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휴식하면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게 즐겁다. 그동안 미처 읽지 못한 작품이 쌓여있어 한 권이라도 더 보려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영화에 이어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최근에는 『모비딕』에 빠져있다. 필자가 살아오면서 읽은 책 중에서 소중히 여기는 작품은 러시아가 배출한 걸출한 두 작가의 소설이다. 누구나 적어도 이 두 거장의 작품은 반드시 일독할 것을 권장하고 싶다. 이들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와 「톨스토이(1828~1910)」이다. 두 사람은 타고난 환경이나 여건이 판이하나 러시아를 뛰어넘어 인류 최고의 문학작품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래 전 한 지성인(작가 이병주)이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때 그 사람을, 그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다’라고 단언을 하면서 ‘인생을 살다 보면 언젠가 가보았던 곳으로 다시 한번 가봤으면 하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다시 한번 만났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게 있어 사람이란 내게 감동을 준 책을 쓴 사람들을 말한다’고 하였다. 사실 감동과 교훈을 준 인물과 책은 평생의 친구이며 은인이기도 하다. 그만큼 부지불식 간에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건강, 지위, 명예, 그리고 부를 차지하고 살면서도 인류의 교사로서 자각적으로 고민하고 투쟁하고, 위대한 지도자 또는 탁월한 예술가로서 82세의 나이에 영광의 절정에서 죽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 생전에 냉담했던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은 지 15년 후에 엄숙한 선언을 하였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 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은 남겨두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쨌든 두 작가는 문학으로 온 세계에 러시아의 진수를 전파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얼마 전 「도스토예프스키」에 이어서 오늘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말하고자 한다.
「톨스토이」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모가 일찍 타계한 외에는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34살 무렵에 16세의 「소피야」와 결혼을 했는데 이들은 금슬이 좋았으며 15년 동안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거의 매년 아이를 낳으면서도 「소피야」는 「톨스토이」 곁에서 대하소설인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는 5년 동안 「톨스토이」의 독자가 되기도 하고, 악필이었던 원고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무려 58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엄청난 분량을 일곱 번이나 필사하는 고통스러운 작업도 그녀의 몫이었다. 이 책이 출간되자 『일리아스』를 능가하는 유럽 문학의 최대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어떤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가?’라는 무거운 주제에 답을 구하고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정의한다. 『일리아스』가 영웅의 대서사시라면 『전쟁과 평화』는 민중의 이야기였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장편 소설을 쓴 것이 바로 『안나 카레니나』이다. 「톨스토이」가 187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그의 작품 중 『전쟁과 평화』와 더불어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톨스토이」는 첫 문장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다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로 시작을 한다. 이것을 흔히 『톨스토이 혹은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부른다. 상처를 입은 후라도 노력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은 「키티」와 「레빈」의 가정은 행복해지지만, 욕구만 따르던 화려한 「안나」는 결국 불행을 맞는다. 「톨스토이」는 150여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다양한 삶의 무늬를 보여준다. 그는 관능적이거나 헌신적인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그려냈다.
동시대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일컬어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영미권 작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뽑은 세계 최고의 소설이기도 하다. 역시 러시아에서도 엄청난 칭송을 받았으며, 「레닌」조차도 여러 번 읽었다고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작가로서의 그의 결혼관, 종교관, 인생관, 나아가 세계관까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있다.
이 소설은 부정한 여인에 대한 「톨스토이」의 가혹한 심판이며, 그가 꿈꾸던 이상적인 삶에 대한 희망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19세기 러시아 농업의 현실, 철학, 종교, 사회적 문제, 인간의 각종 심리를 망라하였다. 종교에 대한 생각과 철학적인 질문, 신분제도에 대한 불합리함, 농업 등 아주 많은 주제에 대해 작가가 고민하고 쓴 흔적들을 읽을 수 있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물의 복잡한 내면의 감정과 심리를 매우 섬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1870년대 러시아 사교계의 위선적 면모를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안나」와 「브론스키」 같은 불륜 관계는 당대 러시아 상류층 사이에서는 매우 흔한 것이었다. 실제로 작품 전반부에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저간의 화젯거리로 목도(目睹)하는 일이다. 하기는 체면조차 가리지 않는 상식 이하의 일들이 벌어져도 아예 눈을 감고 외면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결국 「안나」는 「브론스키」를 얻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기 시작한다. 고관의 아내로서 누리고 있던 모든 호사는 사라지고 사교계에서 눈총을 받으며 사랑하는 아들까지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봉착하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브론스키」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젊음과 야망이 있던 「브론스키」에게 그녀의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은 부담이 되고 만다. 욕정의 과오를 범한 이들의 사랑에는 전혀 새로운 변화가 없으며, 성장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안나」는 질투에 중심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에게 분노한다.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집착하면서 질투에 눈이 멀고 심적으로 멀어진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가슴에 쌓인 분노를 연민(憐憫)의 정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파국에 이르게 되는 법이다. 결국 「안나」의 자살은 증오에서 오는 자기학대(自己虐待)였던 것이다. 「안나」의 죽음은 사랑에 대한 결과물이 아니라 주변 세상에 대한 복수, 욕망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결국에 전부라 믿었던 사랑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브론스키」는 충격에 빠져 방황하다가 의용군에 지원하여 『터키』와 싸우는 『세르비아』를 도우러 떠나간다.
