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싸늘한 공장
논어의 17번 째 책 양화편은 어딘가 굉장히 서늘하다. 공자!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나는 언제나 부드럽고 인자하며 푸근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 편에선 공자의 싸늘한 눈빛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번 양화편에서는 공자가 미워하는 것들, 군자라면 서슴지 않고 욕해야 할 것들이 등장한다. 좋은 말로 서로 사랑하기를 격려해도 시원치 않을 듯 한데, 나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사랑을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 하는 매서운 구절들이 담겨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품어주는 것을 군자라 여기지 않는다. 분노할 만한 대상에게는 뜨겁게 분노하는 것이 성인의 풍모라는 것이다. 공자는 분노해야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참된 용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때문에 공자가 미워하거나 분노하는 것을 이야기 할 때,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다가오면 마치 나 자신이 분노당할 만한 대상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에 아주 서늘함을 느낀다. 또한 이 편에는 보기 드물게 성인 공자가 아니라 한 인간에 불과한 공자가 등장한다. 쿠데타 세력의 초청에 마음 흔들려하거나(17.5) 한 정치가에 의해서 맥 없이 설득 당하고(17.1) 말을 뱉었다가 제자에 의해 서둘러 다시 말을 바꾸며 변명하는(17.4) 장면에서 그러한 공자를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내가 공자에게 이러한 것들을 느꼈던 구절들로 이야기 해보겠다.
“인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게 되는 것이다. 지혜로움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분수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신의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곧은 것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박절하게 되는 것이다. 용기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이다. 굳센 것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좌충우돌하게 되는 것이다.’”(17. 8)
여기서 공자는 여섯가지 덕목과, 그 덕목을 가려 빛나지 못하게 하는 여섯가지 폐단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움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모든 덕목을 가리는 것은 바로 한가지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배움은 모든 것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논어에서도 제일 먼저 ‘배움을 즐거히 하는 것’(학이)부터 말한다. 위에 여섯가지 폐단 모두 틀린 것 하나 없는 말들이다.
이 중 나는 두가지 폐단에 흠칫했는데, 첫번째는 지혜로움을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분수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로움은 낮은 자세로 배움으로써 나오는 덕목이다. 그러니 배움은 하지도 않은채로 ‘저는 지혜로움을 추구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모순이 가득한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 하고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고 볼 수 있다. 지혜와 지식은 좋아하되 사실 열심이 없고 배움을 게을리하는 나에게 이 대목이 창을 던졌다. 나를 꼴보기 싫어하는 공자가 책을 뚫고 느껴졌다.
두번째 폐단은 용기를 좋아하되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이다. 소히 ‘무식하고 힘만 쎈 놈’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도 아주 많이 분포 되어있다. 배움은 하지 않은채, 자신의 생각안에만 갇히고 그 어리석은 생각을 말하거나 생각할 실행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용기는 정말 쓸데없는 덕목이 된다. 사회에서는 이들로 하여 많은 사람이 어지러워지고 힘들어진다. 또한 이들이 높은 지위를 가질수록 주변을 더 크게 부숴놓는다. 이 대목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었고 평소 이상한 고집을 가진 내가 사실은 이들의 씨앗일 수 있단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세에 영합하면서도 겉으로만 점잖고 성실한 듯이 행동하여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사람은 바로 덕을 해치는 사람이다.’”(17.13)
나는 지금껏 사람의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았다. 인간은 평면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면체같은 존재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이 대목이 말하듯 하는 척해서 인정받으려는 것은 위험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순박한 이들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을 불쾌하게 하며 끝내 주변의 덕을 해치게 된다. 평소 집과 밖에서 사뭇 다른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겠거니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 대목은 그런 나에게 경각심을 불러줬다.
“자공이 여쭈었다. 군자도 미워하는 게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미워하는 게 있지. 남의 나쁜 점을 떠들어대는 것을 미워하고,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것을 미워하며, 용기만 있고 예의가 없는 것을 미워하고,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
사야. 너도 미워하는 게 있느냐? 남의 생각을 도둑질해서 유식한 체하는 것을 미워하고, 불손한 것을 욤감하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면서 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합니다.”(17.24)
이쯤 읽고 나니, 나는 왜인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에 지적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수는 없듯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점점 뒤틀려갔다. 차분한 마음으로 옛 서적을 꺼내들었다가 갑자기 봉변맞은 기분이었다.
특히 이편에서는 누군가 공자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상황들이 있었는데 누군 만나주고 누군 아주 대놓고 만나지 않는 공자가 굉장히 얄미웠다. 공자는 가끔을 사람을 가라는 경향이 있다. 또 무엇이든 확신에 찬 듯한, 단호한 말들을 내뱉는 공자가 보기 싫어졌다. 게다가 마지막 화룡점정으로다가 여자를 소인 취급하는 듯한 글로 끝이 나니 그저 공자가 싫어졌다. 공자는 남녀를 차별한다. 공자는 유교의 시작이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드린 것이 한국이기에 한국의 여성차별은 공자의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에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또 공자는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이번편처럼 허점을 들어낼 때는 더욱이 신뢰가 가지 않는다. 평소 나를 소인으로 깎아내리던 그 성인 공자가 나와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니 기분이 묘해진다. 성경은 신으로 제시되니 막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또 성경은 나의 힘이 아닌 성경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루라고 하는 반면 유교는 오로지 내 힘만으로 배우라는 듯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할 목표를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내라니 갑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공자가 성경읽기를 촉구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느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숨쉬지도 않는 무생물인 책을 노려보고 있노라니 현타가 왔다. 갑자기 공격받아 공자가 미워지간 했지만 공자의 가르침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우리가 살가는데에 있어 포기하면 안될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공자이다. 당시에도 충분히 미움받으며 생각을 펴낸 공자라면, 그 미움을 감당하며 이 가르침을 전한 공자라면 좀 더 읽어보고 싶다. 다음번에 마주할 18편의 공자는 좀 더 나은 인상의 할아버지이길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