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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방."
기표가 바깥에 대고 안서방을 부른다.
"좀 들어오게."
아마 방을 치우라는 말일 것이다. 강모는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오는 안서방과
엇갈려 마당으로 내려서서, 안채로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니 마당 귀
퉁이의 꽃밭을 바라본다. 꽃밭에도 여름은 무성하였다. 자라나는 것들이 더욱 뻗
어가는 자라나고 있는 여름 꽃밭에는 햇빛이 눅진하게 녹아 내리고 있다. 저마
다 빛깔을 내뿜으며 피어 있는 꽃송이가 잎사귀들이 녹아 내리는 햇빛을 양껏
빨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햇빛은 조청처럼 무겁다. 그래서 꽃잎과 잎사귀에는
먼지가 부옇게 앉은 것도 같다. 어찌 보면 식물들이 햇빛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
니라, 햇빛이 끈적이처럼 꽃잎과 잎사귀에 엉겨서 소리 없이 그 진을 빨아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꽃잎의 입술과 대궁이 허옇게 말라들어 미농지로 만든 조화같
이 변한다. ... 나는 한낱 그림자로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
과다고 절감한다. ... 내가 무슨 넋이 있으며, 몸이 있으랴. 또 그런 것들이 있은
들 무엇에 쓰겠느가, 무엇에... . 강모는 가슴 밑바닥이 갈라지는 것 같아 숨을
참는다. 갈라터진 사이에 빠짓이 피가 배어나며 쓰라리다. ... 강실아, 기어이 그
생각을 하고 만다. 아까, 동구에서부터 참아 온 생각이다. 아니, 그것이 어찌 동
구에서부터만 참아 온 것이었을까. 아까 오류골 작은집의 사립문을 지나면서도,
일부러 살구나무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때 무너지게 검
푸른 살구나무의 녹음이 강모의 얼굴에 푸른 그늘을 드리워 주었으나, 강모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었다. ... 네가 없는데, 이제 나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
접시꽃 촉규화, 붉은 작약, 흰 작약, 황적색 꽃잎에 자흑점이 뿌려진 원추리들.
그 현란한 꽃밭 그늘에 꽈리가 몇 그루 모여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등롱 같은 열매를 조롱조롱 푸르게 달고 있다. 지금은 그 꽈리 초롱에 물이 돌
아 초록으로 열려 있지만, 저것은 가을이 되면 익으면서 주홍으로 투명해진다.
그것이 영락없이 등롱의 모양이어서 이름도 등롱초라고 불리던가.
...강실아.
강모는 그만 가슴이 사무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말없이 등불을 잡아 주던
강실이의 모습이 꽈리밭에 그대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2권에 계속)
혼불 2
지은이: 최명희
출판사: 한길사
9 베틀가
인월댁은 드디어 북을 놓는다. 그리고 허리를 편다. 두두둑, 허리에서 잔뼈 부
서지는 소리가 나며 갑자기 전신에 힘이 빠진다. 그네는,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어깨를 힘없이 몇 번 두드려 보다가 허리를 받치고 있는 부테의 끈을 말코에서
벗긴다. 뒷목도 뻣뻣하고 다리도 나무토막처럼 굳어져서 이미 감각이 없는데, 마
치 그네가 베틀에서 내려앉기를 재촉이라도 하려는 듯 닭이 홰를 친다. 벌써 세
홰째 우는 소리가 새벽을 흔든다. 용두머리 위에 놓인 바늘귀만한 등잔불이 닭
이 홰치는소리에 놀라 까무러치더니, 이윽고 다시 빛을 찾는다. 방바닥으로 내려
앉은 인월댁은 그제서야 허릿골이 빠지는 것처럼 저려와 그대로 무너지듯이 드
러누워 버렸다. 불기 없는 바닥이라 등이 서늘하다. 비록 여름이지만, 늘 이렇게
새벽녘이 되면 찬 기운이 돌아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한여름에도 이다지 속
이 치운 걸 보니. 이제 사지 육천 마디마디 시린 바람이 들어차는가 부다.) 그것
은 이 방이 북향 뒷방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까닭에
일년 열두 달 햇빛을 쐬지 못한 냉기가 벽 귀퉁이에 고여 있는 셈이었다. 거기
다가 집이라고 해야 부엌 한 칸과 창호지만한 안방, 그리고 베틀이 있는 뒷방뿐
이었지만 하루 한나절도 손에서 북을 놓지 않았으니, 문득 생각하면 방안에 고
인 냉기가 몸 속으로 스며들어 살이 식어 내리는 것도 같았다. 그네는 희미한
등잔물 아래 비치는 앉칭널을 바라본다. (내가 반평생을 저기 앉아서 보냈구나.)
