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평생의 동반 ‘함 도깨비 선생’을 알게 돼
장준하 평전/[2장] 의주에서 태어나 삭주에서 자라 2008/10/17 08:00 김삼웅장준하의 신성중학교 시절에 빠뜨릴 수 없는 기억의 하나는 함석헌과의 만남이었다.
여기서 ‘만남’이란 표현은 적절치가 않을지 모른다. 어느 날 친구 안선규와 함께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로 함석헌을 찾아갔다. 당시 함석헌은 평안도지역 학생들에게 ‘함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오산학교의 교사였다. 두 사람은 유명한 ‘도깨비 선생’을 찾아간 것이다. 이들이 그 때 함석헌을 만난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제 갖 이성과 감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장준하에게 함석헌의 존재는 생애의 큰 그림자로 각인되었다.
함석헌은 1901년 평북 용천 출신으로 평양고보 3학년 때 3ㆍ1운동에 참가한 뒤 학업을 중단했다 1921년 민족사학인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할 때까지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1928년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장준하가 친구와 함께 오산학교로 함석헌을 찾아갔을 때는 30대 중반으로 동인지 <성서조선>을 내며 활기찬 활동을 하고 있을 때이다.
말로만은 어려서부터 자주 들어오던 이름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함선생님이 봉직하시던 오산중학교가 있던 평북 정주의 바로 이웃 군인 선천에 있었기 때문에 그 학교 소식은 자주 들려왔다. 오산중학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함 선생님의 이야기는 빠짐없이 따라다니곤 하였다.
모르는 것이 없는 선생님, 그렇기에 오직 학생들은 감탄한 나머지 ‘도깨비’ 라는 별명까지 붙였던 선생님이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오산 학생들에게서 흔히 들었던 이름도 ‘함 도깨비’였다. 오산 학생들은 그 ‘함 도깨비’의 이름을 자세히 물어야 비로소 함석헌이라고 일러주었다.
학생들의 존경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던 선생님이다.
웬지는 모르지만 그 때 오산학교에서는 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던 중 어느 땐가 그냥 동맹휴학이라기보다는 아주 거친 학생소동이 일어났다. 주먹깨나 쓰는 학생들은 평소 좋지 않게 보아오던 몇몇 선생들을 때려준다고 교무실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한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린 교원들은 모두 재빨리 피하여 버렸는데 함선생님 혼자만 태연히 앉아계시다가 그만 그 난동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셨다. 그런데 얼마 후 학생들은 냉정을 되찾자 쳐도 무방하다고 평소 벼르던 선생을 놓치고 자기들이 지극히 존경하던 그 도깨비 선생을 찾아가 눈물로 사과를 하면서 “그 때 다른 선생들은 모두 피하였는데 선생님은 왜 피하시지 않고 혼자 앉아 계시다가 두 손으로 눈을 꼭 가리시고 맞으셨다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하고 정중히 물었다 한다.
그 때 선생님은 담담한 표정으로 껄껄 웃고 나서
“나는 아직 수양이 모자라서 성인들 같이 너그러울 수 가 없어, 맞은 것이야 별것 아니지만 나를 때리는 학생이 누군지 알면 앞으로 그 학생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좋을 수 가 없는게 아닌가. 그래서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그 학생의 그 얼굴을 안 보려고 눈을 가린 것이지.”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 ‘도깨비’의 순회가 끝나자 그 학생 대표들은 모두 마음에 충격을 받아 소리를 내며 울며 엎드려 사과를 하였다는 것이다. (주석 11)
다소 길게 함석헌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때 젊은 장준하의 가슴에 함석헌의 존재가 깊숙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해방 뒤 남한에서 장준하가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함석헌을 ‘발굴’하여 글을 쓰도록 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잡지를 통해, 민권운동을 통해 고락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장준하에게 함석헌은 스승이고 동지였다. 함석헌이 아니었다면 <사상계>는 그토록 광휘를 발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함석헌에게 장준하와 <사상계>가 없었다면 유영모 선생과 같이 종교인, 사색인으로 종생하였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성학교 학생 장준하에게 함석헌을 ‘만나게’ 한 것은 역사의 섭리가 아니었겠는가 싶다. 한국현대사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큰 축복이고 희망이 되었다.
