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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5주)
창이 없는 집은 지옥이다
신30:9~14; 골1:9~14; 눅10:25~37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어떤 율법 교사와 예수님 사이에 오고간 대화입니다. 그 대화 사이에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끼어 있습니다. 사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비유라기보다는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사례를 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다른 비유처럼 듣는 이로 하여금 생각의 전환을 하게하고 큰 충격과 도전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가 갖는 특징을 두루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시험하기 위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아마 예수님의 수준이 어디쯤 인지 알아보려고 했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의도를 아셨는지 오히려 그에게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네가 율법교사이니 네가 한번 말해 보아라, 율법엔 뭐라고 하느냐?) 그러자 율법교사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인용해서 “정답”을 말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화가 일단락되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대화는 끝나지 않고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님께 또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아마도 논쟁을 계속하면 자신이 얼마나 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받고, 바로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갔지만 피하여 갔고,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 그를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죠? 어렸을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닌 분들은 수없이 들어왔고 연극으로까지 상연을 한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주일학교 교사로 있었을 때 이 이야기를 연극으로 상연한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어떤 인물을 가장 선호했겠습니까? 예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이었지요. 그 다음에 제사장과 레위인이었고(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면서 지나갑니다), 가장 꺼리는 인물이 강도 만난 유대인이었습니다. 강도를 하면 했지 강도 만난 사람은 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40년 전 어린 학생들의 생각이니까 지금하고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선한 이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 비유를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실을 본받아라 라는 본보기 비유로 보았지요. 마지막에 예수님은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시는데, 율법교사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라, 자비를 베풀어라, 친절해라”, 이런 말씀으로 읽게 합니다. 옳습니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심”(누가복음에서는 “측은한 마음”이라고 하지요.)을 가지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자비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신앙심, 영성의 핵심은 이 “자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살고 있고,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믿음은 결국 우리는 다른 이들(혹은 것들)의 자비에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믿음으로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대부분 다른 이들(혹은 다른 것들)의 자비 속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자비를 하나님의 자비라고 하지만, 실은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의 자비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따듯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고, 한 사람의 따듯한 물질적 대접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비든, 다른 사람의 자비든, 다른 피조물의 자비든, 자비 속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내가 자비를 받고 있지 않은데, 우리가 자비를 베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비유가 단지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본받아라 라는 도덕적 의미만을 갖는 것일까요? 그렇기에는 오늘 비유는 유대인들에게 너무 충격적이고 도전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만, 오늘 비유는 율법교사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온 것입니다. 율법교사가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이 질문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웃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선, 이웃이 아닌 사람을 쳐내면 이웃이 남습니다. 이웃이 아닌 사람은, 이방인은 이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웃이 아닙니다.
시편 말씀에, “그들은 주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며, 주님의 이름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합니다. 주님,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으며, 주님께 대항하면서 일어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너무나도 미워합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시139:20~2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이 확 줄지요? 그러니까, 율법교사의 눈으로 보면, 로마인이나 사마리아인들, 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웃 나라 사람들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세리나 창녀들,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인들은 이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율법적으로 정죄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보다는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이 율법적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웃은 하나님을 잘 믿고 율법을 잘 지키는 평신도 유대인들이 될 것이고, 거기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 율법교사들, 제사장들이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한 율법교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물었을 것입니다.
이런 율법교사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의 이웃도 매우 좁혀질 것입니다. 우리는 서구처럼 인종차별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도 알게 모르게 차별이 많고 이웃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의는 내 중심에서 내려진 정의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이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주어는 “나”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보는 이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이 비유는 분명히 율법교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청중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주로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비유를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하는데, 여기서 “어떤 사람”은 분명히 유대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30Km쯤 되는 길인데, 예루살렘은 해발 1000미터의 아주 높은 요새이고, 여리고는 요단강 협곡 저지대에 위치한 도시라서 내려가려면 급격한 경사길이 계속되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떼들이 자주 출몰하는 길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길에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났다는 것은 그리 이상스럽지 않습니다.
