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도록 계속 (행 20:7-12)
‘밤이 깊도록 계속’하는 즐거움과 한계
무슨 일이든 ‘밤이 깊도록 계속’하다보면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고, 동시에 피곤함도 느끼게 된다. 성경을 함께 공부한다거나 목장모임에서 믿음의 교제를 하다보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밤이 깊도록 계속’ 되기도 한다. 내가 깨닫고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서로가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서로 믿음의 친구 혹은 동지가 되는 순간인데, 이런 일처럼 즐거운 일이 없다. 한편으로는 육체적인 피곤함이나 시간적인 압박이 작용하기도 한다. 졸리기도 하고, 다음 날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없이 좋은 일이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밤이 깊도록 계속’ 가다가 한계에 부딪치면 소란을 피울 것인가? 잠잠할 것인가?
유두고라는 청년이 ‘밤이 깊도록’ 바울의 강론을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층에서 떨어져 죽었다(9절).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밤이 깊도록 계속 하는 일, 즉 열심을 내어 모이는 일이 도전을 받고 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에는 탈도 많다는 것이 진리인데, 하나님의 일에도 예외없이 부작용이 드러난다. 어떻게 해야할까? 한계를 감수하면서 밤이 깊도록 계속 갈것인가? 아니면 밤이 깊기 전에 중단할 것인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하면서 영적 성장으로 나아가는 분기점이다.
믿음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좋은 은혜를 경험하다가도, 피곤함이나 시간적인 압박 등 부정적인 건수가 작용하면, 현실적이고 감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이런 저런 합당한 한계 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갖가지 '소란을 피우면서‘ 적당히 타협할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 소란을 피우기 보다는, 잠잠해야 한다(10절). 그리고 ’밤이 깊도록 계속‘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추구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게 경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지만, 그럼에도 그 믿음의 자녀들이 현실에 지배되는 하나님의 자녀로 남게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현실적인 한계를 돌파하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큰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용사가 되기를 바라신다.
깊은 밤을 넘어, ‘날이 새도록 계속’하게 되는 능력
아마 유두고는 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수준이 낮기에 강론 시간에 앞자리로 가지 못하고, 애매모호하게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 이런 악재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유두고를 살려내시고, 그 믿음의 공동체가 ‘밤이 깊도록 계속’, 더 나아가 ‘날이 새도록 계속’ 모임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믿음의 즐거움과 힘을 주셨다(12절). 만약 이런 저런 소란 가운데 현실적인 타협을 했다면, 유두고는 죽은채로 끝났을 것이고, 그 믿음의 공동체는 밤이 깊기 전에 모임을 끝내기에 급급해 하는, 형식적인 신앙공동체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갖가지 악재와 장애물을 선으로 바꾸시면서, 더 큰 위로와 힘을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누리려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반응하면 안된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반응과 결단을 해야 한다.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힘을 못 내고 시간을 못 내는 그 지점이 바로 '밤'이다. ‘밤이 깊도록 계속’, 아니 ‘날이 새기까지’ 계속 나아갈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기쁨을 경험할 것인가? 아니면 한계가 있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물 것인가? 그 갈림 길에서, 한계에 제한받지 말기 바란다. 갖가지 한계를 믿음과 능력을 더하는 기회로 삼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길 축복한다.
적용 나눔) 주일연합예배, 삶공부, 목장모임을 계속하다보면, 시간이나 육신적인 피곤함, 내 믿음의 수준 등 여러 한계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거기에 지배되지 않고, 의지적인 결단으로 계속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누렸던 기쁨이나 보람이 있었다면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