그네가 금방 벗어 놓은 부테가 앉칭널 위에 얹혀 있는 것이 마치 무슨 허물 같
다. 인월댁은 무심코 창문을 바라본다. 북향으로 난 창문은 아직도 캄캄하다. 지
금쯤은 한밤의 어둠에서 깨어난 새벽이 푸르스름하게 공기 속으로 풀려들고 있
겠지만, 북향 뒷방 길쌈하는 이 방에는 빛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제풀에 흔들리다가 잠잠히 빛을 밝히고 그러다가 금방 꺼질 듯이 잦아드는 미영
씨 기름 등잔 하나만이, 방안의 묵은 어둠을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베틀에 앉
은 채 밤을 새웠으나, 이렇게 방바닥으로 내려와 누워도 몸만 물먹은 솜처럼 무
거울 뿐, 새벽잠이나마 들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그물이 말러서 밑바닥을 뒤집고 있당 거이요?"
담장 밖에서 옹구네의 목소리가 찰지게 들린다. 그 소리를 신호로 사람들의 발
자국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양철 부딪치는 소리며 물지게 삐그덕거
리는 소리, 부산하게 고샅을 지나가는 바쁜 걸음 소리들은 원뜸으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이고매, 그렁게 후딱 가서 미꾸라지 건져 먹는 것은 이 흉년에 괴기국 한 그
륵이 어디냐마는, 일은 참말로 일어났네잉."
저것은 공배네의 목소리이다.
"시상 돌아가는 꼬라질를 조께 보시오. 아, 물 밑바닥만 뒤집히겄소? 내가 발바
닥 붙이고 섰는 이 땅뎅이도 언지 홀까닥 뒤집힐랑가 모르는 판인디, 누가 아
요? 인자 거꾸로 서서 대그빡으로 땅을 짚고 손바닥으로 걸어댕기는 날이 올랑
가?"
거멍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첫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옹배기나 양
철 대야, 물동이, 물통을 하나씩 옆구리에다 끼고 산 밑에 저수지로 달려가고 있
는 것이다. 청호라고 불리는 저수지의 넘치던 물이 어느 날부터인가 마르기 시
작하더니, 기어이 물 밑바닥이 뒤집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수지의 둘레가 사방
오 리라고 소문이 나 있는 청호는 지난번만 하여도, 조개바위의 등허리가 거뭇
비치다가 잠기다가 할 만큼 줄었었다. 청암부인이 웅덩이만 하던 것을 그렇게
넓고 깊게 파 놓은 뒤에는, 웬만한 가뭄에도 수면이 파랗게 찰랑거리며 물비늘
을 일으키던 청호는 날마다 내리쪼이는 뙤약볕에 드디어 견디어 내지를 못하였
다. 청호가 그럴 정도였으니 동네 우물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걸핏하면 황토물을 토하며 뒤집히던 우물물, 샘물들은 이제는 아예 두레박을 두
손에 받치고 섰다가, 한 바가지가 채 고이기도 전에 곤두박질을 치며 거꾸로 머
리를 박고 퍼내야 했다. 그것도 부지런한 사람이 먼저 차지를 하기 때문에, 한
발만 늦으면 그날 하루 물 구경을 못하고 마는 일이 빈번하였다.
"하이고오. 일월성신이 굽어살피사 비나 한 줄금 쏟아져 줍소사."
밑바닥이 마르는 우물가에 물통과 동이를 한 줄로 늘어놓고 관솔불을 밝힌 채
꼬박 밤을 새우며 하늘을 우러러 보건만, 하루살이 모기떼만 극성스럽게 달겨
붙을 뿐, 별빛은 흐려질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은 것이 벌써 근 한 달이 넘어가
고 있었다. 우물과 샘물이 그러한데 논바닥은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논이란 논은
모조리 거북이 등짝처럼 쩌억쩌억 갈라지고, 자라나던 벼포기들은 꺼칠한 모가
지를 허옇게 들고 꼬딱 선채로 말라 비틀어졌다. 사람들이 먹을 물도 이 지경이
된데다가 논의 물꼬가 마른 것은 어느 날짜였는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으니.
"웬수엣녀르 시상. 기양 논바닥에 가서 팍 어푸러져 ㅆ바닥을 박고 죽어 부리제
이 꼴 저 꼴 못 보갔네. 주뎅이에 침도 다 말러 터져서 어디다 뱉어 볼 수도 없
응게. 이러고 앉아서 꼬실라져 죽어야제."하고 옹구네가 두 다리를 퍼벌리고 앉
아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디, 이런 가뭄 속에도 신선맹이로 물 안 먹고 사는 양반은 무슨 재주까잉?
이슬만 따 먹능가아?"
옹구네는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삼베 두루치를 두 손으로 말아 쥐고 평순네에게
말을 건넨다. 먹을 물은 없어도 그네의 살에는 물이 올라 탱탱하다.
"또 먼 소리가 허고 자퍼서 그렁고? 주뎅이가 근지럽제, 시방, 독자갈 아닌 담에
야 누가 물을 안 먹고 산다고 그리여?"
"누구는 누구? 인월마님 말이제. 요새 같은 때 언제 한 번 물 질러 나오도 안허
고 얼굴도 안 뵈잉게 허는 말 아니여?"
"원뜸에서 안서방네가 날마둥 한 동우썩 이어다 주능갑대."
