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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9.9.22일) 말씀 ; 마태 28:: 20, 계 24:1-4
함께 하시는 하나님
"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저는 항상 건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을 타도 누구보다 더 잘 올랐습니다. 다람쥐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 나이가 65이지만 저는 나이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만년 청춘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해 전부터 이상 증세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생전 처음 위산과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1년 이상 약을 먹고, 피부 알레르기 증상으로 역시 1년 가까이 약을 먹고 있습니다. 얼굴 목에는 피지도 올라오고 피부가 거칩니다. 바로 낫지도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몸이 약해지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그러다보면 이런 저런 증상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겸손이 나이 듬을 받아들이고 건강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음식도 잘 먹고 고기도 가끔 먹어주고, 비타민도 섭취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가 보매준 유산균 활성화하는 약도 먹기 시작했고, 지난 월요일에는 임재범 집사님과 영암 돠갑 한의원에 가서 맥도 집어보고 보약도 생전 처음 지었습니다. 그리고 화요일부터 새벽에 승달산 높은 곳까지 올라가며 근력 강화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건강이 약화되면 정신력도 떨어지고 정신력이 떨어지면 영력도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대비를 해야겠다는 취지에서 였습니다. 화요일 산에서 기도하는데 최스데반 선교사님이 카카오스토리 멜이 왔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최근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되셨구나 죄송한 마음도 들면서 지난날들이 떠올랐습니다. 알기로는 오직 교회 생활, 기도 생활 그게 다셨는데 그렇게 기도하시다 천국 가신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삶이셨습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천국에 가셨고, 나는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도대체 기독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혼돈한 세상입니다. 골치 아픈 세상을 떠나 천국 입성하셨으니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말 공의의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고, 부정 부패 온상이던 사람들은 머리를 깍고 난리를 피고,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세상 불의 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세상과 공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조용히 살아야할까요 아니면 끝까지 불의와 싸우며 투쟁을 해야 할까요? 마음 아픈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정확하게 새상 문제의 진실을 모르고 무엇이 불의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잘 모르며 양편으로 나뉘어져서 편가르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잣대로 세상을 보면 절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절대적인 선이 없습니다. 악인들도 선을 주장하고, 선인도 끝까지 파고 파면 죄가 들어납니다. 이런 시대일 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믿음과 지혜가 필요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10살 난 유대인 소년이 규칙을 어긴 벌로 교수대에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죄도 아닌데 너무나 안타ㅓ깝고 억을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 참담한 장면을 보고 있던 한 늙은 유대인의 불평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 그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그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던 엘리위젤(Elie Wiesel,1928) 이라는 한 소년의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대답이 들렸습니다. “어디에? 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이 교수대 위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때의 사건으로 위젤은 충격을 받고 그 기억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바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그 소년 안에서 인간의 죄악을 뒤집어쓰고 죽어가고 계던 것입니다. 이 사건도 바로 관점입니다.
세상에서 고통이 없고 슬픔이 없는 것이 축복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의 다는 아닙니다. 그 보다 더 큰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악하고 죄악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인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축복도 성공도 승리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 리고 이 세상의 문제들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잠시의 고통과 잠시의 슬픔, 잠시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안식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4:1-4을 한번 보겠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이 밧모섬에 갇혀 육신은 고통 중에 있었지만 하늘이 열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정의 영원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좋아도 나빠도 다 지나갑니다. 믿음이 사람들은 지나가는 것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앞으로 임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분별없이 행동을 합니까? 이 땅의 일에 목을 매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건강, 이 땅에서의 성공, 이 땅에서의 축복을 믿음의 승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확고한 답은 이 땅에서의 현실의 회복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곳에만 죽음이 없고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습니다. 곡하는 것도 다시 없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문제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까? 요즘 뉴스를 보면 속이 끓어오르려고 합니다. 불의가 선의 탈을 쓰고 정의 의 사자인 듯 하는 언론과 행위들을 도전히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안 볼려고 합니다. 그럴 때 이 나라를 주관하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바라보면 평정이 다시 찾아집니다. 하늘이 보입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 살아도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 새 땅의 주인만이 아니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기도 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고통당하는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며 함께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무관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긍휼의 하나님’이시라 합니다. 이 의미는 ‘함께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들이 많습니다. 다투고 싸웁니다. 날마다 여러 원인들로 죽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죽고 아픈 사람도 죽습니다. 부자도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가난한 자도 죽으면 구더기가 파먹습니다. 이 땅은 고난의 땅입니다. 저주 받은 땅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것이 건강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게 부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참된 평화이며 승리입니다. 위에 예화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소년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면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질문을 던질 때 똑같은 그곳은 비극이요 고통이요 불신의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불행이란 하나님 이 함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잘 살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부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재벌, 권력자 진자 불행하고 불쌍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시편에 23편에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이 정말 시편의 처음 글처럼 부족함이 없었나요? 정말 푸른 초장에 누운 양떼 같았나요? 실제로는 그는 수많은 원수들의 목전에 있었고, 심지어 아들 압살롬에게 맨발로 쫒기는 상황에 이었습니다. 푸른 초장이아니라 풀 한포기 없는 험한 광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푸른초장에 누인 양떼처럼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아골 골짜기를 지나도 두렵지 않은 것은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4절 ‘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압살롬이 반역을 하고, 그의 원수들이 수없이 다윗을 죽이려하였지만 하나님이 함게 하시는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이겼고 다윗은 마침내 승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창세기 에 보면 에녹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았는지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가난했는지 부자였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과 30년 동안 동행했다고 나옵니다. 그가 무슨 구체적인 일을 했는가보다도 그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우리가 이 땅에서 큰 일 못해도 됩니다. 가난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무능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금봉 어머니처럼 그저 집에서 교회에서 기도만하고, 말씀만 읽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내가 사는 날 동안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다면 성공입니다. 재중 집사님 대 기업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추석 연휴기간 공장에 홀로 남아 일을 해도 주님가 함께 함이 행복입니다. 지홍 집사님 해남 관광호텔에서 카운터 보고 청소도 하지만 오히려 가장 큰 부자입니다. 임재법 집사님 사일마다 푸른 물결 가르고 흑산도 대둔 도에 가서 거주하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도지사입니다. 명남 주정미 집사님 당장 어려운 일 많아도 하나님 함께 하면 그게 평안이고 감사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면서 잘 살면서 주님을 놓치는데 사실은 그것이 불행이요 실패 인생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부자인 것, 건강한 것, 문제없이 평안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간다 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위로와 은혜를 누리게 된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어디계시느냐고 질문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안 계셔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고통 중에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 바로 천국임을 보게 됩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자들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 함께 하시는 은혜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 28:20). 역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론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땅을 고난의 구조라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없습니다. 도처에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습니다. 질병이 있고 우리 알 수 없는 불치병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주 안에 있어도 어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암이 걸려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는다고 했는데 벌떡 일어나서 쌩쌩하게 돌아답니다. 누가 복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순서가 있을 뿐입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 가장 큰 은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한 주간도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과 함께 하는 복된 시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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