사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레빈」과 「키티」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갈등하고 싸우며 의심하고 질투를 하지만 끊임없는 소통으로 기쁨이 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발전과 성장(成長)의 과정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레빈」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톨스토이」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보여준 것이다. 바로 그들의 이야기에는 「톨스토이」 자신과 「소피야」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던 시절의 소소한 기억들이 깃들어 있다.
「레빈」은 끊임없이 주변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 부단히 소통하고 공감을 하면서 성장을 하게 된다. 이 성장을 통해 인간은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레빈」의 원숙한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왜 성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삶도 기쁨도 없다는 작가의 숨은 의도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작가는 「레빈」을 통해 도시의 허위와 농촌 생활의 진정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도시는 불륜과 허위로 가득 찬 공간으로 설정하고, 농촌은 순수한 땀의 가치만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설정하였다. 이는 마치 이후에 도덕주의자로 살아갈 작가 자신의 삶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레빈」의 내적 갈등은 「톨스토이」 자신의 고민이나 다름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톨스토이」 자신이 부인과 차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이로 변하여 결국 집을 뛰쳐나와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 역)』 역사에서 숨을 거두는데 위대한 현자도 극복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바로 부부관계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의 시발점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는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가정을 유지할 것인가? 누구나 선뜻 시원하게 답을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다만 유사한 길을 찾아 부단히 생각하고 노력하는 방법은 가능하리라 본다. 무엇보다도 「톨스토이」가 제시한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노력하고 성장(成長)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도가 있다. 부단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면서 행복함을 느끼고,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을 경청하고 진심 어린 소통으로 공감력을 넓히고, 현실에 충실히 적응하며 선(善)한 마음으로 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나 연인이나 친구, 침대, 식탁, 책장, 목욕탕, 그리고 조그만 텃밭 등에 있는 것이다.
선뜻 부귀와 명예가 답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여유가 있으면 보다 편안하고 순탄하게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현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가정 교육을 통해 진취성, 창의성, 인내심을 두루 훈련한 포용력을 갖춘 인격자로 만드는 것이 첩경(捷徑)이 아닐까?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고 항상 차분하게 문제를 극복하는 슬기와 지혜를 품고 산다면 무엇이 부럽겠는가. 나아가 종교에 귀의하거나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인생 자체가 다 부질없는 것이려니 하면서 초탈하여 살아가는 보통의 삶도 결코 부족한 삶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담담한 태도로 현실에 충실하며 부단히 노력하고 성장하는 생활의 길로 안내하는 책임이 바로 나이든 우리 기성세대에게 있는 것이다.
언젠가 모스크바에서 안내자에게 부탁하여 「톨스토이」가 묻힌 『툴라』의 『야스나야 폴랴냐』를 찾아갔다. 모스크바에서 약 180km 떨어진 곳으로 3시간이 소요되었다. 대문호의 묘소답지 않게 매우 평범한 일자형 묘였는데 높이는 무릎 정도였고, 그 흔한 비석조차 없었다. 어린 시절 뛰놀던 울창한 숲속에 잠들어 있는데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건물에는 생전에 소장했던 가구와 장서가 전시되어 있었고, 드넓은 장원(莊園)과 호수는 옛 모습 그대로 고요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과거 부유하게 살면서 마음껏 드넓은 대지의 품 안에서 인생 그 자체를 만끽하면서 대작을 구상하던 작가의 흔적이 배어 있는 명소였다. 다만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식으로 구경을 한 것이 못내 아쉽다. 사실 언제 다시 갈 수 있겠는가. (2022.8.2. 작성/ 8.8 발표)
※ 최근에 약 1500페이지의 소설을 읽고 소감을 쓴 것입니다. 항상 느끼는 일인데 어쩌면 작가는 한결같이 문장력이 뛰어나고 박식한지 새삼 경탄을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내용이지만 아마도 소감은 각각 다르겠지요.
