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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히브리서 제12강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말씀/히13:1-25
요절/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오늘은 히브리서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시고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의 뒷걸음질치기보다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인내하며 신앙 경주를 감당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경건함과 경외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우리 실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1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먼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해야 할까요? 형제 사랑이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이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히12:28). 우리는 잠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직접 준비하기도 하고 꽃도 선물하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의 힘이 고갈되고 지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금방 한계를 느낍니다. 신앙 안에서 교회 동역자들을 계속 사랑하는 것, 한 영혼을 사랑으로 섬기고 감당하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이고 얌체 같은 동료나 사회성 밥 말아 먹은 무개념의 동료들을 생각할 때면 사랑하려다가도 하기 싫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형제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두 번 섬기기는 쉬워도 계속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랑으로 다가서다가도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냥 정나미가 뚝뚝 떨어집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하지 못하는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고 그 놀라운 사랑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지 점검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용서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때 우리는 아내든, 남편이든, 자녀든, 직장 동료든, 교회 동역자든, 양들이든 형제자매들을 계속해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형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창세기 18, 19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잘 대접함으로 내년에 내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놀라운 복의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을 때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 당시에는 순회 복음 전도자들을 비롯한 이런저런 나그네들이 여관보다는 일반 보통 사람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때 성도들의 형제 사랑이 손님 대접으로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한 번 보고 다시 못 볼 사람일지라도 정성껏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손님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숙식을 제공하며 평안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환대할 때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 말하는 ‘손님 접대’요, 진정한 형제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은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당시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신체가 구속받고 심지어 학대받는 아픔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습하고 춥고 불편한 감옥은 그들에게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심각한 고독과 배고픔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앙적 고뇌와 회의에 휩싸이게 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감옥에 갇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밖에 있는 성도들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밖에 있는 성도들이 감옥에 갇힌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찾아가 위로해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가족까지 보살펴준다면 감옥에 갇힌 성도들은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웁니다.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가운데 학교나 직장에서 믿지 않는 친구나 동료로부터 눈치와 불이익을 받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고통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자녀들로 인해 마음이 타들어 가고 잠 못 이루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일상생활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자신만의 문제로 고통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픔과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며 위로하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외되고 고통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말로도 사랑을 표현하고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어려운 지체들을 돌아보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부부간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금자탑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 간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부부가 살다 보면 잘 안 맞고 싸울 때도 있습니다. 정이 식고 쇼윈도 부부처럼 지낼 때도 있습니다. 자기감정 따라 결혼하고 자기감정이 상해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비혼주의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결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게 별거 있어?” 하면서 결혼을 함부로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힙니다. 결혼이 깨지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음행입니다. 당시 헬라-로마 문화는 오늘날보다 성에 대해 더 개방적이고 음란했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를 거슬러 저자는 단호하게 음행과 간음하지 않도록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성경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부부간에 순결을 지키며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가정을 세워가게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저자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또 다른 권면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통해 땀 흘려 돈을 벌어 자기 삶과 가정을 부양해야 합니다. 혼자 돈 욕심 안 부린다고 돈을 벌지 않아 가족들 굶주리고 손 빨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말씀도 돈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6:10).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형제이지, 돈이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이 처음부터 돈을 사랑하고 돈에 인생 목적을 두고 살지는 않습니다. 그저 먹고 살아가려면 필요하니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매달리다 보면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세상을 판단합니다. 사람이 속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속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씩 돈 욕심을 부리다 보면 돈에 매이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돈의 노예가 됩니다. 사람의 욕심은 심연과도 같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항아리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소유하려는 욕심이 지나친 것이 탐욕이고 탐욕의 척도가 돈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돈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성이 깨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어서도 인색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기보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며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는 이유는 돈이 삶의 안정과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안정과 행복은 돈이 충분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을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이 적을지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또 가진 재물로 족한 줄 알아도 되는 것은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이 말씀은 시편 118편 6절의 인용입니다. 시편 118편은 다윗이 매우 강력한 이방 국가들과 치열한 전쟁을 통해 승리를 거둔 후, 구원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찬양 시입니다. 다윗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고 가는 공포와 전율 속에서 전쟁의 승리가 군대의 칼과 창과 병거의 숫자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확신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치열한 전쟁터에서도 도우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먹고 사는 실생활도 능히 도우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남이 가지 않은 전혀 새로운 길을 처음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 앞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는 지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UBF 모임에도 이런 산 증인들이 많습니다. 