"하이고오, 누구는 좋겄다아, 이런 년의 팔자는 내 손발 오그라지먼 그대로 앉은
뱅이맹이가 되야 갖꼬 디져 불고 말 거인디, 어뜬 사람 팔짜 좋아 그런 시상을
사능고오."
옹구네는 인월댁의 초가 쪽을 향하여 눈까지 흘겨 보인다. 도톰한 눈두덩 꽁지
에 빈정거림이 묻어난다. 평순네는 으레 그런 옹구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응대를 한다면 핀잔을 주게 되었다.
"무신 노무 팔짜가 어디를 봉게로 그렇게도 좋당가? 그 양반 사정을 몰라서 그
런 소리 허능갑네."
"사정을 앙게 더 그러제잉. 나도 인자 요 다음 시상으 날 적으는 기연히 양반으
로 나야겄다. 두 손발 펜안히 내놓고 살어도, 이고 지고 갖다 바치는 것만 받어
먹는 시상 한 번 살어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겄네."
"인월마님이 머 두 손발 놓고 살간디? 이날 펭상 이십 년을 단 한 가지 아무 낙
도 없이 베틀에서 내리오들 못하고, 여치 베쨍이맹이로 베만 짜다 청춘이 다 가
신 양반인디. 무신 부러울 팔짜가 없어 그 양반 팔짜를 쪼사쌓능고...? 무단히."
"하여튼간에 이 복더우 가문 날에 물걱정만 않는 팔짜라도 나는 부러뵈능 것을
어쩔 거이여? 그나저나 저수지 무도 인자 바닥이 뵌다데잉. 조개바우가 집채뎅
이맹이로 시커멓게 솟아났다든디."
이런저런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우물가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며 넋을 놓고 있
던 거멍굴의 아낙네들은, 마침 춘복이가 어둠 속에서, 삼태기에 펄떡펄떡하는 붕
어와 가물치를 무겁게 들고 오는 것을 어젯밤 보았던 것이다.
"춘복아. 너 그거 머이냐?"
공배네가 고개를 꼬아올리며 물었다. 그 바람에 아낙들이 웅긋중긋 일어서며 삼
태기를 넘겨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함박만큼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어디서 난 거이여?"
옹구네의 검은 눈빛이 번쩍, 관솔 불빛에 빛났다.
"방죽으서 건졌네."
"방죽? 청호 말이여?"
평순네가 놀란다.
"거그말고 방죽이 또 있간디요?"
"어쩔라고 거그 치를 이렇게 겁도 없이 건져 온다야? 청암마님 아시먼 큰 베락
날라고, 왜 이런 일을 했당가아..."
평순네의 얼굴에 근심과 두려움이 지나간다.
"난리는 먼 놈의 난리가 난다요? 사램이 날이 날마동 밀지울만 먹고 똥구녁이
찢어지는디다가 날까지 가물어농게 오장육부가 다 말러 비틀어지는 판국에, 임
자 없는 괴기 조께 건져다 먹는다는 누가 무신 소리를 헐 거이여?"
춘복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사람들은 입에 군침이 돈다.
"임자는 왜 임자가 없당가? 청암마님이 임자제잉."
공배네가 얼른 평순네의 말을 거든다. 그러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걱정스러운
일이라는 듯, "춘복아, 청호으 물이 참말로 그렇게 다 말러 부렀냐? 삼태기로 괴
기를 건지게?"하고 물었다.
"방죽 바닥에 물괴기가 기양 막 드글드글 헙디다. 시커매요. 인자 올농사는 다
틀려 부렀다고요. 가망이 없응게, 일찌감치 넘보다 한 발이라도 얼릉 가서 붕어
새기 한 소쿠리라도 후딱 건지능 거이 지일이요. 하늘만 체다봐도 말짱 헛심만
씨이는 일잉게."
춘복이가 삼태기를 추스리자 붕어의 미끄럽고 검은 등허리에 관솔 불빛이 기름
비늘처럼 번뜩였다. 우물가의 아낙네들 눈빛도 따라서 번뜩였다. 옹구네는 춘복
이의 삼태기를 탐욕스럽게 넘겨다보더니, 덥석 손을 넣어 한 마리를 잡아 보려
고 한다.
"왜 이런데요?"
춘복이가 삼태기를 털어낸다.
"하이고오오... 가물치도 있네잉?"
옹구네의 손이 머쓱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간절한 탄식처럼 말꼬리를 뺀다.
그 말꼬리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끈끈하게 묻어났다. 그러나 모른 척하고 춘복
이는 쩔걱쩔걱 발바닥에 물소리를 내며 어둠 속에 잠겨 앞길도 잘 보이지 않는
농막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떠꺼머리 총각으로, 거멍굴 산 비댕이 밭 기슭에 얽
어 놓은 농막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춘복이가 사라지는 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
낙네들은 이미 우물물이 고이거나 말거나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내일 꼭
두새벽, 남보다 먼저 나서서 저수지로 달려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호랭이 물어갈 노무 예펜네들. 저수지 바닥 말르능 거는 걱정도 안 되고, 괴기
건져 먹을 일만 그렇게 신바람이 난당가? 청호으 물이 바닥나먼 그걸로 끝장이
나능 거이여, 끝장."
