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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山, 草書五言律詩, 東京國立博物館藏 (desk@jjan.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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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26)부산(傅山)의 초서오언율시(草書五言律詩)
명말청초에 강직한 성품으로 개성을 드러내 보인 서화가 중에 부산이 있다. 부산(傅山, 1607~1684)은 자가 청주(靑主)이며 호는 주의도인(朱衣道人), 노얼선(老蘖禪) 등이 있으며 양곡(陽谷:山西)인이다. 「청사고」의 전기에 의하면, 여섯 살 때 황정(黃精)을 먹고 곡식을 하지 않다가 건강을 되찾고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강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명나라가 망하자 고염무 등 유민들과 명조 회복운동을 벌이다가 순치(順治) 11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끝가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식인 회유책으로 박학홍사과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이 멸망한 갑신년 이후에는 황관(黃冠)에 붉은 옷을 입고 토굴에서 기거하며 노모를 봉양하였고, 겨울이건 여름이건 삼베 옷 하나만을 걸치고 스스로 '민(民)'이라고 칭하였으며, 죽어서도 황관과 붉은 옷으로 염을 하였다고 한다.그는 서화에 뛰어났는데 서론으로 제기한 사녕사무론(四寧四毋論)이 특히 유명하다. 원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書寧拙毋巧;寧醜毋媚;寧支離毋輕滑;寧眞率毋安排." (글씨는 차라리 고졸할지언정 교하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추할지언정 연미하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지리할지언정 가벼이 미끄러지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진솔할지언정 안배하지 말아야 한다.)그 내용이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이지만 부산이 추구하고 있는 서예적 경계가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부산은 당시 사람들이 앞다투어 조맹부와 동기창의 연미한 글씨를 연마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가졌다. 이렇듯 강력한 부정적 서예관이 제기되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학서 이력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은 20세 때 조맹부의 필적을 얻고 그것을 임서하며 공부하였는데, 조맹부는 송왕실 출신이면서 원나라에 출사한 사람으로 '心術壞而手隨之'(심술이 삐뚤어졌는데 손이 그것을 따라갔다)라고 혹평하였다. 서품이 곧 인품이라고 믿었던 그에게 조맹부는 더 이상 학습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당대의 충신 안진경의 글씨를 배우고 위진 및 당송원의 제가들의 서체를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각 체에 능하였지만 특장을 보인 것은 소해(小楷)와 초서이다. 그 중에서도 연면초(連綿草)는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즉흥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흔히 행초서를 무법유체(無法有體)라고 일컫는데 명말청초에 이러한 연면초와 광초가 유행한 것은 그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왕탁의 자유분방한 행초서와 부산의 행초서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일면 상통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왕탁이 말못할 복잡다단한 심정을 울굴한 글씨로 표현했다면, 부산은 시대에 동화되는 명조의 문화현상을 분개하며 사녕사무론을 외치며 굽힘 없는 활달한 기개를 연면초로 펼쳐 보였다. 그가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자칭하며 작품에 '大笑下士'라고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거리낌없는 기개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시대 말기적 상황에서 절개를 강조하며 사람됨을 중시했던 명언 "作字先作人, 人奇字自古."는 그의 서품을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글씨보다 사람을 우선시할 때 비로소 글씨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승화되어 마치 격조 있는 사람을 대하듯 서품을 대한다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 바로 부산이다. 뒤엉킨 듯 보이지만 맑게 이어지는 연면초에서 명말 유민의 불굴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