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시집 - 『침묵의 결』(문학과지성사, 2014)
시,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세상과 자연 사이에서 기웃거리며
인간과 신 사이를 끌어당기다
시력 40년, 열번째 인연, 열두번째 시집
올해로 시력(詩歷) 40년을 맞이한 시인 이태수의 열두번째 시집 『침묵의 결』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표류하는 자아와 방황하는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던 첫 시집 『그림자의 그늘』(1979)에서 ‘침묵’으로써 언어조차 초월한 본질에 다가가려 애쓴 『침묵의 푸른 이랑』(2012) 이후 지금까지 이태수의 시세계 전반을 아우르며 한 시기를 차분히 갈무리하고 있다. 67편의 시들에서 신(神)과 자연 앞에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어 세속을 뛰어넘는 시인 특유의 ‘넓고 다채로운 침묵의 의미역’(김상환)은 더욱 확장된 듯 보인다. 동시에 “새로운 길이 보일 때까지 참고 기다리든지, 아예 침묵 속으로 들어가든지”(시인의 말), 부단히 고민하며 변화를 모색하려는 의도적 방황 역시 드러나 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이 시집의 해설을 쓰며 계간 『문학과지성』 편집동인 시절 청년 시인 이태수에게 첫 청탁 편지를 손수 써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후로 수십 년, 문학과지성사와의 열번째 인연인 『침묵의 결』은, 시력 40년이라는 특별한 기점을 맞이하여 한 시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을 도모하려는 시인에게는 물론 그의 행보를 지켜봐온 모든 독자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 오는 9월 22일(19시 30분), 대구 수성아트피아 무학홀에서 등단 40년 및 제12시집 출판 기념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문의: 대구수성문화원053-794-1334.
시력 40년의 중진시인 이태수는 『침묵의 결』에서 신과 자연, 자연이 함축하는 언어,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언어 등 이 세계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불러놓는다. 시인의 소망은 ‘신성한 말’이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지 못하고 침묵만이 그 말을 감싸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태수에게 침묵은 말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말을 껴안고 있는 언어다. 그 언어는 성스러운 기도와 같다. 인간의 언어로 조직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성을 환기시키는 이태수의 시는 자연, 신성, 침묵이라는 명제 둘레를 맴돈다._김주연(문학평론가)
말을 놓아버린 시인, 침묵의 벽 앞에 서다
내 말은 온 길로 되돌아간다
신성한 말은 한결같이
먼 데서 희미하게 빛을 뿌린다
나는 그 말들을 더듬어
오늘도 안간힘으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보아도
그 언저리까지도 이르지 못할 뿐
오로지 침묵이 그 말들을
깊이깊이 감싸 안고 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가 닿고 싶은 곳은
그 말들이 눈 뜨는 그 한가운데,
그런 말들과 함께 눈 떠보는 게
한결같은 꿈이다
내 시는 되돌아간 데서 다시
되돌아오는 말을 향한 꿈꾸기다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초월에의 꿈꾸기다
—「시법(詩法)—서시」 전문
이태수는 늘 ‘신성한 말’을 찾기를 갈망해왔다. 그럼에도 인간의 언어로는 신성한 말에 가 닿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인식해왔다. 안간힘을 쓰며 애써도 어딘가 숨겨진 길이 있는 것처럼, 손에 쥐지 못한 말, 잃어버린 말들은 닿을 듯 말 듯하다 제 길로 곧 돌아가고야 말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조심스레 입을 떼는 시인의 말이 단지 겸양이 아닌 것은, 번번이 손끝을 비껴 흘러나가던 ‘신성’이 언제까지나 그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좌절은 “닫힌 문 앞에서 말을 잃게” 한다. 그 문은 “두드릴수록 목이 마르다.” 신성한 말은 “침묵의 벽 속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다.” 그러나 신성한 말과 사람의 말 사이, 경계이자 접점인 벽 앞에서 이태수는 좌절하지도 개탄하지도 않는다. 영영 둘레를 맴돌지라도, 가장 근접한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유리창 너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침묵의 벽」). 자연의 언어 속에 신의 언어가 깃든다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발견이다.