공배네가 못마땅한 듯 핀잔을 주자
"성님. 우리가 머 언지는 시작이고 끝장이고 딱부러지게 있었간디요? 거멍굴에
엎어져 삼서 무신 햇빛 볼 날이 있다요? 이런 년은 날 때부텀 그거이 아니라 끝
장 아닝교...? 눈구녁에 뵈이먼 먹고, 안 뵈이면 굶고, 닥치는 대로 사능 거이제.
무신 바랠 거이 있능교? 인물이 출중허드라도 청암마님이 될 수가 있소오. 행실
이 음전허다고 인월마님이 될 수가 있소. 생긴 대로 산다고, 나는 타고난 팔짜대
로 살라요. 눈앞에 물괴기 있으면 건져 먹고, 저수지 밑바닥 말르먼 목 태우고
살제 머."
웬일인지 옹구네는 흥이 나 있었다. 고개를 까딱거려가며 무어라고 주워섬기더
니, 물도 긷지 않고 빈 물동이를 옆구리에 끼고는 횅하니 자기네집 쪽으로 가
버렸다. 그 바람에 한 자리를 앞당겨 앉게 된 평순네는 속으로 (지랄허고 자빠졌
네. 먼 ㅅ이 있어서 물도 안 질어 갖꼬 저렇게 궁뎅이를 흔들어댐서 종종걸음을
치능고.)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옹구네가 급하게 일어나서 가느라고 빠뜨리고
간 또아리를 대신 챙겼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다. 사람의 속을 모르는 별의
무리만 쏟아지게 총총하여 공배네와 평순네는 서로 마주보며 한숨을 쉬었다. 별
이 기울면서 졸음이, 매캐한 생쑥 모깃불의 연기에 섞여 덤벼들었다. 어떤 아낙
은 벌써 물통에 얼굴을 묻고 엷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새벽녘이 가까워서
야 한 동이의 흙탕물을 길어 올린 평순네는, 뜨물같이 부우연 머리 속이 흔들거
리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서 동이를 머리에 이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또아리를
옹구네에게 주고 갈까. 내일 날 밝으면 줄까, 궁리하였다. 옹구네는 평순네와 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기 때문에 아무러나 무관한 일이기는 하였다. (이 빼빼
마른 가문 날에도 어디 이슬 맺힐 물끼는 있었등고.) 평순네의 다리에 잡초가 감
기면서 이슬이 느껴진다. (아이고오. 한숨 눈 붙일 새도 없이 날이 새 부리고 말
겄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참말로 이 노릇을 어쩌까잉. 눈에 뵈능 거는 머엇이
든지 한심 천만, 큰일이 나기는 날랑갑다. 난리가 날라먼 산천초목이 몬야안다등
마는. 그나저나 동이 트먼 평순이 아부지라도 일찌감치 원뜸으로 올라가서 괴기
를 좀 건져 와야 할랑가. 그래도, 청호가 청암마님이 쥔이신디, 아무리 캉캄헌
새복에 몰리 건져 온다고는 해도, 그거이 도독질이제 사람 헐 일은 또 아니고잉.
넘들은 다 가서 퍼올랑갑등마는 그나저나 어쩌끄나. 시상에도, 그 강물맹이로 시
퍼렇게 넘실대든 청호으 물이 바닥이 나서 괴기가 구물구물, 손으로 건져지다
니...) 평순네는 이마로 흘러내리는 물을 손으로 씻어 뿌려 버린다. 그네는 막, 옹
구네의 사립문을 지나쳐 가지 집 문간에 들어서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 농막 쪽에서 오는 길이 분명한, 희뜩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아서였다. 그냥 들
어가도 좋았겠지만, 평순네는 그 자리에 서서 이마로 흘러내리는 동잇전의 물을
연신 손으로 훑어 뿌리면서, 눈에 모를 세우고 그림자를 기다린다.
"하이고매. 깜짹이야. 누구당가아?"
평순네는 짐짓 이제 막 사립문간으로 들어서는 시늉을 하다가, 놀랐다는 듯, 다
가온 그림자 쪽으로 화들짝 돌아선다. 그림자는 옹구네였다. 한들거리고 걸어오
던 옹구네는, 느닷없는 사람 소리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순간 머쓱하여
어쩔 줄 모르더니 들고 있던 함지박을 뒤쪽으로 감추려고 한다.
"하앗따아. 물동우만 옆구리에 뀌어 들고, 또아리도 내팽개치고, 무신 볼 일로 그
러고 갔당가? 대가리 벗어지게. 여그 내가 줏어들고 왔그만. 사방에다 그렇게 질
질거리고 댕길 거이 많아서 좋겄네."
평순네는 물동이를 붙들고 있는 두 손을 내리지 않은 채, 허리춤에 묶어 온 또
아리를 옹구네 보고 풀어 가라 한다. 옹구네는 실로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들고
있는 함지박을 땅에 놓지 못하고 주춤거리기만 할 뿐, 선뜻 어쩌지를 못한다.
