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볼음도에서 첫배(오전 일곱시) 타고 강화로 돌아왔다.
간밤의 떨림이 아직도 남아 머리 속에서 좋은 생각들이 노랑나비처럼 날아다닌다.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사람들이 만드는 인생의 삼매경!
한번 식사를 대접하면 꼭 자기도 대접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는 분이 있어
대청마루에서 저녁 식사 대접을 받았다.
우리끼리 친해지면 대충 대충 사는게 좋은데 내 주위엔 한번이라도 더 대접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다.
그런 분들은 베푼 것은 잊어버리고 베푸는 그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시길.
내가 뭘 했다는 잔상이 남으면 그것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금강경의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나나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니 주고 받는다는 의식도 없다.
자연만물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 해나 나무나 물을 자세히 보라.
말 그대로 空이다. 자기를 내세움이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흘러들어가 서로를 살린다.
오직 사람만 나를 내세우고 내 것이라고 자기 소유권을 주장한다.
땅에다 금을 긋고 울타리를 치고--이러다간 하늘에도 금을 긋고 자기 것이라 하지 않을까?
햇빛이나 물이나 하늘 같은 모든 좋은 것이 공짜라는 것은 우주의 신비다.
이학기 산마을고 수업 시작.
일학기에도 들었던 세 학생이 또 들어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제빵업을 하겠다는 민서, 시민운동하는 부모처럼 환경운동을 하겠다는 윤주,
고등학교 졸업후 세계일주 여행을 하겠다는 조은이--
오늘은 첫 수업이라 새로운 학생들과 인연에 대한 얘기를 했다.
인생에서 어떤 친구 어떤 스승, 어떤 책을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 후 각자의 소중한 만남을 얘기했다.
산마을고는 좋은 학교다. 여기서는 몇등 하느냐에 신경쓰는 학생이 거의 없고 자유롭게 자기발견과 개발에 힘쓴다. 일학기에 강의를 들은 동엽이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학생인데 자기가 산마을고에서 꼴찌를 하겠다고 결심하더니 정말 실천을 했다고 한다.
동엽아, 장하다. 사랑한다(동엽이는 내가 산마을고 갈 때마다 달려와 나를 끌어안곤 했던 학생이다. 늘 웃는 그의 얼굴 표정은 환상적이다)
열여섯 열일곱, 이 나이의 청년들과 꿈을 얘기하고 인생을 말할 수 있다니 나는 복이 터졌다.
스티브잡스의 영어 연설문을 함께 읽는데 reach라는 단어가 나와 뜻을 물으니 어떤 학생이
부유한(rich)이라고 대답한다. 더 좀 쉽고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쳐야겠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느꼈다.
31일
여름의 마지막 날
비오고 바람 한번 부니 그렇게 찌던 더위도 간 곳이 없다.
아마 인생의 그 어떤 괴로움도 그와 같을 것이다.
나도 살면서 이런저런 괴로운 일을 겪었지만 지나고 보니 다 아름다운 추억일뿐이다.
본래 낙천적이라 남들이 힘들다는 일도 나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산다.
배가 파선되지 않으리라는 확신만 있으면 풍랑이는 바다는 시련이 아니라 인생의 활력이다.
조금 아프기도 하고 뭔가 뜻대로 안되는 일도 있고 경제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가정에 우환이 있어도
그게 다 신이 주는 인생의 별미라고 생각하면 그리 요란 떨 일도 아니다.
죽음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아니 그걸 인생 최대의 신비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든 삶은 살만한 것이다.
(갑자기 도사처럼 얘기하고 나니 좀 부끄럽다. 사실 나는 엄살쟁이라 배만 조금 아파도 사방에 소문 내고 안절부절이다. 그러니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은 새겨들어야 한다)
친구랑 운동하고 구자환님 모시고 식사.
구형처럼 낭만적이고 재미있는 분도 드물다.
만날 때마다 유쾌하다. 오늘은 님이 패티킴의 구월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들려 주었다.
구월이 오는 소리----
구월이 오면!
나는 벌써부터 강화의 가을 들녁 쏘다닐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첫댓글 읽는 내내 뭉클, 가슴이 기별을 보냅니다. 소소한 일상에도 이렇게 깊은 울림이 배어나오는지.....좋은 책 한 권을 마주하고 앉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