주석
11) 장준하 <장준하 문집> 3, 127~128쪽.
여기서 ‘만남’이란 표현은 적절치가 않을지 모른다. 어느 날 친구 안선규와 함께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로 함석헌을 찾아갔다. 당시 함석헌은 평안도지역 학생들에게 ‘함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오산학교의 교사였다. 두 사람은 유명한 ‘도깨비 선생’을 찾아간 것이다. 이들이 그 때 함석헌을 만난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제 갖 이성과 감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장준하에게 함석헌의 존재는 생애의 큰 그림자로 각인되었다.
함석헌은 1901년 평북 용천 출신으로 평양고보 3학년 때 3ㆍ1운동에 참가한 뒤 학업을 중단했다 1921년 민족사학인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할 때까지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1928년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장준하가 친구와 함께 오산학교로 함석헌을 찾아갔을 때는 30대 중반으로 동인지 <성서조선>을 내며 활기찬 활동을 하고 있을 때이다.
말로만은 어려서부터 자주 들어오던 이름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함선생님이 봉직하시던 오산중학교가 있던 평북 정주의 바로 이웃 군인 선천에 있었기 때문에 그 학교 소식은 자주 들려왔다. 오산중학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함 선생님의 이야기는 빠짐없이 따라다니곤 하였다.
모르는 것이 없는 선생님, 그렇기에 오직 학생들은 감탄한 나머지 ‘도깨비’ 라는 별명까지 붙였던 선생님이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오산 학생들에게서 흔히 들었던 이름도 ‘함 도깨비’였다. 오산 학생들은 그 ‘함 도깨비’의 이름을 자세히 물어야 비로소 함석헌이라고 일러주었다.
학생들의 존경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던 선생님이다.
웬지는 모르지만 그 때 오산학교에서는 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던 중 어느 땐가 그냥 동맹휴학이라기보다는 아주 거친 학생소동이 일어났다. 주먹깨나 쓰는 학생들은 평소 좋지 않게 보아오던 몇몇 선생들을 때려준다고 교무실로 우루루 몰려들었다 한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린 교원들은 모두 재빨리 피하여 버렸는데 함선생님 혼자만 태연히 앉아계시다가 그만 그 난동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셨다. 그런데 얼마 후 학생들은 냉정을 되찾자 쳐도 무방하다고 평소 벼르던 선생을 놓치고 자기들이 지극히 존경하던 그 도깨비 선생을 찾아가 눈물로 사과를 하면서 “그 때 다른 선생들은 모두 피하였는데 선생님은 왜 피하시지 않고 혼자 앉아 계시다가 두 손으로 눈을 꼭 가리시고 맞으셨다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하고 정중히 물었다 한다.
그 때 선생님은 담담한 표정으로 껄껄 웃고 나서
“나는 아직 수양이 모자라서 성인들 같이 너그러울 수 가 없어, 맞은 것이야 별것 아니지만 나를 때리는 학생이 누군지 알면 앞으로 그 학생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좋을 수 가 없는게 아닌가. 그래서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그 학생의 그 얼굴을 안 보려고 눈을 가린 것이지.”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 ‘도깨비’의 순회가 끝나자 그 학생 대표들은 모두 마음에 충격을 받아 소리를 내며 울며 엎드려 사과를 하였다는 것이다. (주석 11)
다소 길게 함석헌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때 젊은 장준하의 가슴에 함석헌의 존재가 깊숙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해방 뒤 남한에서 장준하가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함석헌을 ‘발굴’하여 글을 쓰도록 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잡지를 통해, 민권운동을 통해 고락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장준하에게 함석헌은 스승이고 동지였다. 함석헌이 아니었다면 <사상계>는 그토록 광휘를 발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함석헌에게 장준하와 <사상계>가 없었다면 유영모 선생과 같이 종교인, 사색인으로 종생하였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성학교 학생 장준하에게 함석헌을 ‘만나게’ 한 것은 역사의 섭리가 아니었겠는가 싶다. 한국현대사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큰 축복이고 희망이 되었다.
주석
11) 장준하 <장준하 문집> 3, 127~1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