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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I. 하느님의 계획
2. 인간은 왜 이런 선택을 하는가? (2)
다음은 오래 전에 어느 젊은이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중 2-3학년 때 모두에게 독립하고 싶어서 이젠 하느님 말씀도, 마귀도 부모말씀도 다 안 듣고 나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것만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랬는데 그 결과는 1년이 채 못 되어 분명해졌다. 그 중 하느님이 가장 점잖고 예의있게 그 말에 그냥 곁에서 바라만 보셨고 부모님은 얘가 갑자기 말을 왜 안 듣는지 설득하고 꾸중하고 …그래도 한계가 있는 부모님과는 겨룰만 했는데 마귀는 염치 코치 예의도 없이 매 순간 다가와 싫어하는 생각 등을 집어넣으며 하라고 강요하니 죽을 지경이 되었다.
성가셔서 따라서 하자니 자기 자존심이 무너질 것 같아 못하고, 그걸 버티자니 지겹고 힘이 없어 나중엔 "하느님! 항복합니다. 전에 한말 취소합니다. 혼자 살려고 독립하려 했는데 악마 꼴 보기 싫어 되돌아갑니다." 하고 돌아갔더니 유혹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멀리서 느껴지고 숨이 트이더라는 것이었다.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이나 하느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나 같은 내용인데 그 뜻의 의미와 결과를 모르면서 모든 인간이 이 '독립'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혼자서 더구나 사고가 자라지도 않은 청소년기에 혼자 독립하면 굶주린 개들의 “밥" 밖에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데 자기가 한 말의 효과를 모르는 것이다.
왜 인간의 눈엔 -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얼마나 두려운 현실인지를 못보고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독립한다는 것이 멋있어 보이고 탐스럽게까지 보일까?
이것이 악의 위장술이고 홀림인데 모두가 여기에 속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지옥 문이 보이는데도 따라간다. 그때서라도 재빨리 도망쳐 와야 하는데 구약에서처럼 "다 버린 몸 말리지 마셔요" 하는 태도로 완고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가려는 것이 악의 속성이다.
악의 속성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자유의지는 어디로 간 곳이 없고, 마비가 되었든지 거미의 독침에 의식을 잃듯이 홀려 따라가면서도 본인은 잘 깨닫지 못하는데 여기에 회개의 어려움이 있다. 그것을 깨달으면 회개는 쉬워진다. 문제는 전혀 의식치 못하거나 죄의식조차 없이 “이것쯤 어때?" "그러면 좀 어때?" 하고 정당화, 합리화시키면서 당연시하기에 회개의 영역에서 제외되고 만다. 이런 것이 수두룩하기에 정작 회개라는 말이 나오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있지만 그래도 남보다 잘 하고 있고 이것도 이쯤이면 준수하고, 저것도 저쯤이면 뭐 남들도 다 그런데 나라고 못할게 뭐 있나? 하면서 회개할 진짜 내용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 나가고 고작 건져지는 것은 약속 시간 늦게 가는 것, 말할 때 크게 하는 것, 예의 없이 크게 웃는 것 등등 피상적인을 성찰하고 고친다 하고 그치는 것이다.
내 삶 안에서 내가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나 자신이 쏠리는 경향, 탐내고 있는 것은 성찰의 대상에 오르지도 않는다. 자신이 탐내는 것을 빼면 삶의 의미가 없고 이미 자신이 아니고 죽은 시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빼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게 느껴진다. 자아가 그렇게도 자기 주도권을 쥐려는 경향이 센지는 안해 보려고 한번 시도해 보면 수 있다. 악마도 얼마나 끈질기게 방해하는지 모른다. 자기 발판(영역)을 잃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악이고 죄이다. 뱀은 마치 하느님이 인간의 경쟁자인 것처럼 그래서 은근히 하느님을 밀어내도록 유도한다.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얼마나 말을 왜곡시키고 있는가?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질투해서 미리 못 먹게 못 박아 놓은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말을 믿는데 문제가 있다.
