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수련 웹진_ 가치 있는 삶은 성심성의껏 사는 것 (월간 마음수련 2008/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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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삶은 성심성의껏 사는 것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선생. 그는 분자점성학, 액체이론, 표면화학 등에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그의 이름을 딴 ‘리-아이링 이론’으로 노벨상 후보까지 오르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탁월한 화학자였습니다. 190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과 관찰력이 뛰어났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뛰어난 능력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교토제국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하지만 그의 평생의 염원은 조국의 발전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교수직을 버리고 귀국을 한 뒤, 이념의 대립으로 다시 미국 유타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지만 끝내 미국의 영주권도 받지 않습니다.
유타대학 시절의 제자인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은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스님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듯이 아주 겸손하게 준비를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일일이 최신 연구를 조사하고, 교재에 인용된 참고문헌을 전부 확인했고, 2~3년 강의하면 다시 최신 교재로 바꾸었습니다.
또 학생들 논문을 검토할 때도 단어 하나, 쉼표 하나까지도 살피는 철저함과 섬세함으로 유명했고 제자들을 아버지처럼 따스하고 자상하게 돌봐주었습니다. 그는 늘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성심성의를 가지고 일하면 잘될 수밖에 없다, 자기가 잘되려고 남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평소 1일 1선(善), 1일 1학(學)의 생활신조로 하루에 한 가지씩 선한 일을 하고 하루에 한 가지씩 꼭 배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73년 귀국 후, 선생의 생활을 곁에서 도왔던 김양호씨는 “제자가 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마치 자식이 잘된 것처럼 기뻐하셨다. 또 타인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면 못 들은 척하시다가, 좋은 얘기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박사님을 오래 모시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의 좋은 면만 보게 되는 것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또한 구멍 난 양말을 기워서 신고 다닐 만큼 검소했습니다. 물건이라고는 책 외엔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집도 재직 중이던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내준 관사였는데, 마지막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이자 삶의 스승이었던 이태규 박사. 국립묘지에 안장된 박사의 묘비엔 그의 어록이 지금도 형형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주어진 생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참 가치 있는 일일까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내가 얻어낸 결론은,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심성의껏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학자다. 그래서 나는 ‘예리한 관찰과 꾸준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게 되었으며 이 구절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 길로 걸어왔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로 걸어가겠다.”
이 글은 <나는 과학자이다>(대한화학회 / 양문)를 참고로 정리했습니다.
이 태 규 (李泰奎, 1902~1992) 선생은 190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뛰어난 능력과 노력으로 교토제국대학의 교수가 되지만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화학회를 창립하는 등 우리나라 과학 발전의 초석을 마련합니다. 이후 미국 유타대학 재직시 헨리 아이링 교수와 공동으로 발표한 ‘리-아이링 이론’으로 노벨상 후보가 되고, 1965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추천위원이 됩니다.
사재를 대한화학회에 기부하여 화학교육상을 신설하고, 한국이론물리화학연구회를 설립한 선생은 1973년 71세에 한국과학기술원의 석좌교수로 영구 귀국합니다. 1992년 작고 후에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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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_ 월간 마음수련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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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ㅎㅎㅎㅎ
성심성의
성심성의2
가치있는 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