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1592년에 시작된 조선사의 '임진왜란(전쟁)' 을 말하는 것이다.이전쟁을 현대 일본사
에서는 '文祿ㅡ慶長의 役' 이라 하고,명사에서는 '萬曆의 役' 으로 기록한다.이런 기사들을 보면 전쟁의 피해와
수모는 역사의 조선이 담당하고,전쟁 마무리를 위한 화의와 절충은 모두 明과 倭가 한것이 된다.他 세력들이
나라를 침략해 싸웠는데 이것을 침략에 대항해 싸운 전쟁이 아닌 '倭亂' 으로 뭉게는 것도 이상하지만,이 전쟁
을 일본사와 중국사는 동시에 '아랫것(하위급 나라나 집단)들이 일으킨 소요를 진압하고 평정했던 힘들 었던
일 이란 뜻의 役' 이란 표현을 쓴다는 어색함이다.또 이전쟁의 시작도 아리송하지만,조선에서의 전쟁이자 倭亂
의 마무리를 왜? 지금의 절강성 嘉興 출신인 沈惟敬이 그가 살던 절강성지역에서 중재와 화의로 明과 倭 사이
의 임진전쟁을 마무리 한다는 말인가?기존의 해설대로 반도에서 일어난 임진왜란 이라면 明의 심유경은 倭
와 화의를 했었어도 반도에서 왜군들과 화의를 했어야 할것이다.그런데 심유경은 지금의 절강성의 항주만 북
부 지역에 있는 '嘉興' 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왜장과 전쟁의 마무리 화의를 했다고 명사는 전한다.
여기서도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처럼 당사자인 역사의 조선은 배제된다는 사실이다.물론 지금의 반도
와 열도사이에서 벌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도 아닌것은 확실하다.즉 역사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은 맞지만
반도와 열도 사이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이란 역사적 사건은 없었다고 '조선사,왜사,명사는 물론 모든 정사서들'
이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있다면 대륙의 '華東과 華南의 동부지방' 에 있던 倭와 조선의 얘기라면 그나마 설득
력은 있다.역사학이 해석학이고 해석 여부에 따라 달라지며,해석권력을 가진 승자나 다수자들의 관점이 작용
하는 것은 사실이다.또한 패자나 소수자들의 의견은 묵살되는 것도 분명하다.
2,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지 꼭 100년이 되는 그 시점에,정사서에 의한다면 선조 24년(1591) 역
사 조선에서는 倭지역의 동정(동향)을 살피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했다고 한다.기록에 의하면 西人의
黃允吉을 正使로,東人의 金誠一을 副使로,서장관에는 동인의 許筬이 임명되어 왜로 파견되었다고 한다.이후
倭지역을 다녀온후 서인의 황윤길은 왜의 수장인 '豊臣秀吉 은 눈이 반짝거리고 지략이 있는 인물인 듯하다'
고 했다.반면에 같이 풍신수길을 면접하고 온 김성일은 '눈이 꼭 쥐눈과 같다' 며 그의 인물 됨됨이를 별것없는
것으로 보고 했다.여기서 西人들은 황윤길의 말을 믿었고,東人(南人 포함)들은 김성일의 말을 신뢰했다.이미
조정은 두쪽으로 갈라져 있었다.당시가 서인의 몰락,동인의 집권시기 인지라 주도권을 쥔 동인들은 김성일의
말을 따라 왜의 침략에 따른 별다른 방비책을 쓰지 않다가 倭侵이란 날벼락을 맞았다.후에 김성일은 민심의
동요를 생각해 거짓 보고를 했다고 하나 이건 억지의 변명이었다.오히려 조선 조정의 동인들이 倭의 수장들과
내통했다고 봄이 훨씬 설득력 있다.