강도들은 어떤 사람의 옷을 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팬 다음에 버려두고 갔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그 길로 내려옵니다. 천만 다행으로(!) 그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듣는 청중들은 이제 강도만난 사람은 살아났구나 안심했을지 모릅니다. 청중들은 당연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잘 아는 제사장이 이 사람을 살릴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피흘리고 누워있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그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는가? 율법에 죽은 시신을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제사장이 그 때문에 피하여 지나갔을까요? (그런데 거의 죽게 되었다고 했지, 죽은 것은 아니었지요.) 아무튼 동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엔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레위인도 율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보다는 격이 좀 낮습니다. 그러니까 청중들은 이번에는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정말로, 레위인도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제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할 차례인데, 사람들은 당연히 세 번째 사람으로 평범한 유대인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표적인 종교인 두 부류가 지나갔는데, 그들은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고 했을 때, 세 번째 사람이 평범한 유대인이고, 그가 도움을 주었다고 하면, 이야기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이 비유는 성직자에 대해 비판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세 번째 평범한 유대인이 지나갔는데 그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하면, 유대 공동체 전체가 사랑이 없음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천사가 와서 구원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도움을 주지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 는 메시지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하는데, 사마리아인이 등장을 합니다. 아마도 당시 청중들로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일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그 길에서 사마리아인은 보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사람으로도 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에게 가까이 가서(제사장과 레위인의 “피하여 지나갔다”와 얼마나 대조가 되는 말입니까?),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다음날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을 뿐 아니라,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약속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행동들의 동기가 나오는데, 33절의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랬다는 겁니다. 이 “측은한 마음”(스플랑크니조마이)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보시면서 가졌던 마음,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낮추어 보면서 “불쌍하군, 쯧쯧” 하는게 아니라고 했지요? 온전한 자비심입니다. 여러분, 듣는 유대인들의 불편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옛 유대 문헌에 보면, “사마리아인의 떡을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갖는 태도를 정서적으로 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끔찍이도 싫어하고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에 비길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합니다. 이웃의 관점을 바꾸어 버리지요. 내 편에서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쪽의 관점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율법교사는 너무 불편했기 때문인가요, 직접적으로 “사마리아인이요”라고 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말 자체가 아주 모순되는 말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로 말하면, 잘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에게 선한 불자들, 선한 모슬렘이라는 말이 불편할지 모릅니다. 또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동성애자라는 말이 불편할지 모릅니다. 또 공산주의를 악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선한 공산당원”이라는 말이 낮선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아주 자세히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듣는 내내 유대인들이 불편해 하리라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게 자세히 설명합니다.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낄까요? 주님의 의도일지 모릅니다. 이웃은 너의 입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는 이 비유를 듣는 율법교사와 유대인들에게는(우리에게도!) 엄청난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가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 관념과 의식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으로 갈라지고, 문화로 갈라지고, 인종으로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가 편하고 안전합니다. 같은 종교, 같은 신학, 같은 문화, 같은 인종과 사는 것이 편하고 그들을 돕고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남과 녀,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할례를 받은 이와 할례를 받지 않은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당시에는 놀라운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초대교회가 이것을 받았을 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우리의 분리된 의식을 하나로 모으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여정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1958년 3월 18일 루이빌 상가 한 복판에서 경험했던 모든 이들과의 일치감. 그리고 분리되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은 우리 영적 여정의 목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망상이 끝날 때,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누구와 동일시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율법교사와 유대인들은 우선적으로 자신들을 사마리아인과 동일시하기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콩쥐팥쥐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을 팥쥐나 팥쥐 엄마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콩쥐팥쥐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율법교사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과 동일시하기 힘이 들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자신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매정한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힘이 듭니다.(사실 자신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도 아닙니다) 그러면 강도 만난 사람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사마리아 인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 있다! 너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의 자비심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전에, 너희들이 먼저 누군가의 도움과 자비를 입고 있음을 깊이 되새겨라! 많은 자비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자비에 빚진 자로서 살 수 있다.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진짜 속마음은, 혹시 이것 아니었을까요?
루미가 말했습니다. “창이 없는 집은 지옥이다” 하나님의 빛, 거룩한 은혜의 비는 우리의 본디 근원에서부터 창을 통과하여 우리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창문으로 통해 우리는 그 빛과 은혜로 이 세상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이 없는 집은 지옥입니다. 여러분 안에 밖으로 향해 있는 창이 어떤 모양과 형편인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온 빛이 온 방을 밝게 비치는지, 그래서 여러분의 창문으로 통해 밖과 잘 소통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과 분리의식을 알아차리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시민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가 받은 자비에 힘입어, 우리도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