새들은 마치 이 신성한 광경을
나직한 소리로 예찬이라도 하듯이
벚나무 사이를 날며 노래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내 온 길로 하나같이
다시 되돌아가버리고 말
저 침묵의 눈부신 보푸라기들
―「벚꽃」 부분
침묵을 잉태한 자연, 진정한 말이 눈뜨는 세계
이태수의 시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자연은 소리로 그 존재를 증명한다. 들리지 않는 리듬에 맞추어 온갖 생명이 움튼다. 이태수는 꽃, 나무, 눈, 햇살 같은 일상 속 소박한 자연에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는 “정적(靜寂)을 밀며” “이른 봄, 성급하게 부푼/개나리나 산수유 꽃망울들”의 “자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들이 들린다. “안으로만 소리지르듯/하늘로 팔을 뻗”는 꽃잎들 곁을 맴돌고 “정적에 갈무리한 잎들을 일제히 밀어 올”리는 “벌거벗은 나무들”에게도 조심스레 다가간다(「봄, 봄」「봄맞이」「새봄은 어김없이」). “깊은 밤, 이름 모를 새들이/창 너머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야상곡夜想曲」)귀고, “갑자기 나타난 까치 한 쌍”은 “정적을 난타한다”(「새벽길」). “멧새들이 가세해 고요를 흔든다”(「연잎의 물방울」). 귀에 들리든 들리지 않든, 자연이 내는 소리는 인간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다. 아침 햇살이 “모데라토로 내리”고, 한밤 새들의 노래가 한나절 인간이 제조한 도시의 소음을, 그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며 신성한 침묵과의 운율을 빚어내는 것에 세심히 귀 기울이면서 이태수는 자연의 언어의 근원에 접근한다. “소리 없이 동이 트고, 아침이 온다”(「빈손」).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에 사람의 말은 필요치 않다. 이태수에게 침묵은 “말의 맞은편”에 있는 게 아니라 “말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말과 침묵 사이에 시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신, 혹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시가 있다는 의미”(김주연)일 테니 말이다.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랫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눈[雪] 전문
뒤표지 글(시인의 글)
침묵은 말이 그치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침묵은 말이 그치기 때문에 시작되는 건 아니다. 그때야 비로소 분명해지므로 오늘날 은폐돼 있는 침묵의 세계는 말을 위해서라도 다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진정한 말이 눈뜨는 미지의 세계를 품고 있는 침묵은 그 속에 끌어안고 있는 사물들에 신성한 힘을 부여하며, 그 존재성이 침묵 속에서 강화되게 마련이다. 침묵은 늘 제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말은 침묵 없이 홀로 있을 수 없고, 그 배경 없이 깊이를 가질 수도 없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침묵은 언제나 절대적인 말을 잉태한다. 시 쓰기란 그 절대적인 말, 신성한 말을 찾아 나서는 일이며, 침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런 말들을 끌어안고 나오는 몸짓이 아닐는지……
시인의 말
열두번째 시집을 묶는다.
등단 40년― 되돌아보면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로운 길이 보일 때까지 참고 기다리든지,
아예 침묵 속으로 들어가든지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난 2013년 한 해,
가을까지 쓴 작품들을 정리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달라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방황해왔다.
이젠 또 다른 새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2014년 가을
이태수
목차
I
시법(詩法)
눈[雪]
침묵의 벽
벚꽃
오래된 귀목나무
꿈
어떤 거처
아침 꿈길
서녘 하늘
신성한 숲
아기와 노인
말 없는 말들
겸구(箝口)
소음교향곡
별밤
갈 수 없는 길
침묵 저 너머
II
멧새 한 마리
새봄은 어김없이
봄맞이
봄, 봄
봄날 한때
계수나무
산딸나무
빈손
야상곡(夜想曲)
정적(靜寂)
알레그로
나는 왜 예까지 와서
바닷가 한때
새벽길
가을 달밤
한겨울 밤
III
쨍한 푸른빛
연잎의 물방울
아침 숲길
삼복염천
하강과 상승
분수(噴水)
미망(迷妄)
은목서(銀木犀)에 홀리다
한발(旱魃) 1
한발(旱魃) 2
한발(旱魃) 3
신발
그의 깃발
느릿느릿
어떤 연민
IV
강 건너 불빛
안개길
오래된 골목길
까마득한 기억이
다시 술타령
아우 가족
너 보고 싶어
입암리 처가 고택
무늬 화백(華白)
가을 아침에
오십소백(五十笑百)
어떤 연인들
설중매(雪中梅)
우리 풀리비에
어느 새벽
참꽃 천지
후주곡(後奏曲)
평화를 위하여
자연은 언제나
해설 | 예술과 자연, 하나 되다・김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