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靈) |
우주 만유의 본체, 영원불멸하는 본래 성품. |
기(氣) |
만유의 생생약동하는 기운, 개체를 생동케 하는 힘. |
질(質) |
우주 만물의 바탕. 사물을 이루는 형체. |
태중에 아이는 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이 들어갔느냐 안들아갔느냐는 다릅니다.
대게는 입신을 하고 얼마 후에 바로 영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큰 도인들의 태아는 영이 늦게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게 되면, 기운이 떨어지고 나서 영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영이 떠나고 기운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질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 부처(佛)
대종사님께서 불공하는 법을 내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잘 사려거든 불공 잘 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내가 지혜에 공을 들이면 지혜가 밝아지고, 인연에 불공하면 인연이, 대타적으로 나누면 인과의 이치에 따라 지은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인과의 이치입니다.
전생 뿐 아니라 이생에 지은 바에 따라서도 받게 됩니다.
佛
부처가 무엇이냐?
부처를 삼신불이라고 합니다.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
법신불 일원상. 진리 당체 |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 |
신앙과 수행을 통해 얻은 과보를 받은 몸. |
천만화신불(千萬化身佛) |
변화되어 현실에 다양하게 나타난 부처. |
- 청정법신불 : 유교로 말하면 무극, 태극, 도교에서는 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불교에서는 법신불이라 합니다.
이것은 절대자. 근원. 법의 몸 진리의 몸을 뜻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청정이라는 말은 더럽다의 상대적인 의미의 깨끗함이 아닙니다. 더럽다 깨끗하다를 벗어난 청정을 말합니다.
- 원만보신불 : 신앙과 수행을 통해 얻은 과보를 받은 몸을 말합니다.
- 천만화신불 : 변화할 화. 다양하게 변화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천만, 백억이라고 말합니다.
◎ 법신불과 사은의 관계
법신불(法身佛) |
사은의 본원 |
절대적 세계 |
근원 |
체(體) |
사은(四恩) |
법신불의 현상 |
상대적 세계 |
현실 |
용(用) |
법신불과 사은의 관계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법신불 따로 있고, 보신 화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신불은 보신과 화신을 합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현상이 바로 법신불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원불교 법신불 일원상 신앙이 시작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깊은 분들도 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무소부재 하신다하는 분들은 체와 용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절대자로서 유형의 어떤 실체로써 신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 하늘에 계신분만 절대자로 생각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죄인이라 생각합니다.
불교로 말하면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중생이고 죄인이고, 절대자 주 부처님은 따로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법신이란, 상대적 세계를 포함한 절대적인 것입니다.
=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
= 근본의 뿌리, 근본의 속성
그래서
법신불과 사은을 모두 아는 사람은 몸이 아플 떄 어떻게 하느냐?
진리에 기도도 하고 병원에서 의사한테 치료도 받습니다.
가계를 운영하는 사람도
기도도 하고 , 손님을 하나님(부처님)으로 알고 불공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의 신앙이 가야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됩니다.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화신의 문제입니다!!
법신은 절대적 세계요,
보신 화신은 상대적 세계입니다.
원불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생활 중 하나는,
일부 교도님들은 실지불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보신 화신(대상)에게만 불공 잘하고 법신(진리)에게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불공의 순서는 기도 - 대상에 불공 - 기도입니다.
반드시 진리불공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일부 기독교인들처럼 기도만 해서도 안됩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라는 의두가 있습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 만법이 하나 즉, 법신으로 돌아갔다.
일귀하처(一歸何處) : 그 하나는 다시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하나님 부처님이 있다면, 그 실상은 무엇인가?
그 부처님이요 하나님(하나)의 나타난 바가 보신이고 화신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로 부처님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는데, 저런 죄인 못된 놈이 어떻게 신앙의 대상이고 부처님이고,
법신불의 나타난 모습이란 말인가?
◎ 정화신불 & 편화신불
여기에 대한 대답을 정산종사님께서는 정화신불과 편화신불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정화신불(正化身佛) |
법신이 그대로 나타남. |
성자들 |
여래위 출가위 항마위 |
편화신불(偏化身佛) |
법신이 편착되어 나타남. |
중생 |
보통급 특신급 상전급 |
여기서 중요한 점은
편화신불, 정화신불이 근원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부처입니다.
