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기행>
목포는 인자 이난옝이 '눈물젖은 옷자락'이 아녀!
“내가 을마나 독한 년인디 옛 서방놈헌티 인사를 혀?”
김명식 - 완도식당 여주인 70 노파의 다부진 절규!
김승웅방장 귀하:
소생 내외가 4.17과 5.8에 파이자 백신 맞고 오늘부로 항체완성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지난 주 좀이쑤셔서 고속열차 타고 목포를 당일로 다녀왔는데
먹는 것, 보는 것이 좋았기에 여기 글방 제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늘 평강을 기원합니다.
김명식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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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기행
- 보리밥골목 완도식당과 1004대교
“까짓 거 목포 한 번 다녀오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가?”
그래서 80안팎 친지 네 사람이 당일치기로 ‘아무 까닭 없이’ 목포 기차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구태여 이유를 달자면 코로나시대의 답답증을 조금 달래보자는 거였지요.
참고로 이 시니어 쿼테트의 구성을 말씀 드리자면
지방국세청장을 지낸 44년생이 막내로 전남 고흥 출신, 그 다음 41년생 전직 언론인이 강진 생,
그보다 2년 연장으로 아직도 강남에 무역회사 간판을 걸고 있는 분이 전북 전주 산이고
맨 위로 이 나라 금융, 산업계에서 맹활약을 하다가 지금은 에너지분야 저술에 몰두하는
좌장 격인 분이 서울 토박인데 믿어지지 않게 목포가 초행길이라 했습니다.
이건 중요한 사실인 것이 공직생활 근 20년에다 주요 공공기관과 기업체 여러 곳 CEO를 역임하면서
목포항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당사자보다 오히려 목포라는 곳이 그만큼 이 땅의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나 싶기 때문입니다.
이난영은 어째서 ‘목포의 눈물’을 노래했던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하는 가사에는
특별히 눈물을 자아내는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이라고 원론적인 연심의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포는 어딘가 애조를 띤 노래라야 분위기가 맞는 그런 고장으로 오랫동안 치부되어왔고
그 배경에는 전후 이 땅의 그늘진 정치사도 그 한 요인으로 칠 수 있겠는데,
여하튼 한 분이 ‘80여 평생에 처음’이라고 마치 그런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강조하는 것을
동행들이 그냥 수용해주었습니다.
최근 목포가 세인의 관심사로 떠오른 적이 있는데
재작년인가 목포출신도 아닌 한 여성 국회의원이 유달산 아래 목포 구시가 여러 필지를
친척 등의 이름으로 매입했다가 개발정보를 사전에 알아 투기한 혐의를 입었지요.
이번에 목포에서 점심을 하면서 식당 여주인에게 얘기를 꺼내니 어떤 식으로라도 외지인들이 투자를 하고
시에서는 돈을 들여 개발을 하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말썽만 일으키고 유야무야 되는 것 같다고 서운해 했습니다.
그 식당 즉 항동시장 안 보리밥 골목 완도식당은
지난 수삼 년 동안 필자가 몇 차례 들려서 단골이 된 집입니다.
우리 네 사람은 강남 수서역 SRT(Suseo Rapid Transit라나요) 대합실에 지난 주 어느 날 아침 9시 좀 지나 모였습니다.
주중 경로할인을 받으니 목포왕복 64,600원으로 주행시간은 9:40a.m.-12:04p.m.,
2시간 24분에 목포 구시가 한복판에 있는 목포역에 내려주었습니다.
50년대에 방학이 되면 학교 학생과에서 호남선야간완행열차 할인권을 얻어
요새 돈으로 기천원에 표를 사서 밤새도록 가다서다 하는 열차를 타고 광주나 목포역에 내리면
아침 해가 쨍쨍했었는데 무려 70년이 경과하여 시속 200-300킬로로 번개같이 날아오니
시대의 변화에 감회에 젖을 수 밖에 없는데, 한편으로는 요즘의 대학생들은 가상화폐에 투자한다더라 하는
더 엄청난 사실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습니다.
우리 21세기의 노인들도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 주차장에 문을 열고 있는 렌터카에 가서
중형승용차 한 대를 빌리고 젊은 ‘사장님’을 기사 겸 가이드로 모셔서
미리 전화를 해 놓은 완도식당으로 바로 향했습니다.
인터넷을 열면 ‘목포맛집’이라고 독천식당, 영란회집, 오거리식당 등등 이 나오는데
원래 꽤 괜찮은 밥집들이었을 텐데도 인터넷보고 몰려오는 젊은 관광객들로 인해
음식도 서비스도 질이 저하한다는 게 중론이어서 시장 안에 어부들이 찾는 집을 알아본즉
완도식당, 그 옆에 진도식당이 나왔습니다.
완도식당은 완도하고는 상관없는 정방금씨가 30년 동안 한자리에서 밥장사를 하기에 단골이 많은데
이 집도 어느 서울손님이 인터넷에 올려 낯선 사람들도 꽤 찾는다고 합니다.
메뉴도 따로 없고 우리 같은 손님이 오면 그날 시장에서 물 좋은 생선으로 차려주는데
이번에는 병치회에다 민어탕으로 잘 먹었습니다.