"아기갸, 얼릉 풀어 가랑게. 나도 후딱 집이 들으가서 밀지울이라도 싯쳐 갖꼬
한 숟구락 먹어야제잉. 왜 이렇게 사람을 문깐에다 촛대같이 세워 논당가아? 그
손에는 머엇 들었간디 그리여? 신주단지맹이로 뫼세 들고는? 으엉?"
평순네는 일부러 급한 소리를 한다. 자기가 속으로 눈치채고 있는 것을 기어이
알아내려고 하는 수작이 분명하였다.
"호랭이 물어갈 노무 예펜네. 무신 목청이 그렇게 때까치맹이로 땍땍거린디야?
지랄허고 자빠졌네. 누가 자개보고 또아리 챙게 돌라고 했능게비. 시기잖은 일은
허고 그려? 그께잇 노무 또아리, 시암 바닥에다 천날 만날 내부러 두먼 누가 가
지가께미, 잘났다고 받들어서 챙게 들고 댕기는고?"
옹구네는 뒤로 감추려던 함지박을 마지못하여 땅에 내려놓으며 한 마디 쏘아붙
인다. 그네는 평순네의 속셈이 어디 있는지를 눈치 못챌 만큼 둔하지는 않다. 이
럴 때는 맞붙어 버리는 것이 상수다.
"어이고오, 호랭이 물어가네에. 똥 뀐 놈이 썽 내드라고, 됩대 꼬깔을 씌우고 있
네잉."
"조께 지달러 봐."
옹구네는 캄캄하여 잘 보이지도 않는 평순네의 허리춤을 더듬어, 허리끈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린 또아리를 풀어낸다. 그러는 사이 평순네는 함지박에서 제법 묵
직한 무게로 자멱질을 하는 물 소리를 들었다. (그러먼 그렇제, 가물치 아니여?)
순간 평순네는 역겨움이 목에 꼬이는 것을 느꼈다. (허고 댕기는 지랄 좀 보라
지) 속으로 콧방귀를 킁, 하고 뀌었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평순네의 눈앞으로
살진 가물치가 도대체 몇 년을 묵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탐스러운 몸채의 배를
커다랗게 뒤집으며 덤벼들었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영험한 물 속에서 배암과 흘
레하여 낳는다는 가물치, 그것은 실제로 방죽 옆의 나무에 기어 올라가, 그 가지
끝에서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퉁, 퉁, 떨어진다는 신묘한 물고기가 아닌가.
깊은 밤 정적 속에서 장단 맞추는 소리처럼 쿠웅, 쿵, 울려오는 난데 없는 소리
를 들으면,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린다지.
"가물치 승천 헐랑갑다."
어른의 팔뚝만큼 한 것이 짙은 암청갈색 검은 빛을 띠는 등허리에 가로 한 줄로
무늬가 놓여 있고, 등 지느러미 양쪽으로는 여덟 개의 무늬가 점점이 박혀 있는
가물치의 저 허연 배, 돌이 지난 얘기보다 더 무겁고 크고 탄탄한 것 그것은, 평
순네에게는 평생에 한 번만 먹어 보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간절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청호의 물 밑바닥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노닐던 가물치
며 조개바위와 더불어 노니는 물고기는, 붕어새끼 한 마리일지라도 다치지 않는
것이, 이십여 년 동안 문중과 인근 사람들 사이에 말없이 지켜져온 불문율이었
다. 그러니 그 속에서 건져온 가물치라면, 산삼 못지않은 보약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가물치. 평순네는 입에 침이 돌았다. 지금까지 평순이를 비롯하여
연년생으로 자식 여섯을 낳는 동안 단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가물치였다. 산
모에게 그렇게 좋다는 것을. 크고 기름진 것은 그만두고라도 새끼 한 마리조차
고아 먹어 보지 못하였다. 그것을 어찌 감히 꿈에라도 언감생심 맛볼 수가 있었
으랴. 풀뿌리를 삶아 먹을망정 굶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하늘에 감사할 일이었
다. 더욱이나 평순이 아버지는 오른쪽 팔이 꼬부라져 붙은 채 쓰지 못하여 헝겊
쪼가리 한가지 아닌가. "가물치여?"
안 물어도 되는 말이었지만, 평순네는 이상한 원한과 아니꼬움, 그리고 역겨움이
뒤섞인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그네는 허리까지 구부리며 함지박 속을 들여다본다.
어는 새 그네의 눈은 함지박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새벽빛이라고는 하지만 아
직은 어두운 속에서 그것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옹구네는 대답 대신, 풀어
낸 또아리 끈을 입에 물고 또아리를 머리에 얹는다. 그리고는 함지박을 불끈 들
어올려 머리에 인다.
"옹구네는 재주도 참말로 좋네잉? 이 밤중에 맨손으로 어디 가서 그렇게 귀헌
가물치를 잡어 온당가아?"
그러자 옹구네가 돌아서려다 말고, 눈을 내리드며 목소리를 차악 낮추어 쏘아
붙인다.
