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유학해서 6년 만에 빈공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그가 격문을 써서 반란의 우두머리인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신라로 돌아와서는 개혁정치에 앞장섰으나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시대를 만나지 못한 천재는 결국 은둔의 길을 택하고 이곳에 들어와서 신선이 된다. 비록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곳곳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으니 결코 허망한 삶은 아니었으리.
농산정을 지나면 숲은 점점 깊어지고 가파른 산길로 이어진다. 가는 곳마다 고운 선생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는 가야 19경이 마치 한 상 잘 차려진 밥상처럼 펼쳐진다. ‘음풍뢰’라 명명된 여울에서는 선생의 낭낭한 풍월 소리가 물소리와 섞여 귀청을 울린다. ‘체필암’에서는 방금 썼는지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붓을 씻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밖에도 시를 읊었다는 ‘완제암’, 빛을 머금은 바람이 춤추는 여울목이란 뜻의 ‘광풍뢰’, 선인이 내려와 피리를 불었다는 ‘취적봉’, 옥을 뿜듯이 폭포수가 쏟아진다는 ‘분옥폭’. 모두 예쁜 이름만큼이나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다.
홍류동 계곡을 흐르는 물은 가야산 치인 골짜기를 훑고 내려가는 가야천이다. 큰길이 나기 전 해인사를 찾는 스님과 신도들이 다녔던 옛길을 복원하여 소리길이라 했다. 길은 내를 따라 때로는 숲 속으로, 때로는 계곡으로 구불구불 돌아가며 끝없이 이어진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돌밭을 지나거나 바위에 막혀 돌아가는 길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도 항상 곧고 평탄한 것만은 아닐 터. 소리길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보행 삼매에 빠져 길을 걷는다. 어느새 걸음은 길상암 적멸보궁 앞에서 멈춘다. 보궁은 산중턱에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등신불을 친견하려면 가파른 계단을 올 라가야 한다. 내려올 때의 무릎 통증이 염려 된다. 그만 포기하고 무심코 옆의 게시판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 보시게!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엇을 걱정하는가? …….”라는 법문이 자석처럼 눈길을 끌어당긴다. 살면서 한번쯤 그런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든 내게도 결코 쉬운 물음이 아니다. 저만치 명진교로 가는 길목에 약사여래부처님과 미륵부처님이 무거운 탑을 이고 나란히 서있다. 그 곳으로 가서 기도하며 응답을 구해 본다. 부처님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미소만 띌 뿐 묵묵부답이다.
우리가 목표한 소리길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다. 치인교로 가는 데크 길을 걷는다. 중간쯤 가자 나뭇가지 하나가 길을 막아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지나가려면 몸을 낮추어야 했다. 그때 ‘하심下心’이라는 글자가 눈앞에 나타난다. 머리를 조심하라는 뜻은 알겠지만, '자연과 함께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부연설명에는 또 다른 숨은 뜻이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연의 위대함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런데도 그 사실을 망각하고 스스로 이 우주의 주인인 양 행동한다. 하심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라는 누군가의 배려가 아닐 런지.
마침내 우리는 종점에 도착한다. 시간은 12시를 조금 넘었다. 치인마을 한 식당에서 사찰음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탁족을 위해 가야천 상류로 간다. 숲 그늘 속으로 흐르는 물은 맑고 찼다. 먼저 온 사람들 사이로 각자 편한 곳에 자리 잡고 물속에 발을 담근다. 동심으로 돌아가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자리를 펴고 누워 노곤함을 달래기도 한다. 온몸이 시원하고 쌓인 피로와 시름이 일시에 가신다. 올 여름 덥다고 요란을 떨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기억들이 아득한 먼 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불현 듯 '네 마음자리가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의 응답이 뇌성처럼 들려온다. 더위와 시름이 가신 것은 탁족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더 커다는 것을 깨닫는다.
홍류동 계곡의 일부만 답사한 여정이었지만, 해인사 소리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삶에 지쳐 누군가의 위안이 필요할 때 다시 와서 넉넉한 그 품에 안기고 싶다.
첫댓글 그날의 감![흥](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57.gif)
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네요.
읽고 나니 몸과 마음이 다 시원합니다.
고마운 마음에 고운선생 입산시를 올립니다.
入山詩
僧乎莫道靑山好 중아, 너 청산 좋다 말하지 말라.
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다면 무슨 일로 다시 나왔노?
試看他日吾踪跡 나중에 나 어찌하는지 두고 봐라.
一入靑山更不還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연담선생님의 수필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같이 걸었던 길들 그리고 그기서 보고 느낌을 편안하게 적어주시어 감사합니다.일박이일의 서천국립생태원 답사기도 함께 선생님의 제2의 수필집 출간을 학수고대 합니다.
올 여름들어 땀을 가장 많이 흘린 날이었지만 산행을 마친 기분은 뿌듯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