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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계씨(季氏)제 9장에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자질을 생지(生知), 학지(學知), 곤지(困知) 그리고 하우(下愚)의 네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최상의 자질은 나면서부터 만물의 이치를 알며 덕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 다음은 뜻을 세워 배운 뒤에 사물의 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차하위의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여 발분해서 배워 아는 사람입니다. 최하등의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도 배우려 하지 않고 태평으로 생각하여 노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2500년 전 공자의 고루한 말이 오늘날과 같이 최고의 전문가가 대우를 받는 정보화시대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고 반론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전문성의 5단계의 관점에서 현실 지혜의 위계구도를 거듭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문성의 1단계(무능을 의식하지 못함): 내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단계.
전문성의 2단계(무능을 의식함):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단계.
전문성의 3단계(능력을 의식함): 실력 연마에 집중과 몰입이 필요한 단계.
전문성의 4단계(능력을 의식하지 못함): 결정이 빠르고 직감적이지만 편향에 휘둘리는 단계
전문성의 5단계(능력을 성찰함): 직감을 의심하고 실수를 없애야 할 때를 아는 단계.
데이비드 롭슨(David Robson)이 쓴 “지능의 함정(The Intelligence Trap, 이창신 번역 김영사간)”에 전문성의 5단계에 관한 아래 설명을 참고하시면 단계별로 전문가를 지향하는 사람이 처한 독특한 함정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생초보는 무능을 의식하지 못한다. 즉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능력부족을 깨닫고 실력을 쌓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데, (이는) 무능을 의식하는 단계이다. 여기서 더 노력하면 드디어 능력이 생기고,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안다.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여러 해에 걸친 훈련과 현장 경험이 쌓이면 결정하는 것이 제2천성이되고, 이때는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발휘한다. 전통적으로 이지점을 전문성의 정점으로 본다. 그러나 이때 전문성 편향의 결과로 결정의 정확도가 정체될 수 있다. 이 한계를 깨려면 마지막 단계가 하나 더 필요 할 수 있는데, 바로 능력을 성찰하는 단계 즉 성찰능력(Reflective Competence) 단계이다. 직감을 살피고 그것에 휘둘리기 전에 거기서 생기는 편향을 (사전에) 알아보는 능력이다.
국민의 힘에서 지난 4월 11일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김태우 후보를 아주 짧은 시간내에 윤석열 대통령이 사면하고 보궐 선거에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을 다시 공천하여 구청장후보로 내보내 유권자들의 엄중한 심판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선거과정에서 김태우 후보는 보궐선거에 소요되는 비용 40억을 약과에 불과하다고 오만 불손한 발언을 하고 해명하느라 혼이 난 일이 있습니다. 이번에 국민의 힘에서 김태우 후보를 밀어 부친 이유는 문재인 정부 시절 공익신고자라는 보은행위 때문일 것입니다. 적에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가 유효합니다. 대법원의 판결로 유죄가 확정된 김태우 후보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집권당의 의지가 워낙 강하여 전문성의 5단계를 생략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번에 선거를 통하여 김태우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공식적인 부적격 판정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힘이라는 정치집단이 아무런 시정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 하며 그럭저럭 땜질처방으로 사건을 무마하려고 한다면 집권당은 국민들로부터 하우(下愚)의 평가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두고 볼일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 똑똑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이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설득력 있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솔로몬의 역설(Solomon’s Paradox)라고 합니다. 내로남불과 일맥 상통하는 겉 똑똑이 들의 오만한 사고의 산물이자 자기 기만 행위입니다. 즉 타인의 문제는 현명하게 판단을 잘 내리고 지나칠 정도로 비판하고 호되게 매도하면서도 막상 내 문제는 감정에 지배를 당하여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현명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을 가리 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로운 판단력을 부여 받은 솔로몬은 매춘부둘이 솔로몬을 찾아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면서 아이의 생모를 판단하기 위해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명령합니다. 진짜 아이 엄마라면 아이가 죽는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아이를 단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판단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이 판결이후, 솔로몬의 조언을 얻고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부국으로 이끌었고 예루살램에 성전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무절제한 열정에 지배되었습니다. 그는 유대교 최고의 성직자 이면서도 토라의 계명을 어기고 아내와 첩을 1000명이나 두고 분에 넘치는 부를 축적했습니다. 급기야 그는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운 폭군이 되었고 아들을 교육해 권좌에 앉힐 준비를 하는데 소홀히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딜레마는 지혜롭게 판단하면서도 자기 문제는 사리에 따라 객관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곤경에 빠지곤 합니다. 이를 두고 솔로몬의 역설(Solomon’s Paradox)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론은 캐나다 워털루 대학 의 심리학자 이고르 로스먼(Igor Grossmann)이 고안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지도자가 판단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이 절실하게 필요 합니다. 지도자는 주변의 아첨꾼들 때문에 사리판단에 혼선을 일어 키고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중요한 사안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때 마다 지적 겸손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판단에 오류를 걸러내는 필터링 작업을 거치는 것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때 지적 겸손이란 내가 내릴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류 가능성을 사전에 검증하고 보완하려고 하는 일종의 사전 부검(Pre-mortem) 능력을 말합니다. 