하와는 결국에 하느님 말씀보다 뱀(마귀)의 말을 더 믿고 신뢰하여 그 말대로 따라한다. 냉정하게 보면 어찌 그렇 수가 있는가? 하는데 "하느님처럼 된다."는 말에 현혹되어서(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워서) 이런 저런 분별이나 갈등할 사이 없이 스르르 미끄러져가듯 그 독주사 같은 뱀의 말의 힘이 마음에 퍼지면서 더 강하게 그것을 원했을 것이고 이젠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뿐이기에 이미 그 마음에 어떤 것이 가득 차면 다른 것은 들어갈 여지가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밖에서 불량식품을 주섬주섬 먹고 오면 아무리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뱀의 말에 현혹되어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지자마자 정말 하느님은 안중에 없어지고 악마가 불어넣은 하느님처럼 된다는, 즉 내가 만든 그 하느님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거짓자아(허상)이고 이 거짓자아가 크고 강할수록 하느님이 안보이게 되고 나는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온갖 노력, 온갖 정성, 잦은 밤샘, 고행, 극기는 모두 "내가”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하는 것이 되어 그 노력만큼 멀어져 가게 된다.
내가 내 방법, 내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이것이 참된 회개인데) 이를 깨닫기도 쉽지 않고 안다고 해도 쉽지는 않다.
왜 우리 모두가 열심하고 거룩하고 헌신적인 것 같은데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에 오면 정말 토씨 하나, 쉼표 하나같은 작은말이나, 사소한 의견차이 때문에 갈라지고 원수가 되고 마는가? “내가 하느님처럼 되어야 하는데......" "네가 하느님처럼 행세하거나 되려고" 하는 기색이 보이자마자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즉 내가 주도권 잡으려 그 많은 희생을 했는데 네가 주도권 잡으려 하는 것을 볼 때 쌍심지가 돋는다. 신혼부부도 결혼 첫 날부터 주도권을 서로 잡으려고 팽팽히 줄다리기 싸움을 한다. 친구들끼리 서로 주는 권고도 무슨 일이 있어도 첫날 밤 안에 주도권을 못 잡으면 영원히 못 잡으니까 그런 줄 알라고 권고 하는 것을 듣는다.
내 계획, 내 생각, 내 주장, 내 옳음대로 나와 배우자와 자녀와, 나와 관련된 단체들을 이끌려고 하는데서 모든 갈등, 불화, 스트레스, 번민이 있다.
악마란 놈은 이렇게 하도록 우기고 자기 뜻대로 하도록 계속 사주한다. 자아가(ego) 모두들 강하기 때문에 자아의 크기와 세기만큼 어둠이 짙고 무거워진다는 이야기다. 모두가 열심히 활동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데도 얼굴이 환하고 기쁨의 빛이 있는 사람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것은 이때문이 아닐까?
모두가 내 스스로가 하느님이 되려는 자아(ego)가 일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위한다"는 포장 한 장만 벗기면 그 속에는 "내가 하느님이다" "내가 앞장서야 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가 금방 나온다. 조금만 그 공적과 업적을 낮추어 보거나 흠집을 내면 그 거룩한 가면이 떨어지고 마음속으로는 마귀의 종이었다는 본 모습인, 분노, 질투, 교만, 독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 성격이 나쁘다고 변명한다. 이건 어느 누구 하나를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 모두가 이렇게 속고 살고 있다는 얘기이다.
화내고 독설을 퍼붓는 것은 자신의 나쁜 성격의 일면이라고 생각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사람 얘기는 이렇다.
자기가 자신을 알 수 없다 했다. 어떤 때는 정말 크게 상처받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또 느껴도 그냥 지나가는데 또 어떤 때는 자기가 봐도 정말 작은 것인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어느 때는 운 좋게 잘 참고 지나가 다행이다 싶은 때도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그 화가 폭발되어 자신의 눈에도 이해가 안 간다.