수행,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정화신불에서 편화신불로, 편화신불에서 얼마든지 정화신불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한 마음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때가 정화신불(부처)이고, 한 마음이 악하면 그 떄가 편화신불(중생)입니다.
정화신불 편화신불은 모두 사람입니다.
이 세상 어떤 진리도 먼저 사람이 깨달은 것이거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 그 절대자는 무엇이냐?
수행을 통해 진리, 절대자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절대자를 깨치고, 절대자를 향해서 신앙을 하고 그 이치를 따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적 관점에서의 신앙과 수행입니다.
나는 일생 내내 범부고 일생 내내 죄인이다. 그러면 우리는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과거에 역사가 잘못된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성자들의 탄생을 보면 대부분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특이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고, 옆구리에서 태어난다고 설명해왔습니다.
만약 특이하게 태어난 사람만 성자라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할거냐?
우리같이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정상이어야지,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성자의 탄생이 그러하다면 이것은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자는 비정상으로 태어나야 합니까?
우리같이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성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까? 이건 아니죠.
제가 원불교 학과 다니다가 정화신불 편화신불 법문을 받들고 통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원불교학과 학생회장이었는데, 같이 학생회 일을 하는 단장 한분이 사교형이었습니다.
통솔력 있고 맘 맞으면 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합니다. 칭찬해 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맘에 안들거나 안좋은 이야기하면 회의 자체를 안나왔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의문이 걸렸다. 대종사님은 처처불상이라고 했는데.
모두가 다 부처님이라고 했는데. 내 눈에는 저 녀석이 도저히 부처님으로 안보이더라. 무슨 부처님이야.
그러면서 의문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이 정산종사님 법문을 받들고
모두가 법신불이 갊아져 있는데,
그 법신불 그대로의 청정한 마음을 잘 쓸 때 그 순간 만큼은에는 정화신불이다.
그런데 이해관계 감정관계가 생기면 편착된 부처가 된다.
는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부처다 하면 다 좋고 다 잘해야만 한다
부처는 고정되어야 하고 안보여야 하고, 착해야만 한다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대종사님 표현대로라면,
웃는 부처님 우는 부처님 성질내는 부처님, 모두가 얼마든지 부처입니다.
◎ 부처 = 참 인간
그래서 부처 불자의 참 뜻은 참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참 마음이라는 뜻도 됩니다. 인간 본연의 성품이 그대로 발현된 사람이 성자입니다.
그래서 먼저 법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하고 싶다. 부처님의 덕을 실천하고 싶다 하면
첫째, 견성이 되어야 합니다. 불공한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절대자를 모신다. 절대자의 가치를 믿고 그와 같이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쳐서 그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배고프면 달이 빵으로 보이고, 사랑에 빠지면 달이 사랑의 모습으로 보이죠.
성질나면 달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달은 가만히 있는데, 내 상태에 따라서 달이 달리 보이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하고 싶다. 잘해야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래야 내가 잘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먼저 깨닫고, 실천해야 됩니다.
법신불(法身佛) |
견성(見性) |
(우주만유의) 본원(本原) |
공(空) |
보신불(報身佛) |
성불(成佛) |
(제불제성의) 심인(心印) |
원(圓) |
화신불(化身佛) |
제중(濟衆) |
(일체중생의) 본성(本性) |
정(正) |
◎ 종교인들의 딜레마 : 자(自)와 타(他)의 문제
법신과 보신 = 수행(自)
화신 = 신앙(他)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인들의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수행과 신앙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함께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신앙 좀 하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고민 해보았을 것입니다.
수경스님이 열심히 환경운동 한 것은? 신앙을 위함이었습니다. 환경을 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함이었죠.
하지만 환경운동을 하던 중 '아 이것도 권력이구나' '내가 내 몸하나 건지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일 해서 무엇할 것인가.'
하면서 자기 수행 문제에서 걸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일반인들은 '종교인들이 개인 수행을 해서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것이 무엇이있느냐?'
'스님들이 수행 하는 목적이 세상 구하려는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남아 소승 수행자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아라한 경지에 갔다고 난리입니다.
하지만 정치는 썩어서, 정치지도자들이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국민들의 생명을 함부로 하고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래도 자기 수행만 하겠다고 그것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自)와 타(他)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정산종사 법문에
자기불공이 먼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순서가 자기가 먼저이고 타가 나중인가?