사전부검(pre-mortem)이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추론해보고 그런 상황을 유발할 법한 모든 요소를 추려보는 것으로 편향됨을 제거하는 대단히 유익하고 확실한 방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적 겸손에 반대되는 말이 지적 오만입니다. 지적으로 오만한 사람은 자신이 사실에 접근할 더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이 우월하다는 그릇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존경에 대한 강한 욕구 때문에 스스로의 권위를 맹신하고 사실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만함이 파벌적경향을 동반할 때 더 위험합니다. 지적 오만이 파벌적 양상을 띄면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모른다”. “우리는 그들에게 배울 게 없고 우리의 인지능력은 우월하며 더 정교하다” “우리는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파벌적 오만함의 특징은 단순한 태도 이기 보다 사고방식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위험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 방식은 한번 굳어지면 잘 변하고 없어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적인 오만이 선을 넘으면 교조주의에 빠져 들 위험을 자초 할 수 있습니다. 교조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한 교의나 사상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 현실을 무시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진부한) 태도를 말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권위에 집착하여 교조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을 초래할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나오는 재여부재지간(材輿不材之間)의 지혜를 참고 하여 치우치고 쏠리기 보다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며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 일화에서 장자가 추구하는 바는 일종의 탈교조주의의 상징
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거목(巨木)을 보았다. (그런데) 나무꾼이 그 곁에 머문 채 나무를 베려 하지 않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쓸모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감이 안되므로 쓸모가 없으니 그 천수를 다 할 수 있었던 거다. 장자가 산을 나와 옛 친구 집에 머물렀다. 친구는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아 대접하라고 일렀다. 아이가 한 마리는 잘 울고 또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쪽을 잡을 가요? 하고 묻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쪽을 잡으라고 했다.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목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그 천수를 다 할 수 있었는데, 지금 이집 주인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대체 어느 입장에 머물겠습니까? (하고 묻자) 장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材輿不材之間)에 머물고 싶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도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끈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안정된 틀에 자신을 영원히 붙들어 매어 두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교주주의에 가까운 고정관념으로 부터 탈피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리석은 일관성은 옹졸한 정치인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숭배하는 범부들의 도깨비 장난에 볼과하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이 전혀 상관없다. 그것은 그가 벽에 생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지도자가 세가지 일을 충실하게 하기만 하면 나라가 평안해지고 민심도 얻게 된다고 말한 사람이있읍니다. 바로 순자가 말한 세가지 일이란:
첫째는 평화로운 정치로 백성을 사랑하고, 둘째는 예의를 숭상하여 선비를 사랑하고, 셋째는 어진이를 높이고 유능한 자를 등용하여 쓴 것이라고 했다.
10월 둘째 주 한국 갤럽의 여론조사의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33%이고 부정 평가는 58% 였습니다. 긍정평가 이유로는 외교 22%, 국방.안보 12%, 전반적으로 잘한다 5%, 결단력.추진력.뚝심이 5% 였습니다. 부정평가이유로는 경제.민행.물가 16%, 외교 13%, 독단적/일방적 9%, 인사 7%, 소통 미흡 7 % 순이었습니다.
내년 4월에 실시될 제 22대 국회의원 선거결과에 대한 기대 항목에서 현정부지원 다수 당선이 39%였고
정부견제 야당 당선이 48% 였습니다.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의 소재와 전국적 민심의 흐름이 크게 다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순자는 또 지도자와 백성을 각각 배와 물에 비유하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君者舟也庶人者 水也 水則載舟覆舟
지도자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엎어 버리기도 한다.
아무튼 민심을 얻기는 매우 힘들지만 권모술수나 중상모략으로는 얻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직 건전한 정책 수립과 성실한 실천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 씩 민심을 얻어 나가야 만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회에서 다수당인 야당과 사안별로 대화와 타협 그리고 절충이 꼭 필요해 보입니다.
채근담에 보면 毋借公論而快私情 이라는 성구가 있습니다. 이 문장의 뜻은 여론의 힘을 빌러 개인적인 감정을 만족시키지 말라 쯤으로 풀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태우 후보의 낙선의 의미속에는 유권자들의 혼재된 감정이 녹아 있는데 그 가운데 는 김태우 후보에 대한 대통령 사면 권 행사 의 정당성 테스트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정운영의 불통과 일방통행에 대한 질책은 말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이번에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국민의 힘이 공천한 김태우 후보가 큰 표차로 야당 후보에게 낙선 한 사건이 국민의 힘에게는 전화위복이 될지 좀더 시간을 두고 관찰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최대의 고비를 맞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시기에 윤석열 대통령에게 투표한사람으로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위로의 말씀은 이번에 고배를 마신 강동구청장 선거는 패배의 모습으로 변장한 축복 일거 에요 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위로가 현실로 바뀌자면 윤석열대통령을 반대한 유권자들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 정도로 윤대통령이 좀더 유연해 지고 겸손해 져야 가능하리라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전문성의 5단계를 윤대통령의 주요 국정 수행 프로세스의 일부로 채택 할 때 어느정도 가능해 지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