3,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인들과 이들과 한편인 고급관료들은 모두가 이렇게 시기에 적절한 거짓말을 잘해야
자리를 보존할수가 있다.김성일의 말과 다르게 그가 거짓 보고를 한 이듬해 음력 4월(1592년) 왜군은 파죽시세
로 조선(동국)을 밀고 들어 왔다.동인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왕은 義州로 도망을 가야했다.결국 선조 25
년(1592년)에 이씨왕조는 망한 것이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봉건주의 왕조시대에 이런 군주가 있던 나라는 재
건과 부활이 불가능 하다.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군주가 나만 살겠다고 도망을 가면 중앙과 지방의 크고 작은 조
직들이 붕괴되여 전 영토가 쑥대밭이 되며 아비귀환의 세상이 된다.무능한 동인세력들의 거짓 보고를 아둔한
선조가 동인의 말을 받아들 임으로서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다.그런데 돌아와 다시 군주로 군림 했다는 얘기는
역사를 빙자한 소설일 뿐이다.강단의 역사는 왜가 明을 칠것이니 조선은 길을 비켜 달랬다는 '征明假道' 란 주장
과 해설도 어디로 적용(반도나 대륙 모두)하든 거짓말이다.역사의 倭는 임진전쟁(1592) 전에도 이미 수없이 明
을 침략했던 전력이 있었고,기록들도 넘쳐난다.당시 倭와 싸웠던 明나라는 '척계광,유대유' 란 장수들을 배출하
기도 했다.
4, 임진년(1592)에 왜적이 쳐들어 오자 서인들은 왜침의 책임을 동인들에게 물어 동인의 李山海(영의정)를 탄핵
했고,강계로 귀양간 鄭澈과 尹斗壽등 서인들을 불러 들이고자 했다.이유는 선조가 피난가는 의주방향 전지역이
西人이 우세한 지역이기 때문에 선조는 서인들의 요구를 무시할수도 없었다고 했다.서인들은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를 귀양 보내고 동인들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했다.단지 서인 李恒福의 비호로 동인(남인)인 유성룡만
은 남아서 전란을 총지휘하게 했다.왕과 조정이 義州로 도망을 간후에도 동인과 서인들의 당쟁은 끊이지 않았다.
서로의 책임을 전가하기에 분주했을 뿐 앞으로의 대책은 논의하지 않았다.이에 선조는 시국의 엄중함을 빗대어
아직도 당파 싸움만 하느냐고 동서인들에게 호통을 칠 정도였다.우리는 여기서 조정의 당파 東人과 西人의 구분
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최초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갈릴때,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의 '乾川坊' 에 집이 있어 따르는 무리들이 東人이
되었고,반대의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貞陵洞' 에 있어 따르는 무리들이 西人으로 분리 되었다고 했다.그러나 선조
가 의주로 도망가는 그 義州 지역이 서인들의 主거점지라 서인들의 말을 들어줘야 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말의 진의는 선조가 도망간 義州란 한양의 서쪽지역을 의미하는 5방향(義=西)중 서쪽의 광대한 '義州' 지역이란
뜻이다.즉 어느 한정된 반도 북쪽이자 서인들의 義州 고을이 아닌 것이다.따라서 김효원의 건천방이나 심의겸의
정릉동 간의 거리도 가까운 한양 도성내의 인근이나 이웃의 거리가 아닌,대륙에서 서로 東西간 수백,수천리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된다.사실 반도 강제 입력의 의주는 도성의 서쪽이 아닌 북쪽이 아닌가?