가게는 주방이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스페이스에 테이블 둘, 의자 여덟이 전부인데
손님이 더 들면 층계를 올라가 다락방 같은 2층에 앉아 먹어야 합니다.
이 공간은 말하자면 아래층 문 닫아걸고 밤새도록 젓가락 짝 두드리며 막걸리를 퍼 마셔야 제격인데
여주인께서는 이제 나이 70이 다 되어 계단으로 음식 나르기가 어렵다고 2층 손님은 ‘사절’이라고 합니다.
식사 중에는 혼자 시중도 들다가 옆에 앉아 지난 시절 얘기를 술술 푸는데
이번에는 어쩌다가 30년 전 남편과 헤어지게 된 사연을 서울손님들한테 세세히 고하는 바람에
우리도 함께 측은지심에 젖었습니다.
“혼자 사시니 아이들 아버지하고는 간혹 보세요?”하고 물은 것이 정씨의 말문을 트고 말았습니다.
“간혹이 아니고 날마다 보지요”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전남편, 이 못된 작자는 새 여자와 잘 살면서 완도식당 근처에서 매일 점심을 하고 꼭 보리밥골목을 지나 돌아가니
거의 매일 그 잘난 꼴을 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사는 나누냐고 물으니 “내가 얼마나 독한 년인데 그 놈하고 인사를 해요?”하고 반문합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웬수가 된 그 옛날의 사건을 눈하나 깜짝 안하고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여자가 함께 있다는 제보를 받고 차를 몰고 현장으로 쳐들어갔더니
몸집이 큰 여자가 앞으로 나와서 다짜고짜 자기를 밀쳐 순식간에 땅에 넘어졌는데
남편은 옆에서 둘의 육탄전을 바라보고만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날로 도장 쾅쾅찍고 남남이 되고 자신은 시장에서 밥장사를 시작했다는 것.
일행이 진심으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던지며 식사를 마치자 정방금여사는 우리들을 골목 끝에 있는
아담한 카페로 모시고 가서 커피대접을 했습니다.
맛이 기가 맥힌 갈치속젓을 여러 날 먹을 만큼 담아주고.
점심 후 삼학도에 있는 김대중대통령 노벨평화상기념관에 들려
일행 중 한사람이 DJ의 미국 방문에 동행한 사진 등이 전시되어있는 것을 보고서
바로 해상케이블카를 타러 북항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여기서도 경로할인을 받아 일금 2만원씩의 탑승권을 끊어 곧바로 곤돌라에 올라탔지요.
케이블카는 북항에서 유달산 산정으로 마치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처럼 솟아올라가고
거기서 사람들은 일단 내려 서남해의 바다와 섬들과 목포항을 휘둘러 조망하고는
다시 곤돌라에 올라 이번에는 바다 위를 높은 줄에 매달려 저편 고하도 종점으로 날아갔습니다.
푸른 하늘과 검푸른 바다 사이로 굵은 로프를 마치 두 팔로 붙잡고 가는 곡예사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우리는 가사를 외우고 있는 사람의 리드를 따라 ‘목포의 눈물’을 3절까지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북항터미널로 돌아 온 다음의 코스는 압해대교와 천사대교를 통과하는 섬 길 드라이브.
천사대교는 2010년에 착공해서 10년만 에 완공해 신안군의 큰 섬들을 육지와 연결시켰는데
이 지역의 섬들이 모두 1,004개에 이른다고 해서 이 장대한 11킬로미터 다리의 이름을 천사대교라고 붙였습니다.
다리의 모양도 특이해 목포 쪽 절반은 현수교 형태로,
서해 쪽 절반은 사장교 형태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마도 바다의 수심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사장교는 양쪽 교탑에서 케이블이 직선으로 뻗어 다리 상판을 들고 있는 것이고
현수교는 교탑과 교탑을 먼저 파이프를 늘여 연결하고 그로부터 케이블을 수직으로 내려 상판을 매다는 식.)
아무튼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몰라도 다도해가 세계적 관광지대가 되면
천사대교는 일약 국제적 명물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수천억원이 투자된 이 다리의 경제성에 대하여는
지금은 말하기 어렵고 다리 끝의 카페에 앉아 우리 같은 답사자들이
‘아, 내나라 국력이 과연 대단하구나’고 탄성을 발하는 것으로 그쳐야겠습니다.
여러 곳을 몇 시간 동안에 돌았더니 갈증이 와서 목포역 근처에서 시원한 냉면을 들고는
서둘러 수서행 열차에 올랐습니다. SRT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제는 이난영의 두번째 히트곡 ‘목포는 항구다’를 불러야 하는데 일행 중 아무도 가사를 기억 못했습니다.
날은 이내 어두워지고 열차의 엄청난 속도가 잔잔한 진동 속에 오히려 정적에 잠기는 가운데
자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와 시장의 사람들과 함께 한 당일치기 여행은
몸의 피로를 봄날의 훈풍이 달래주는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현)코리어 헤럴드 칼럼니스트/한국일보 견습 17기/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김대중정부 해외홍보원장,
아리랑TV 이사장 역임/광주일고~서울법대(58학번)졸/康津 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