"걱정도 팔짜여잉? 넘이사 어디 가서 무신 짓을 허고 가물치를 집어 오든 말든,
자개가 멋 헐라고 짚고 넘어 선디야? 왜? 어뜨케 잡어 왔으먼 어쩔라고 그리
여?"
"어매? 이 예펜네가 왜 새복부텀 사람을 밀어붙이고 이런데? 무신 짓을 어디 가
서 하고 왔간디, 매급시 언성을 높이고 그리여?"
평순네는 웬일인지 독이 올라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농판인 척하고 옹구네
의 입심을 그저 받아 삼켜 주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까닭을 알 수는 없었지만
밤새도록 샘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동이에 이맛전을 기대고, 졸며 깨며, 흙탕물
한 바가지 받아 이고 돌아오는 다리가 장작개비처럼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오장
과 가슴속까지 바싹 말라 부싯돌을 켜대면 화르르 불길이 일 것만 같다. 그 부
싯돌을 번쩍, 하고 옹구네가 켜댄 셈이었다. 갑자기 세상살이가 귀찮게 여겨지는
것은 또 웬일일까. 물 긷던 동이를 옆구리에 꿰어 차고 통통한 몸뚱이를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옹구네는 지금, 함지박에 가물치 한 마리를, 그것도 틀림
없이 볏단만한 것이 분명한 놈을 채워 들고 호기롭게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편
순네는 흙탕물 한 동이가 고작이었다. 옹구네는 평순네에게 다그친다.
"무신 짓은 무신 지잇? 넘으 상관 말으시고 어서 들으가서 밀지울이나 싯쳐 갖
꼬 한 숟구락 잡술 일이제. 아까막새는 바쁜 소리 혼자 다 허등마는, 왜 가는 사
람을 붙들고 찐드기맹이로 놓들 안하여?"
"하이고오, 오밤중에 어디 가서 가물치를 잡어 올 거이여어? 누가 그 속을 몰르
께미, 넘 밀지울 먹는 것을 약올리고 자빠졌당가?"
"무신 약을 누가 올려? 매급시 지가 몬야 눈꾸녁에다 쌍심지를 돋과 갖꼬 불을
씨고, 지내가는 사람을 불러 세웠잖응게비? 무단히 넘의 것을 넹게다보고 택도
없는 입맛을 다시능 거이 누군디?"
드디어 평순네가 침을 탁, 뱉어 버린다.
"던지러라. 누가 그께잇 노무 가물치, 먹고 자퍼서 환장헌 줄 아능게비. 그거 온
전한 거이 아니라, 농막에 가서 치매 걷고 얻어 온 거인지 내가 머 몰르께미?"
"허엉."
옹구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팽팽하게 약이 오르는 것이 보인다.
"무신 챙견이여? 헐 일도 잔상도 없등갑다. 내 몸땡이 갖꼬 내 밥 벌어서 새끼
랑 먹고 살겄다는디, 누가 왜 나서서 간섭이셔?"
"하앗따야. 자식 생각 한 번 오지게 잘했다. 더러운 노무 거 부정 타서 나 같으
먼 자식한티는 못 맥일 거이다."
"부정을 타도 내가 탈 거잉게, 걱정을 말드라고오."
"늙어감서 그거이 먼 짓이여? 동네 사람 남새시럽게."
"그런 소리 말어. 썩어 죽으면 흙 되는 노무 인생, 수절헌다고 누가 열녀문을 세
워 준다등가? 그것 다 속절없는 짓이라고 나 같은 상년의 팔짜에 과부된 것만도
원퉁헌디, 거그다가 소복 단장하고 그림자맹이로 앉어서 지낼 수도 없는 것을,
무신 수로 뽄 냄서 산당가아? 수절 열녀, 그거 다 양반들이 매급시 뽄 내니라고
그러능 거이여, 머. 내가 무신 인월마님이간디? 누가 나를 멕에 살려준대? 인간
의 한 펭상, 구녁여. 벨 것 있는지 알어? 곰배팔이 영갬이라도 있는 사람은 천방
지축 등불도 없고 질도 없는 이런 년의 팔짜를 귀경험서, 헤기 좋은 말이라고
되나캐나 넘 말헐 재격이 없다고오."
옹구네는 탄식조로 오금을 박아 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핑하니 들어가 버
린다. 보란 듯이 머리에다 함지박을 떠받쳐 이고. 평순네는 기가 차서 한참을 그
대로 서 있다가, 옹구네 마당 쪽으로 길게 눈을 한 번 흘기고는, 그 눈길을 걷어
들여 하늘을 본다. 검푸르게 개는 새벽 하늘에 밤새도록 메말라 물기가 빠진 별
의 무리가 힘없이 깜박인다. 오늘도 비 오시기는 틀렸구나. 식구들은 아직도 깊
은 잠에 빠진 채 부엌에서 나는 물 쏟는 소리에도 깨어나는 기척이 없다. (청호
으 괴기 건지먼 죄로 갈랑가? 아이고, 아서. 그거이 어뜬 물이라고... 신령님이
참말로 홰를 내시먼 어쩌게. 청암마님이 아시먼, 또 가만 두든 안허실 거이고오.)