수행이 먼저라면 신앙은 언제 해야 하는가?
다른 종교인들과의 모임에서도 이것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대종사님 법에 근거해서 내린 결론은
자기불공이 주(主)다. 상대불공이 종(從)이다.
하지만 주와 종을 넘어선 하나가 있다.
여기까지 알아야 한다. 주종이 없는 하나 이면서 주종이어야 한다.
참회문 할때 설명 드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떄 상생의 인연을 두 가지로 설명드렸습니다.
하나는 상대심으로써의 좋은 인연. 안 좋은 인연을 싫어하면서 좋은 인연을 추구하는 상댖거 상생심.
다른 하나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상생을 말하는 것.
이렇듯 자타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 법신을 여의지 않는 보신과 화신
법신을 여의지 않는 보신과 화신.
법신을 여의지 않는 다는 것은
무시선법으로 말하면 진공에 바탕한 묘유입니다.
남한테만 잘하고 자기불공을 못하면 내실이 없어집니다. 스스로 자비행을 통해 만족감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내면 깊숙이 큰 경계가 오면 자기 갈등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늠을 잡아야 한다.
◎ 사은(四恩)
며칠 전에 천주교 신앙공동체에 가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그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현상 세계에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마음에도 있고, 다른 사람 마음에도 있다.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다.
그것을 네 가지로 설명해 주겠다. = 사은
1. 천지(天地) : 우리는 천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부처님입니다.
숨쉬고 물마시고 해 달 풍운우로상설의 은혜 없이는 1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 아니고 무엇입니까.
2. 부모(父母) : 부모 없이는 나가 나올 수 없고, 클 수 없고, 사람답게 자라날 수 없습니다.
나아서 길러주고 가르쳐 주신 육식과 정신의 부모님이 나의 생존의 근원이고 없어서는 살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더러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부모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를 좋게 교육시켜주지 않고, 힘들게 하려면 왜 나를 낳았냐? 합니다. 약자일 수록 원망을 많이 합니다.
가장 먼저 감사생활해야 할 대상이 부모입니다.
가장 현실에 나타난 하나님이요 부처님이 첫째 부모입니다.
원불교 다니면서 부모에게 불효한다. 그 사람은 가장 신앙 생활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3. 동포(同胞) : 사농공상 금수초목. 즉 부처님 하나님이 곧 사농공상이요 금수초목입니다.
그들의 위력 힘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죄복의 권능자, 절대자가 어디있는가. 즉 사농공상입니다.
하루 내내 금수초목 먹고 살죠. 사농공상으로 걸치고 먹고 마시고 삽니다.
4. 법률(法律) : 천지 부모 동포를 서포트 해주는 은혜. 세상의 이치, 성자가 내 놓으신 교법, 국가의 법, 사회 집단의 규범 등.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이것이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무리 개인 수행 잘해도 정치인이 국가의 법을 잘 운영하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기 힘듭니다.
그래서 원불교의 신앙은 법신불에 대한 신앙이고, 사은에 대한 보은신앙입니다. 법신불이 즉 사은입니다.
일원 즉 사은
사은 즉 우주만유
우주만유 즉 천지만물(유형의 세계) 허공법계(무형의 세계)
우리가 불공한다. 하면 부처님에게 공을 들인다는 것인데.
그 부처님은 위의 대상 모두를 말합니다.
◎ 종교와 철학의 차이
부처가 안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종교인과 비 종교인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종교 |
일단 믿는다. |
(믿음에 바탕해) 의문을 건다. |
답을 얻어간다. |
철학 |
믿지 않는다. |
(불신에 바탕해) 의문을 건다. |
내가 깨치고 확인한 만큼만 믿는다. |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부처로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감당키 힘든 상황에 닥쳤을 때, 인과를 수용하기 힘듭니다.
자식이 갑자기 죽고, 잘 나가던 사업이 하루 아침에 망하는 경험을 했을 때. 인과가 한번에 수용 됩니까? 힘듭니다.
이것을 인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는 바탕에서, 왜 그런 것인지를 의문으로 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냥 믿어버리자로 끝나도 안 됩니다.
믿은 다음에 의문과 까닭을 들이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현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 생에 걸친 인과(삼세의 인과)의 문제라는 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 불공 "하는" 법 (실행)
불공은 이치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개념적 불공, 관념적 신앙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불공은 하는 것입니다.