또 우리 각자에게 말씀을 가르쳐주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해준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갔는지, 그들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뻐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7). 그들도 하나님을 의지해 살았습니다. 각자 조건과 상황은 달라도 하나님을 의지해 믿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초지일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양들을 뜨겁게 사랑하며 처음 신앙 그대로 한 평생을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도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영적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손양원 목사님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수 애양원에서 일생을 버림받은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분자인 청년을 양자로 받아들여 죽기 직전까지 데리고 다니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겨주었습니다. 그러다 6·25 전쟁 때 공산군에 체포되어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보면 그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한결같은 신앙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들의 한결같은 신앙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에게서 왔습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사람도 변합니다. 인간의 사랑이나 우정도 변합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어제는 사랑스러웠다가도 오늘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고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파멸해가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까지 낮아져 오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사역 내내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과 죄인들을 돌보며 사셨습니다. 마지막은 십자가에 생명을 내주시며 끝까지 동일한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효력도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효력은 언제나 동일하게 강력히 나타납니다. 또 주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재림하실 때도 변하지 않는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구원해주시고 은혜 가운데 신실하게 인도해주신 예수님은 우리도 구원해주시고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이천 년 전에도 그리스도셨고 지금도 그리스도시며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미래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달리는 우리의 신앙 경주 또한 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손님과 이웃을 대접하며 살아야 하고 돈보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 신앙 본질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세상은 강산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과학기술도 급속도로 변해 갑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불변하고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 퇴색되지 않는 신앙 경주를 완주하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저자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짓 가르침들이 많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영지주의는 음식을 절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유대교에서는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을 구별해 먹으면 영혼에 유익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가려 먹는 것과 우리의 구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며 우리 심령을 아름답고 견고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는 구약 시대 짐승 제사로는 인간의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으로 가지고 나가 불사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진영 밖에서 불살라진 구약 시대 제물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 피 흘리며 고난받으신 장소도 성문 밖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입니다. 유대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신 것입니다. 성문 밖은 시체들이 던져지고 범죄자들이 처형당하던 수치와 굴욕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곳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쏟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성문 밖의 십자가를 천추에 빛나는 영원한 생명의 제단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 제단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성도들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사하시며 우리를 영원토록 성결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제단의 피로 거룩하게 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치욕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고 성문 밖의 예수님에게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치욕을 짊어진다는 것은 사회에서의 추방과 소외, 약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를 위해 치욕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이 같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안을 떠나 영문 밖으로 나가자고 권면합니다. 여기, ‘영문’은 ‘진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진영’은 ‘성문 안’과 ‘성문 밖’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안전한 성문 안을 떠나 험난한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것입니까? 성문 안은 예수님이 이루신 속죄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 사회입니다. 이미 역할이 끝난 짐승 제사를 여전히 지내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당시 최강국이던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 사회에서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사랑하는 그곳에는 형제 사랑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죄 사함과 구원이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반면 성문 밖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곳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버려진 땅입니다. 그러나 이 성문 밖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제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 제단에서 우리를 위해 고귀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죄 용서 받고 구원받게 해주셨습니다. 이곳에는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은 성도들 사이에 뜨거운 형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을 통한 사랑과 구원의 복음 역사가 있습니다. 물론 성문 밖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삶의 안정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수치와 조롱을 받으며 때로는 외롭고 고난들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가자고 외칩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나에게 던져지는 조롱과 비웃음을 피하지 말고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캠퍼스에서 전도하다 보면 잘 들어주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 냉대할 때가 많습니다. 직장 내에서도 신자로서 살다 보면 눈치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신 친구나 부모에게서도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거나 뒤에서 욕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가운데 수많은 고난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같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다가 죽는 것이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예루살렘 성은 영구한 도성이 아닙니다. 장차 올 영구한 도성은 성문 밖 예수님의 발자취에 있습니다. 그 영구한 도성, 즉 하나님의 나라는 슬픔도 눈물도 없고 죽음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생명과 빛으로 가득합니다. 성문 밖에서 치욕의 십자가를 지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통해 영구한 도성, 승리의 면류관이 준비된 영광스러운 천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버리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 부인하고,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에게로 향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같은 삶은 예수님이 맞이해주시는 영구한 도성으로 가는 길이기에 신나고 기쁩니다. 그러니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5).” 내게 임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고 전하며 주님의 사랑과 그분의 선하심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서 주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런 찬송의 제사와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알고 실제 자기 것을 나누어 돕는 삶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17). 그들은 우리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자세로 깨어 살피며 말씀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신실하게 영구한 하늘 도성까지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따라 신앙 경주를 하며 치욕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할 수 있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기웃거리거나 십자가 앞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동일하시고 신실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