나 좀 바라, 내가 시방 무신 생각을 허고 있다냐, 평순네는 망설이면서도, 눈앞
에 어른거리는 가물치를 지워 버리지 못하였다. 그때 그네의 귀가 쫑긋 일어섰
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죽이며 담장을 끼고 고샅을 지나가는 소리 때문이었다.
(저 예펜내가?) 순간 평순네는 반사적으로 삼태기를 찾아들고 사립문을 나섰다.
벌써 하늘은 보랏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두컴컴하여 사람의 얼굴
이 얼른 분별되지는 않았다. (한 마리만 고아 먹어도 초벌, 재벌, 세 번, 네 번,
열 번은 고아 먹겄그마는, 저 노무 예펜네, 그걸로는 성이 안 차서 청호까지 지
발로 쫓아가 건져 올랑갑다. 오냐, 너만 먹겄냐? 너 혼자만 홍자 만나겄냐고.) 평
순네는 순간적으로 마음에 까닭 모를 앙심을 품으며 발 끝에 힘을 모으고 고양
이 걸음을 걷는다. 옹구네는 제 뒤를 따라오는 평순네를 본 체도 안한다. 평순네
가 옹구네의 궁둥이를 바짝 뒤쫓고 있는데, 원뜸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네
들 둘만이 아니었다. 걸음걸이만 보아도 얼른 알 수 있는 거멍굴의 사람들이 웅
성웅성 소리를 낮추어 수군거리며, 옆구리에 물통이니 대야니 물동이 같은 것들
을 하나씩 끼고 줄을 지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이 알까 몰래 눈치 보며 한
사람씩 나섰겠지만, 몇 사람이 모여지자 아주 마음 놓고 한 패가 된 것이다. 그
들이 실핏줄까지 말라 버린 도랑을 지나 논배미와 밭머리를 기고 자갈밭이 드러
난 아랫몰 냇물을 건널 때, 매안의 지붕들은 다소곳이 엎드린 채 어둠 속에서
눈을 어슴프레 뜨려 한다. 사람들이 인월댁의 초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 고샅 쪽
으로 난 북향 창문에 젖은 듯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옹구네는 그
불빛에 눈빛이 부딪치자 도톰한 입술을 샐쭉해 보였다. 일부러 평순네 보라는
시늉인 것 같았다. 그러나 평순네는 모른 체하고 걸음을 재게 하여 그네를 앞지
르려 하였다.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허신다는디, 이런 난세에, 내비두어도 물이 없어 말러 죽
어가는 물괴기 조께 건져 먹었다고 설마 호통이야 치겄어? 안 그리여?"
저것은 춘복이 소리다. 평순네는 울컥 억하심정이 치민다. (아무리 그런대도 청
호는 우리 꺼이 아닌디, 거그서 살고 있는 물괴기를 건져다 먹는다먼 도적질이
나 한가지여. 잘허는 짓은 아니라고. 주신다먼 몰르지만... 그래도 어쩔 거이여?
넘들은 다 허는 짓을 나만 발 개고 앉어 있다고 누가 상 주도 안헐 거이고. 아
이고 모르겄다. 덕석말이를 당허먼 모다 같이 당허제 나만 당헐라디야? 그거는
그렇다치고. 아이고메, 저 년놈들은 낯빤대기 두껀 것 좀 바.) 평순네의 마음은
도무지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일은 저 예펜네가 저질렀는디 왜 속은 내 속이 이
렇게 시끄럽다냐. 됩대로 내가 무신 들킬 일이라도 있는 것맹이로, 두근두근,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능가 모리겄네.) 그 시각은 인월댁이 막 베틀에서 내려와 앉은
시각이었다. 인월댁은 고샅을 지나가는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에 마음이 어지러
워진다. 그리고, 어떤 무서운 예감을 느낀다. 논바닥에서 흙먼지가 누렇게 일고,
수숫대 울바자에 올린 호박 덩굴들이 애호박 한 덩이도 제대로 달지 못한 채 잎
사귀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는 날씨는 어째서인지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고.) 처음에는 가뭄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근심은 하지 않았었다. 그
만큼 청호는 크고 넓고 깊었다. 그리고 물 밑바닥에 거대한 몸집을 누이고 있는
조개바위의 영험을 또한 믿었다. 그것은 청암부인이 나이 마흔을 바라보면서 서
른아홉의 몸으로 일으킨 관수 공사가 아니었던가. 순종 임금대 융희 4년, 만 이
태에 걸쳐 공사가 끝난 저수지는, 설마 그렇게까지야 될까마는 둘레가 오 리는
된다고 소문이 났다.
"멩주실 한 꾸리 풀어 갖꼬는 밑바닥으 못 닿겄네잉?"
어느 날인가. 저수지를 구경하러 모여든 사람들 틈에서, 평순네가 파란 물비늘을
일으키며 반짝이는 호면을 보고는 공연히 뿌듯하여 가슴을 뒤로 좌악 젖혔을
때.
