있는 구스 사람 내시처럼 에디오피아는 우리니라에도 고마운 의리의 국가였다. 6.25 한국동란 때 에디오피아는 6,037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을 UN군의 일원으로 파병해 와서, 그들 중 500여명이 부상 당하고 150여명이 전사했다. 당시 한국은 에디오피아보다도 훨씬 가난한 나라였다. 하지만 에디오피아 병사들은 이 불쌍하고 가난한 국가에 기꺼이 참전하여, 그 어느 유엔 파견국가 병사들보다도 용감무쌍하게 무력 침공과 불의에 대항했음이 전사(戰史)에 뚜렷이 남아있다.


이때 에디오피아는 왕정 국가였는데, 후에 에디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그는 1968년 한국 방문 시 영락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한경직 목사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사도행전 8:26-40)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암하릭(에디오피아)어로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스바 여왕의 제225대 후손이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에디오피아 사람들은 시조 메넬릭이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2세라고 굳건히 믿고, 에디오피아 제국 헌법에 이를 사실(史實)로 규정하였다. 그가 다스리던 시기 에디오피아는 자원 부국으로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육박했었으며, 검은 아프리카 유일의 독립국임과 동시에 유일한 기독교 제국이었다.


그러나 냉전 시대 아프리카 지역에 불어 닥친 이데올로기 바람으로 인해 1974년 그만 에디오피아는 공산주의 혁명 속에 3천년 왕조가 무너져 버렸다. 그 뒤 이 나라는 북쪽 에리트레아가 완전히 독립국으로 분열되어 나갔으며 1991년 멜레스 제나위가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하였다. 공산정부는 무너졌으나 공산 통치를 거치면서 무너진 이 나라 경제는, 안타깝게도 2011년 현재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겨우 350달러(약 37만원)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해버렸다. 지난 2011년 우리 대통령이 이 나라를 방문한 동안 수도 아디스아바바 인근 달동네를 찾아가 공용 화장실을 만들고, 마을회관·진료소 및 공동우물 개·보수 작업에 나선 것도, 지금은 너무도 어려워진 이 나라 경제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도움을 주겠다는,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찾아 헌화한 뒤, 참전 용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에디오피아를 절대 잊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애국 시민단체들과 선교단체들이 이 나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 모로 봉사에 나서고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커피로 세계를 평정한 커피 원조의 나라 에디오피아


에디오피아는 커피의 원조 나라로도 유명하다. 3천 년 전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을 만나러 갔던 스바 여왕은 수많은 향신료를 가지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지금의 에디오피아는 고대로부터 향신료와 향품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왕상 10:2; 사 60:6; 렘 6:20; 겔 27:22). 스바 여왕이 지금의 커피라는 이름의 열매를 정식으로 가져갔을 리는 없다. 성경은 다만 향품에 대한 스바 지역 사람들의 오랜 명성을 알려주고 있다. 혹시 커피 유사 향료를 가지고 갔었을 지도 모른다고 즐거운 상상을 할 뿐이다.


에디오피아에서 민간에 전해지던 커피가 드디어 문헌에 얼핏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에디오피아에서 오랫동안 자생하던 커피나무는 늦어도 9세기부터 에디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문헌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671년 레바논의 언어학자 파우스트 나이로니의 저서 <잠들지 않는 수도원>에 나오는 6세기 경의 전설에 따르면, 목동이었던 카르디(Kardi)가 우연히 방목해 기르던 초원의 산양들이 먹고 심하게 흥분하는 열매를 발견했다. 카르디는 이 빨간 열매를 입으로 씹어보았다. 향긋한 냄새가 입에 퍼지면서 온몸의 기분이 상쾌해지고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 그는 이 열매를 마을로 가져왔고, 피곤함을 덜어주는 커피의 효능을 알게 된 마을의 수도승은 수행자들을 돕기 위해 이 열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커피는 일찌감치 수도사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향료요 비약(秘藥)이었다. 에디오피아 유대교, 기독교, 토속 종교 등에서 비밀스럽게 사용되던 커피는 마침내 이슬람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슬람의 전파와 더불어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4세기 초 페르시아 종합의학서인 <의학집성>은 아라비아 의학자 라제스의 말을 빌어 ‘아프리카에 자생하던 분(Bunn=커피)의 생두를 갈아 끓여낸 액체는 위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볶지 않은 생두를 사용하던 커피는 13세기 중반(1250년 경) 볶는 방식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와 그곳 메카를 순례하던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무슬림 순례객들은 서로 간 정보 교환의 장소였다. 커피도 자연스럽게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이집트,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가 기독교 사회와 온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구스족의 미래


오늘날 구스족은 아프리카 서부와 중동 땅의 주인이 되어 있다. 검은 아프리카 땅은 주로 같은 함족인 미스라임과 양분하였고, 중동 땅은 다른 함족의 후손들과 셈족의 일부와 함께 차지하게 되었다. 성경이 구스족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는 그렇지 않다. 앞에서 보았듯 모세의 아내도 구스 여자요 예레미야 선지를 살려낸 의리의 사람도 구스 사람이었다. 오히려 모세의 아내가 구스 사람임을 시비 걸고, 그것을 핑계로 모세를 무시하고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던 아론과 미리암은 하나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은 적이 있으나, 하나님이 구스 출신 아내 문제로 모세를 책망한 적은 없었다.


성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통치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에디오피아 고급 관리가 복음 전도자 빌립을 만나 복음을 믿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행 8:26-39). 빌립은 주님의 지시를 받고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에서, 병거를 타고 이사야서를 크게 읽고 있던 내시를 만났다. 에디오피아 왕실 재무를 담당하고 있던 이 내시는, 빌립을 통해 자기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 53장 7, 8절의 말씀이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그 자리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다(8:35-39). 이것은 이방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성령의 역사를 알리는 극적 사건이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주적이요 보편적이다. 구스족도 당연히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 있는 귀한 민족이다.


최근 기독교 혐오증(Christophobia)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특별히 구스의 땅인 수단의 무슬림 권위주의 정부는, 수십 년 동안 수단 남부의 소수 기독교인들과 정령숭배자(animist)들을 세차게 핍박하였다. 언론은 이 상황을 내전이라 보도했지만, 그 내막은 수단정부가 소수종교인들을 지속적으로 탄압하고 핍박한 것이다. 이러한 핍박의 절정은 2003년에 시작된 다르푸르의 악명 높은 인종살해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이 같은 약탈과 폭력은 기독교인들이 인구의 대다수인 에디오피아에서조차 교회가 소수의 무슬림들에 의해 방화·약탈당하는 테러로 이어지고 있다. 비단 수단이나 에디오피아 뿐 아니라,


기독교 혐오증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심각할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특별히 구스족의 지역은 종교적 충돌이 아주 심한 지역이다. 다수 기독교인들이 사는 남수단과 에디오피아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소수에 불과한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이란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핍박은 우려스러울 정도이다. 구스 족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 같은 핍박을 이겨내고 복음의 선봉을 서는 지혜로운 민족이 되도록 기도하자.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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