첫댓글 남당 덕으로 톨스토이를 통해 부부관계를 돌아보게 되는군요. 어느 가정이나 밖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 다 아니죠. 내면에서 일어나는 행복과 즐거움, 갈등과 불행 등이 어울리며 70을 살아 온 것 같습니다. 시간내어 안나를 다시 읽어 봐야겠네요
오랫만입니다 ㅎㅎ 농원을 가꾸는 송백이 마치 레빈이나 톨스토이를 연상시키네요! 훌륭한 삶을 살아오셨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으니 두루 만족하고 살아가십시다~
도스토엡스키, 톨스토이 모두 청년, 초장년 시절 읽었던 것들인데요. 시골의 순진하기만한 촌뜨기의 수준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지요.
이제 누대에 올라 달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살만큼 세상을 살았으니 그런 소설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겠지요?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어요. 우선 남당이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모비 딕'부터요. 이왕이면 원문을 읽고싶어서 아마존에 주문을 했어요.
차후에 '좌와 벌' 그리고 '안나 카네리나'도요~
순우님의 말씀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장년이 넘어 읽으면 그맛이 전혀 색다르지요. 소생도 영어에 밝은 친구가 모비딕을 원서로 읽고 추천을 해주었으나 장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번역본을 본 것입니다. 당연히 원서로 보면 얼마나 좋겠어요? 죄와벌은 영문으로 읽었으나 역시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요~ 주변에 순우님과같은 독서광이 있어 든든합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는 걸어다니는 독서란 말이 있습니다. 독서와 여행을 부지런히 해야 뭔가 하나라도 배우는데, 눈이 침침하고 체력이 딸리니 자꾸 요령만 피우게 되네요. 언젠가 <안나 카네리나>를 영화로 본 적이 있었는데, 남당의 글을 통하여 간접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했네요. 잘 읽었습니다.
1500페이지의 책을 읽었다니요!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엄청난 독서량입니다.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저 유튜브나 이리저리 검색하는 나로서는 경탄 그 자체로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신고합니다! 오늘 이 까페 회원이 된 김진호! 페북에서 갈헌 이동근 선생(제천, 중고와 육사까지 함께 나온 유일한 동기생 문인, 그런데 중고는 한 해 제가 후배인데 육사에서 동기가 되어 감히 맏먹고 있음을 용서받고 있음?)을 통해 여기까지 따라 와서 첫글을 읽었습닌다.
우선 선생의 글쓰기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러시아 문학 전공 교수님 글 같네요! 물론 안나 카레니나 때문에 회원이 되어 제일 먼저 클릭했지요. 고등학교 때 읽고 끝까지 잘 읽고 감동 받았던 책인데, 요즘 사놓고 100여 페이지 읽고 멈추었는데,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톨스토이」가 제시한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노력하고 성장(成長)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도가 있다. 부단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면서 행복함을 느끼고,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을 경청하고 진심 어린 소통으로 공감력을 넓히고, 현실에 충실히 적응하며 선(善)한 마음으로 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나 연인이나 친구, 침대, 식탁, 책장, 목욕탕, 그리고 조그만 텃밭 등에 있는 것이다."
오랫만입니다! 언젠가 최종협 친구를 통해 소식을 들었지요~ 신앙생활에 출중하신 성령을 받아 고도의 지혜와 은총을 베푸신다는 이야기로 기억이 됩니다만! 여하튼 본인의 편협된 주장에 동감해 주시니 감읍할 뿐입니다! 종종 소식을 나누게 되길 바라며 더욱 은혜를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카카오 닉네임이 circuit rider입니다. 그래도 올렸네요. 김진호 신고합니다!
회원의 한 사람으로 환영합니다!
금방이라도 도서관에 뛰어가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나이가 들어서 만나는 안나는 어떨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어쩜 글을 이리 잘 쓰시는지 감탄하며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