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시 학살 당한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세요.
김헌곤 (한국순교유적연구회 대표)
6.25전쟁으로 피해를 1952년 3월 공보처 통계국의 발표에 의하면, 군경(軍警)이 아니고 비전투자로 순수한 민간인으로 학살당한 자가 59,994명 명부가 있다. 이들의 이름, 성별, 나이, 직업, 학살년월일, 학살장소, 본적과 주소가 기록된 정부 자료이다. 또한 납북당한자 82,959명 명단에는 이들의 이름, 성별, 나이, 직업, 납치년월일, 납치장소,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2003년 6월 발행)
학살당한 자들이 무슨 죄인가? 한국전쟁시 필자의 가족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순박한 농부였다. 공산 좌익세력들은 1950년 10월 26일. 마을 사람들을 불러 놓고 필자의 할머니 윤임례 집사를 교회당에서 칼로 목을 치고 화형을 시켰다. 후에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강대상 아래에서 목에 칼이 꽂힌 채 무릎 꿇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시기에 작은아버지 김용채 집사는 총살당했고, 3명의 사촌 형은 우물에 생매장했으며, 나의 친형 성곤은 타살당하는 등 23명이 순교하였다. 박호준 집사와 김용술 고등학생은 항문에 말뚝을 박고 칼질했으며 김정두 성도 가족과 김환두 성도 가족은 죽창과 칼로 죽인 후 불을 놓아 화형 시켰다.
70년 오랜 시간의 덮개로도 지울 수 없는 의문들이다. 순박한 농부들이 죽어야 할 죄명이 무엇이었을까? 예수님 믿는다는 이유 한가지 때문에 학살당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필자의 선친 형제들은 가해자를 찾아가, 그들을 용서하였고 소천할 때까지 가해자 가족을 선대 하였다. 선친의 형제들은 장애인과 갇힌자와 소외자의 친구로 사셨고, 그리고 무소유(無所有)로 살았으며 마지막엔 집도 내놓고 시신까지 기증하였다. 그들은 전쟁피해자의 고통도 크지만 가해자의 고통도 크기 때문에 용서하고 품어야 한다고 말했다.
“6.25사변 피살자 명부”의 저자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는 출판을 통해 전쟁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돌로 쳐 죽이고, 산채로 바다에 수장하고, 불로 태워죽이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참살하고...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김 기자는 죽음의 기록이 증오를 되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의 죽음은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하며, 양민학살의 책임과 크기를 바꾸려는 무리들에게 사실과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시 민간인 최대 피해지역은 호남이었다. 공산당과 지역 좌파에 학살된 남한의 민간인 수는 6만 명에 이른다. 세분하면 전남에서 43,500명이 죽고, 그중에 영광군에서 21,225명에 달한다. 피살자 2만1천 여명중 열 살 이하 어린이가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고, 여성 피살자는 전국여성 피살자의 절반에 가까운 7,914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염산면 1만 5천여 명의 주민 가운데 30%인 5천명이나 학살당했다. ‘집안의 씨를 말렸다’는 가정이 많이 나올 정도로 아비규환(阿鼻叫喚) 지옥이었다. 염산면 월암산 밑에는 남조선 노동당 지하 총책 김삼룡의 고향으로 지역 빨지산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10월 7일부터 3개월 기간에 염산교회 교인들 3분의 2인 77명이 죽임당했는데 몽둥이로 맞아 죽고, 나머지는 4~5kg의 돌을 목에 매달고 물이 들어오기 전에 칠산 앞바다에 들어갔다가 물이 들어올 때 모두 수장되었다. 어린이들을 산채로 가마니에 담아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교인들은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찬송하였고 젖먹이 동생을 업은 언니는 동생에게 “울지 마, 우리는 지금 천국으로 가는 거야.” 다독이기도 했다. 1950년 봄까지 염산교회에서 사역했던 원창권 목사는 10식구가 피난 가다가 10월 19일에 영광 밀재에서 붙잡혀 타살당했는데 아들이 군인이라는 이유였다. 염산교회 김방호 목사 가족 8명은 10월 27일 교회에서 김 목사부터 죽창과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었다.
영광군 백수 동초등학교에 김모라는 교사가 있었다. 6.25가 일어나자 교사는 본색을 나타냈다. 아이들이 동네 어귀 밭에서 놀고 있는데 소위 반동의 아이를 김 교사가 발견하자 어린이를 칼로 찌르고 밭고랑에 처박아놓고 같이 놀던 어린이들에게 돌을 던지라고 외쳤다.
현재 집단학살 피해교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전쟁 때 신안군 임자도에서는 인구 1만3천 명 중 21%인 2천7백여 명이 학살당하고 48명 교인이 순교했다. 임자도를 수복하기 위해 군인들이 들어갈 때 부모와 형제 13명의 가족을 잃은 이인재 집사가 안내자 역할을 한다. 군인들은 공산 좌경세력 10여 명을 체포하고, 즉결 처형하는 현장에서 군 지휘관은 이 집사에게 총을 주며 복수할 기회를 주었다. 이때 이 집사는 ‘예수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용서하는 자가 승리자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지휘관님! 저 살인자들이 공산 사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용서해 줍시다.” 강청 했다. 이인재 집사의 용서는 임자도 전역으로 퍼져 보복이 없는 평화의 섬을 이루었다.
정부는 2003년 10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평화공원 조성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는 지속적인 추적을 통해 2011년 1월 26일 자로 희생자 14,032명, 희생자 유족 31,255명을 선별하였고, 문재인 정부는 보상금을 지불했다.(9천만원~1억3천만원)
필자가 확인한 집단 순교교회는 고창 덕암교회(26명), 정읍 두암교회(23명), 김제 만경교회(15명), 군산 원당교회(14명), 군산 지경교회(9명), 군산 해성교회(7명), 김제 봉남교회(5명), 동상 학동교회(5명), 동상 신월교회(5명), 익산 황등교회(5명), 영광 염산교회(77명), 영광 야월교회(65명), 신안 진리교회(48명), 무안 복길교회(43명), 백수읍교회(36명), 영암 상월교회(35명), 영암읍교회(24명), 영암 구림교회(19명), 영광 묘량교회(9명), 영광 법성교회(7명)이다.
그동안 제주 4.3사건, 여순 10.19사건, 광주 5.18사건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여 보상을 다 받았는데, 한국전쟁 시 적군(敵軍)으로부터 6만여 명의 민간인 피살자 유족들은 70년 동안, 눈앞에서 처참하게 참살당한 현상을 마음에서 지울 수도 없고,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과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 속에서, 벙어리 냉가슴 가진 자처럼 조용히 있었던 것은
첫째, 입밖에 거론하는 차체가 고통이었고 둘째, 가해자가 같은 지역 사람이었고 셋째, 여러 사정 때문에 가해자와 같은 지역에 살아야 했고 넷째, 피해 사실을 이슈(issue)화하면 지역사회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선진국대열에서 세계 여러 지역에 재난을 지원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데, 우리 민족의 70년의 원한(怨恨)을 풀어주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정부는 펙트를 확인한 후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70년의 원한을 풀어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