자신을 화나도록 건드린 그 주제도 같은 내용이어서 저번 때는 별 느낌 없이 지나갔는데 왜 이번엔 똑같은 말인데도 화를 냈을까?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곤 화를 냈을 땐 그 집찝함이 오래가서 그것이 싫어서 되도록 화를 안내고 지내려고 노력했단다. 그런 어느 날 정말 다툴 일이 생겼다. 자기 생각에 이건 양보할 일이 아니라 양심의 문제라 여겨 어떻게 해서든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상대가 큰소리치며 위협을 했다. 여기에 지지 않으려고 좀 더 큰 소리를 낸다 했는데 자기 생각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나와 상대를 눌렀다. 이긴 기쁨보다는 마음이 갑갑하고 참 이상했다. 내가 아닌 어떤 힘이 작용한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음이 찝찝했다. 이게 뭘까?
훨씬 나중에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악의 힘을 빌려 썼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화날 때마다 악에게 자신을 내주고 있었음을, 악이 자신 안에서 일하도록 허용했음을 깨달았다.
그때 그 상황에서는 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기게 해줄 것 같은 것은 일단 다 받아들이고 이용한 것이다. 지려고 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는 것이 거짓자아를 키운다는 것을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그때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이해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주고, 빼앗는 사람에게 돌려받으려 하지 말고, 5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벗어 주고... 우린 예수님 말씀대로 할 때만 지거나 손해 보려 하지 않는 자아(ego)의 무서운 힘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무담보 무이자로 급하게 힘을 찾는 사람에게 자기 힘을 빌려준다. 그리고 영원히 그 사람을 자기 종으로 부리려 한다. 한번 그 힘을 빌려 쓴 사람은 자꾸 더 빌려 쓰게 되고 더욱 속박이 되어 그 손에서 꼼짝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보하고 용서하고 빼앗는 사람에게 주라 하셨다. 내 것이니까 안 뺏기려고 힘을 쓰고, 상대가 힘이 세면 나도 그보다 힘세려고 용을 쓸 때 슬그머니 악의 힘이 그를 도와서 이기게 해준다. 그러면 이기고서도 찝찝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착한 줄 알았는데 악하다는 걸 처음으로 체험한다.
예수님을 부르려 해도 예수님은 보나마나 양보하고 내주라 하심을 알고 있으니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거슬러 이기려 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 이번 한번만 내 뜻대로 이기게 해주세요! 그래 보지만 힘이 없다.
악마는 누구를 좋아하는가? 거짓자아가 많은 사람. 거짓자아가 크고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전에 말한 대로 거짓자아는 자기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이 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 안에서 악마는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 보인다. 이미 하느님이 되어 보이는 게 없으니, 거칠 것 없이 말하게 하고 휘두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모두가 피하는 것은 그가 악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언제 독가스를 뽑을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도망가는 것이다. 악마는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자기 영역을 넓힌 곳에서 자기 소유로 한 그 사람을 단체나 사회에서 소외되게 만들어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게 만든다.
본인 자신은 자기가 모두를 쏘아붙이고 털어 내고선 그것을 의식 못하고 거꾸로 사람들이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구체적으로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악을 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한 행동을 밝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 고립시키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게 하는 힘이 자신 안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그저 막연히 느끼는 것이다.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인 말로 톡 쏘거나 냉소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봐야 고쳐지는데 거기까진 못 미치기에 그래서 성찰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아 악마란 놈은 어둠의 연막탄을 쳐놓고 여유있게 공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아이이거나 젊은이이면 지적해 주고 교정해 주기가 좀 쉽지만 나이든 어른일 때는 어디서 어떻게 말해 줘야 서로 민망하지 않고 이 현실을 보게 해 주게 할까? 하고 고심을 하게 된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원조가 따먹은 선악과의 열매는 경험의 열매로 성과 관련된 죄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는데 읽은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자손의 번성은 당신께서 직접하시겠다고 하셨다. 그 생명의 기원과 생성은 하느님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뱀이 다가와 하와에게 속삭인 것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온갖 생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라 하셨는데, 모든 동물들을 보라! 하느님처럼 자손을 번성하고 낳는데 너희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도 동물들처럼 하게 되면 자손이 번성하여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모든 미물조차도 자손을 번성하는데 너희만 그럴 수 없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너희가 그렇게(동물처럼 교미)하는 날 하느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하와에게 동물들이 교미하는 것을 관능의 눈을 열어 주어 보게 하자 하와의 눈에 그게 그럴싸하고 먹음직스럽고 소담스럽고 탐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뱀의 독이 한번 들어가자 하와는 그 길로 내달려 아담과 함께 경험의 열매를 먹은 것이다.