실행의 문제입니다.
"공"은 바친다. 이바지한다. 성자에게 공을 들이면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1. 과거의 불공법
: 모두가 부처님, 하나님 에게만 불공했습니다. 오직 진리불에만 공을 들였죠..
2. 하지만 우주만유는 진리와 하나입니다. 응화신입니다.
3. 그래서 먼저 견성을 통해서 처처불상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4. 그렇다면 어떻게 불공할 것인가?
부처는 곳곳에 다 있다. 그래서 불공은 그일그일에 한다. 이것이 사사불공입니다.
그 동안에는 형식, 장엄, 부분 신앙(불공)이었다.
하나님을 우주만유와 하나인 절대자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분신앙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우주만유와 분리된 어떤 한 인격적 절대자로 생각하고 거기에만 신앙한다면 그것은 부분신앙입니다.
즉 전체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원불교는 진리불공으로 시작하지만, 사실신앙으로 풀어냅니다. 실지불공입니다.
아프면 어떻게 하는가? 대종사께서는 '아프면 병원가라' 하셨습니다.
아프면 그 아픈 자체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위력을 얻는 동시에 + 그 병을 잘 고치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병행해야 하는 것이죠.
대상 대상에게 불공을 해야 합니다..
천지은 : 천지에 받은 은혜는 천지에게 보은해야 합니다.
부모은 : 부모에게 원망하면 안됩니다. . 내가 선택한 것이다. 조석심고만 잘해도 부모를 잘 만납니다.
동포운 : 만나는 대상대상에게 불공을 해야 합니다. 손님을 하나님 부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부처님 대하듯" 이 아니라, 부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체신앙입니다.
◎ "부처님 대하듯"이 아니라 "부처님"으로 대하자.
법신 따로 보신화신 따로 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법신 보신 화신이 하나라고 보는 시각이냐에 따라서,
부처님 대하듯이 시늉만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만 종교의 평화문제가 해결됩니다.
상대적 세계만 바라보고 자기 종교만 최고라고 생각하는 패권의식에 빠지면 종교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법률 : 법률도 마찬가지입니다.
◎ 시일의 문제
수면과 얼음의 예
햇빛을 아무리 내리쬐도 물 속의 얼음은 쉽게 녹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3년간을 기도했는데 효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그만뒀습니다.
그랬더니 정산종사께서는, 그 사람이 업이 두터운 사람이다. 그래서 효과가 당장 안보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진리불공과 실지불공을 동시에 한다면, 업을 경감할 수 있다. 그것이 불공 즉 훈련 불공즉 수행입니다.
마음공부를 통해서 얼마든지 업을 경감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반드시 성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일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서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그 사람의 성질에 따라서 해야 합니다.
◎ People Smart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일을 잘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관계 속에서 싸움을 합니다.
왜 그런 것인가?
- 대상을 부처님 하나님으로 보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 실제 대상과의 관계속에서 어떻게 대상의 특성에 맞게 그 일의 성질에 따라서 사실적으로 불공을 하느냐는 문제도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특성이 다릅니다.
관계형 : 늦고, 인간적, 감성적
지시형 : 일 중심. 이성적. 빠름
사색형 : 늦고, 일 중심.
사교형 : 빠르고 인간적인 사람
모든 특성이 다 쓸모가 있습니다. 모두가 장 단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성만 있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최소한 두 가지 , 혹은 세 가지 특성이 나타나야 합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은 중간에 있는 사람. 원만구족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인과의 이치로 끌어낼 수 있습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한 마음이 반복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이 좋게 보이고, 그것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나는 어디인가
그리고 상대자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
지도자가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서
그 구성원들은 지도자의 성향을 따라줘야 합니다.
물론 지도자도 구성원들의 성향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
지도자로 뽑은 이상 지도자의 성향을 따라 주는 것이 옳습니다.
나와 스타일이 다르다고 십지 말고 따라줘야 그 집단이 성공합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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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연에 이어서 후기까지 이렇게 정성스럽게 올려주시니 그 은혜에 무한히 감사드릴 뿐입니다^^
제가 늦으니 허석교우님이 직접 올리셧군요. 고맙습니다. ^^
고맙다 석석석.............................짝짝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