5, 선조 27년(1594) 나만 살겠다고 도망간 군주가 폐허가 된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소설이지만,이것도 明과
倭의 타협과 화의의 결과가 아니였겠는가? 그럼 역사의 조선국 이씨 왕조와 조정이 한일이 뭔가?폐허가 된 나라
에 무슨 조정이 필요하다고 돌아온 선조는 '유성룡,김응남,정탁' 등 서인과 南人들을 섞어 3 재상을 임명했다.어찌
보면 왕의 입지를 강화하고자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여기서 동인들이 다시 南人과 北人으로 갈라진 경위를 살펴
보면,정권을 잡은 동인들이 서인 정철의 논죄를 하는 과정에서 강경파(이발,이산해,정인홍)와 온건파(유성룡,
김성일,우성전)로 갈린 것이다.이후 묵시적으로 서로 기회를 엿보며 헐뜯다가 강경파의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
하기 시작하면서 갈라섰다.당시 강경파 이발이 북악산(현 서울의 북악이 아님) 아래에 살고있어 그 당을 '北人' 으
로 불렀고,온건파 우성전이 남산(현 서울의 남산이 아님) 아래에 살고있어 '南人'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동인에서 갈라진 南人과 北人의 구분도 반도 서울(한성)의 북악과 남산이 아닌 대륙의 남인들과 북인들로
보면 무리가 없다.어디든 배산임수의 도성지역에서 북악과 남산은 어디인들 없을 쏜가? 북인은 도성에서 볼때 북
방 사람들,남인은 도성의 남방 사람들로 보면 무리가 없다.남인인 유성룡 일파에는 퇴계 이황 문인들이 많았고,
북인의 이발 일파에는 남명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다.단 이덕형의 경우는 본래 남인이었으나,이산해의 사위였기
때문에 南,北을 동시에 출입할수 있었다.그러다 북인들이 점점 강성해 지자 남인으로 돌아섰다.
6, 명나라와 왜 사이에 타협과 화의가 논의되고 있었다.물론 역사의 조선 조정의 개입이나 주장은 없었다.이때도
남인의 유성룡과 성혼은 화의(명과 왜 사이의 화의)를 받아 들이자고 했으나,대부분의 남인들이 반대했다.이유
는 종묘를 불사르고 능묘를 파헤친 원수들과는 화친할수 없다는 주장이었다.당시 조선의 입장이나 여력으로는
명과 왜의 화의를 막을수도 없었는데,대의명분 만을 앞세워 반대했던 것이다.조정의 형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동인내의 남인과 북인들의 분열도 가시화 되었다.화의는 유성룡이 주장했는데 화의 주장의 죄를 성혼이 뒤집어
쓰자 남인도 다시 '濁南과 淸南' 으로 갈리기 시작했다.李舜臣은 처음에 동인으로 남인 계열의 유성룡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가 되었고,공을 세운후 삼도수군통제사(강남,영남,호남)를 겸하게 되었지만 그의 활동영역은 반도가
아니였다.여기서 말하는 전라좌수사(전라 東道수사)는 반도에는 적용 대상지역이 없다.좌수사(우수사)나 수군통
제사란 江이나 수로를 따라 각종 전투와 통제임무를 수행했던 무관장수였지,바다(海)를 종횡무진하면서 적군과
싸우는 무관이 아니였다.반도에서의 해설처럼 그가 바다에서 활동했던 장수였다면 '좌해사,삼도해군통제사' 로
불렸을 것이다.
7, 모두 대륙의 장강유역과 그 이남에서 찾으면 된다.당시 동인(남인)들은 이순신을 지지했고,서인들은 '元均' 지
지 했다.이순신이 출세를 한 시기는 유성룡의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의 잠시였다.이순신이 바다에서 폈다는
'鶴翼陣' 에서 '陣' 이란 것도 은폐와 엄폐(掩蔽)가 쉬운 江과 복잡한 수로의 지상군과 水軍用 이지,바다의 해군용
아니다.따라서 이순신의 '학익진' 이란 전술도 육지에서 쓰는 군대주둔 전투 전술이며,明나라 장수인 척계광이
사용했던 '鴛鴦秦(원앙진)' 이 이순신에 이르러 '鶴翼陣' 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이다.'陣' 이란 자체가 육지의 지상군
이 사용하던 군대 주둔 전술이며 바다와는 관계가 없는 陣 이다.왜군이 완전히 물러난후 敬義(義를 공경하는)와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영향을 많이받아 의병장을 많이 배출한 北人세력들은 절의를 중시했고,강력한 斥和를
표방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이러한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북인을(대북) 형성해 광해군을 왕으로 옹립할수 있었다.
남인들은 주로 이황 문하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북인들은 조식과 서경덕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타국세력들의 외침에는 무능했으며,이러 저러한 당파들은 모두 '혈연,지연,인척,학연' 관계로 맺어져 있
었는데,지금의(2022년 10월과 11월) 한국 기꼴들과 연합한 법꾸라지들의 인명경시 정치판과 다를바 없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상선거사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