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취학 전 어머님과 함께 다니던 아버님의 성묘길을
나는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한다.
일거리 없는 날 대부분 어머님은 아버님의 산소를 찾으셨는데
그 횟수가 너무 심할 정도로 많았었다.
그 당시 파주 경찰서 뒤가 공동묘지 였는데
온 산 하나가 볼록볼록 한게 그걸 쳐다보고 있노라면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에 어린 마음이 우울했었다.
국광 한 두개와 소주 한 병 사들고 광목 치마 펄럭이며 휙휙 걸어가시는
어머님 뒤를 뛰듯 따라가도 성묘 끝나고 그거 먹을 생각에
약 1.5km 되는 그 길이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따라다녔었다.
산소에 도착하기 몇 미터 전부터 벌써 어머님의 두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코푸는 횟수가 잦아진다.
새끼 줄로 감은 낫 날을 풀러 몇 칠전 깎은 잔디를 빙빙돌며
깎는다라기 보다는 대답없는 아버님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그게 항상 궁금했다.
사람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 처럼 하는 걸 볼때면
어떤 날은 와락 겁이나 아래로 내튀고 싶은 마음도 몇 번 있었다.
산소 주변엔 왜 그렇게나 송장 메뚜기라 불리는 검갈색 메뚜기가 많은지
그 것 뛰어다니며 잡다 돌아보면 어머님은 이제 아예
철푸덕 주저 앉아 원망에 가까운 말을 산소에 대고 퍼대기 시작한다.
"애들 데리고 어찌 살라고, 애들 데리고 어찌 살라고............."
어떤 날은 가져간 소주에 취해
"야, 이 김가놈아! 너만 가면 다냐? 말좀 해봐 이 놈아." 하며
산소에 엎어져 어깨 들썩일때 나도 따라 울었었다.........
2.
어머님은 밥을 하려고 쌀 독에서 쌀을 퍼낼때마다
한 줌씩의 쌀을 조그만 독에다 따로 모았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그러긴 했지만 말이다.
그걸 비상금 이란 용어와 함께 아람치라 부른다는데
맞는 말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머님의 고향이 충청북도 청주 사람인데 그 쪽 사투리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모아서 명절이나 아버님 제사 때 제수용으로 쓰기도 하고
생신 때 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 그 쌀독을 마당으로 들고나가
한참이고 당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다 큰 소리로
"얘들아 어서 빨리 나와봐라. 이번엔 아버지가 곰이 되어 왔다 가셨구나.
새가 되어 왔다가셨구나. 호랑이.........." 등등등
갖다 대는 동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경계 수칙에 마음대로 상상치 말 것 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참 쳐다봐 자기 최면을 걸면 없는 것도 있어 뵈는 법이다.
검지 손가락으로 쌀을 가리키며
"잘봐라 여기 이렇게 이렇게 보이지? 곰발바닥이 이렇게 생긴거란다."
???????????????????
그럴때 마다 어머님은 두 손 맞잡고 허공을 응시하며 '왔다 가셨군요 당신..'
그러면 나는 빨리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급히 나오는 웃음은 큭큭대기 마련이기 떄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턴가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저렇게 없는 것에도 감사하며 고마워 하는데 구체적으로 보인다면?????
그래서 다음 명절이나 제사때가 되어선 벽장에 올라가
작은 젓가락 만한 나무로 휙휙 휘저어 놓기 시작했다.
해석은 어머니가 하면 되니깐 말이다.
다음 날 쌀독을 마당에 가져나간 어머님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셨다.
옆집도 불러오게 하고 옆집은 세상에, 세상에나를 연발하고
얼굴이 화덕거려 더 이상 볼 수 없는 난 학교로 공 차러 가고
그 날 저녁,
"너희들 봤지? 이번엔 아버님이 지네가 되어 왔다가신것. 말 안들으면 알아서해."
??????????????????????????
지금 까지도 그것 만은 형님에게 비밀로 해왔다.
그런 행위를 국민학교 6학년 까진가 했는데 그림은 날로 발전해
새발자욱, 개발자욱 등 무슨 발자국 그리는 건 지금도 자신있다.
-금촌동에서 김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