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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요 10:7-18)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개를 개라고 부르고,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며 살아왔는데, 시대가 변하여, 이제는 개를 개라 부르지 못하고, 반려견이라고 부르는 시대이고,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반려묘라고 부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모차에는 아기 대신, 반려견이 앉아 있고, 품 안에는 아기 대신 반려견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네길을 걷다가, 옆집 개이든, 모르는 개이든, 가까이 다가오며 발길질하던 시대를 살아왔는데, 이제는 아는 개이든 모르는 개이든, 함부로 발길질했다가는 폭행죄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토끼를 집에서 키웠습니다. 어린 토끼를 위하여, 판자와 철사를 이용하여, 집을 직접 만들고, 학교를 갔다 온 다음에는 들에 나가 풀을 뜯어와, 토끼에게 준 다음, 하염없이, 그 먹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후, 이곳에 왔을 때, 한 아이가 토끼를 잠시 맡아 달라고, 교회에 토끼를 가져온 적이 있었습니다. 토끼를 맡기는 맡았는데, 한 주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도, 찾으려 오지를 않았습니다. 맡아서 돌보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먹이를 구하려, 산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겨울에는 먹이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근방에서 풀을 구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파트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잡초를 뜯거나, 큰 길 건너 산에까지 올라가서, 풀을 구해와, 토끼에게 먹이곤 했습니다.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키우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한 마리의 토끼였지만, 도시 상가에서 키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풀을 조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토끼를 키워본 적이 있었기에, 어떤 풀을 잘 먹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이지만, 그런 풀을 어디 가서 쉽게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료가 아닌 싱싱한 풀을 많이 먹인 탓에, 토끼가 엄청 커 버려서, 먹이를 더 이상 구하고 돌보는 것이 힘들어,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에 가면, 양떼 목장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삼양 식품이 운영하는 삼양 대관령 목장도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해발 1,470m에 위치한 풍력발전기도 볼 수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면, 멀리 바다 쪽을 바라볼 수도 있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들판에 나와 있는 소들을 볼 수 있고,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먹이를 먹고 있는 양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양들에게 먹이를 줄 때 보면, 양들이 생각하는만큼 그리 깨끗하지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양” 하면, 하얀 양을 생각하지만, 털에 온갖 이물질이 묻어있어, 깨끗하지가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넓디넓은 푸른 풀밭에 풀을 뜯어먹는 소와 양떼를 보면, 여유로움과 평안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 양들은 여유와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 그들을 정성껏 돌보는 것일까요?
경북 울진에 가면,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소나무를 공급하기 위하여, 관리하고 있는 소나무 군락지입니다. 그런데, 올해 2월에 내린 폭설로 인하여, 가지가 꺾인 것이 아니라, 많은 금강송들이 아예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고 합니다. 하얗게 변해간 금강송 군락지에서, 먹이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왔던 산양도 눈 속에 갇혀 죽었다고 합니다. 산양은 다리가 짧아, 눈이 많이 오면, 이동이 어려운데,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다가, 눈 속에 갇히게 되었는데, 워낙 많은 눈이 온 탓에, 사람의 구조가 늦어져, 죽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그 산양들을 돌보아 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허기진 배를 안고, 산 밑으로 내려온 산양을 일찍 발견했더라면, 죽어가는 산양을 빨리 구조할 수 있었더라면, 안타까운 일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마음 아픈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시편 121:5-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무 쓸모없어, 길가에 버려진 존재, 갈데도 없어, 여기저기 바람에 휘날리는 존재,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돌봄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밤낮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행복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과 지금 처해있는 우리의 상황을 바라볼 때, 그리 만족스러운 모습은 아닐지라도, “가장 좋은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원망과 불평보다는 감사와 찬양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공급하심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지금껏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은 생애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라고 말씀하셨을 때, 야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텐데,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수 1:5-6)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호수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막강한 적과 싸워야만 하는 그런 상황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강하고 담대함을 주시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6-7)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신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찌할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행할지 보고 싶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야곱은 든든했을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을 것입니다. 어디로든, 정든 고향집을 뒤로 하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을 것입니다. 힘들고 고달픈 인생길이 그의 앞에 놓이게 되겠지만, 그 가는 길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과 같은 튼튼한 성이 있고, 훈련된 군사들이 있는 가나안 땅에, 아무 무장도 갖추지 않고, 아무런 훈련도 없이 들어가야만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하게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 앞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든든한 여리고 성, 그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군사들의 눈초리는 여전히 무서웠겠지만, 여호수아는 아마도 시편 기자처럼,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라고 크게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내일 어떤 일이 있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형들에 의하여 웅덩이에 던져져 다 죽게 된 요셉이 미디안 상인에 의해, 애굽의 보디발에게 팔려가 종살이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애굽의 총리가 될 줄을 더더욱 몰랐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애굽에 내려가, 430년 동안, 핍박과 고통 속에 살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모진 학대 속에, 종살이하는 설움을 달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될 줄을 그 또한 어찌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광야의 생활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여, 농사지으며 살아가게 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이야 했겠지만, 그것이 꿈이 아니라, 정말 현실로 이루어질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모세는 광야 40년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고, 광야로 인도하셨고, 새벽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더위를,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고,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고,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5-7)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주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주 특별합니다. 아주 신비롭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 95:6-7)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어린 시절, 들판에서 양을 치던 다윗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물맷돌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적들과 싸울 때마다,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사울 왕을 피하여, 광야로, 황무지로, 동굴로, 도망치고, 숨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고, 살기 위하여 미친 척하고, 그런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달프고 험난한 인생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간신히 살아남아, 왕이 된 후에도, 평탄하지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생은 이제 끝, 앞으로는 오직 행복만이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녀들간의 싸움과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궐을 버리고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고달픈 인생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 왕의 사위가 되고, 사울 왕을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었지만, 그의 삶은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고된 삶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다. 목자되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다. 현실적으로, 지금 이 자리가 돌멩이가 가득한 험준한 산등선이라고 할지라도, 목자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바로 이곳이, 나에게는 푸른 풀밭이요, 쉴만한 물가이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리요.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내 잔이 차고 넘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매순간 지나온 길목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돌이켜 보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습니다.
돌멩이 가득한 들판에서, 양을 치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그를 인도하셨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와 함께 하셨고, 마침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잘못을 범하고, 더 큰 잘못을 범하였지만, 눈물로 통회자복할 때, 하나님은 그런 다윗도 용서하여 주시고,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심을 생각하면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하여, 양 우리를 뛰쳐 나가버렸습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풀을 뜯어 먹기 위하여, 가서는 아니될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도망자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얍복 나루터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비겁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소외되고 비참한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하는 의심 많은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갈릴리 호수가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길 잃은 어린양같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아주 귀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주는 생명의 떡을 받아먹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둠과 죽음이 아니라, 밝음과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른 새벽, 안개가 가득 낀 것처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데,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우리는 귀를 기울여,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2-3)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의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악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감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고,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의 떡을 먹고, 어둠과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밝게 빛나는 생명과 빛의 세계로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 생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