그 뒤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고(창 3,6-7)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원조의 범죄가 성에 관한 죄란 가설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다. 또한 인류 시작부터 악마는 온 인류를 성과 관련된 범 죄로 이끌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예 벽도 둑도 없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과 관련된 범죄가 만연하게 퍼져 있음을 보아도 이 가설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오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이혼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것을 보속하고 있다. 낙태, 미혼모, 불륜으로 가정이 깨지고 철들기 전부터 성추행 당한 아이들이 얼마나한 정신적인 고통과 마음앓이를 하고 있는지를 보면 인간이 선택한 자유의지의 보속을 온 인류가 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낙태된 아기들, 꽃동네나 기관시설에 버려진 아기들… 이런 현실이 우리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이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려 했던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더 고상하고 품위있는 방법으로 자손을 증식시키기를 원하셨는데 하와는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지금의 동물이 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스스로 하느님 노릇하려는 여기에 인간의 모든 비참과 악이 다 들어있다.
이 주제(낙태)에 대해 고민하던 사람이 있었다. 7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그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친구들의 낙태 이야기를 듣고 쇼크를 받았다. 그 문제가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친한 친구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친구의 입장도 이해하고 젊은 사람들의 열정도 이해하지만 그 낙태된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자신이 낙태되지 않은 아이에 속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해도 인간이 이렇게 태어난다는 것이 회의감이 들었다. 나중에 낙태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물론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물을 모두 씻어주시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왜 하느님은 이다지도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이런 식으로 전달하라고 맡기셨을까? 의문이 갔다. 왜 이런 방식으로 새로 태어날 아이들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불안정한 방법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부모의 불리한 입장이 되면 언제든지 이슬처럼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 되도록 하셨을까?
철없는 엄마가 아기부터 가져놓고 이 사람하고 결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것을 다 지켜보며 크는 아기는 얼마나 불안할까? 또 결혼했다 쳐도 이 사람과 계속 살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상황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가슴 졸이며 성장하는 아이들의 고통은 얼마나 클지. 하느님은 모르시고 이런 식으로 생명을 태어나게 하셨다면 분명 하느님이실 수가 없으실 텐데?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 하와와 아담이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이런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을 읽고선 "그러면 그렇지!" 이것이 원죄이기에 인류 전체가 같은 죄의 영향을 받고 더 가중되어 상처가 깊어지고 있음을 알아듣고 원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한다.
결국은 아담과 하와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원조가 되는 상황에 있었다 해도, 아담과 하와처럼 똑같이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자기 식의 하느님이 되려 시도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훨씬, 스스로 하느님 노릇 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아예 하느님을 배제한 문화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하느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이 되기 위해 도달한 것이 우리가 보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일본 후쿠시마의 원자로 유출로 온 지구가 오염될 위기에 놓여 있고 또 나라마다 전쟁의 위협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각자가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모두를 정복하는 절대자가 되고 싶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다. 이 논리가 루치펠의 논리였다.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고 정복해서 이기는 논리였다.
하느님은 거꾸로 더 가지고 더 힘있는 사람들이 종으로써 섬기라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사시다 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인간의 눈엔 예수님의 길보다 마귀가 제시하는 길이 더 탐스럽게 보여 더 큰 힘을 가지게 해 줄 것 같은 환상에 더욱 끌려 들어가고 있다. 이만큼 고생하고 속았으면 돌아설 법도 하련마는!……
다 쑥대밭이 된 뒤에 돌아서려는지?
지금 돌아설 것인지, 싹 망한 뒤에 돌아올 건지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다음에 계속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기쁜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