"한 꾸리가 머이여? 서너 꾸리라도 들으가겄다. 인자느은 누구든 이물 속에 한
번 풍덩실 빠져 불먼 그것뿐이여. 옛날에맹이로 횃불 밝히고 장정들이 건져내고
그러든 못헐 거이네. 한 많은 시상 등지고 자픈 사람은 원도 없이 죽을 수 있겄
네에."
옹구네가 맞받아 말하였다. 평순네는 옹구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살을 찌푸
렸다. 그것은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놀라운 일로, 인월댁은 젊은
날에 있었던 서러운 사건을 빗대어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저수지 공사가 끝나
던 날, 흥겨운 꽹매기와 천지를 울리는 장구 소리에 그대로 마을이 뒤집힐 것
같았었다. 엄청난 관수 공사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와 즐거움에 잔치가 벌어진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산자락의 흙더미에 깔려 있던 집채 같은 조개바위
의 출현으로 인하여, 마을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저수지
를 넓히느라고 깎아 내던 산자락 밑에는 뜻밖에도 영락없이 조갑지를 엎어 놓은
형국을 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가 묻혀 있었다. 조개 봉우리 높이가 일고여덟 자
남짓이나 되며, 동서로 열다섯 자 네치, 남북으로 열넉 자 두치가 넘어가는, 둥
그스름한 바위의 동산 날맹이 같은 등을 캐내고는, 탄성을 울리며 바라보던 사
람들은 너나없이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며, 온몸에 뜨겁게 돋는 소름을 후
루르, 부둥켜 안았다. 그것은 이상한 감격이었다. 그 순간에 사람들은 이 바위가
이씨 문중과 종가는 물론이거니와 온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저 조개라 하는 것은 물 속
에서 물을 먹고 사는 생물이 아니랴. 물 속에 있어야 목숨을 부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킬 조개가 엉뚱하게도 산기슭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부터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다 그것도 무거운 흙더미에 깔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니. 그 조개는 빈사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나마 눈앞에
바짝 방죽이 보이고 그곳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찰랑거리고 있다면 그 목마르고
애타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몇 백 년 동안. 자연 마음속에 앙심이 솟아 엉뚱한
이씨 문중 대종가의 부인들, 반남박씨, 청주한씨를 비명에 잡아가고, 남양 홍씨
부인을 달아나게 하였다고 수군댔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청암부인의 초립동
이 신랑 준의를 열여섯의 나이에 조세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개가 그렇게 캄
캄한 흙 속에 파묻혀 짓눌린 채 목이 말라 있으니 자손이 번성할 리가 없다고들
하였다. 산 속에 묻히는 것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무덤을 의미하지 않느냐는 것
이다. 그 조개는 용궁의 신령님이라고도 했다. 그 신령님을 이제 종손부 청암부
인이 구해 드렸다. 죽어가던 조개를 살려 내고, 그것도 세세생생 물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넓으나 넓고 깊고 깊은 집까지 마련해 드렸으니, 이보다 더한 공덕이
어디 있으랴. 해원을 해 드린 것이다. 말랐던 조개에 물이 오르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 그리하여 마을 안팎은 물론이요, 몇 십 리 바깥에서도 아들을 낳지 못
하는 여인들이 정성을 드리러 조개바위를 찾아왔다. 그 치성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치성을 드리고 난 떡과 밥, 음식
들은 정갈하게 쪼개서 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신령님도 잡수시고 신령님의 신
하들인 물고기들이 먹으라는 정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렇게나 공을
들이고 정성을 바치던 물 속의 조개바위가 검은 등허리를 내밀어 버린 것이 한
달여 전의 일이다. 그때 인월댁은 안서방이 조심스럽게 전하여 주는 말을 듣고
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농사의 풍흉보다 훨씬 더 깊은 불길함을 그 속에서 느꼈
던 것이다. 하늘받이 매안리에서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으면 물이 마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저수지의 물이 마르니 그 속에 숨었던 조개바위
등허리가 솟아나고, 드디어는 누가 잡지도 않고 몇 십 년씩 신성하게 여겨 온
물고기들도, 물바닥에 새까맣게 몰려 드글드글 뒤재비를 치며 흰 배를 뒤집을
수도 있는 일이리라.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월댁에게는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지. 왜 그랬던고. 나는 마치 무슨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그때
관수 공사를 서둘렀네. 내가 목이 타서, 꼭 무엇에 씌인 사람마냥 저수지를 팠던
게야. 숨이 넘어갔어... 헌데, 이듬해... 막바지로 공사가 치달아 마무리가 되려는
데, 꼭 기다렸다는 듯이, 나라가 망했다, 하지 않는가. 나는 믿을 수가 없었네.
하늘과 땅이 합벽을 하고 맷돌을 갈아, 천지가 캄캄한 일이었지. 그런데 묘한 것
은 그 와중에서도 남모르게 벅찬 희망이 샘솟았다는 것이야. 맷돌질 해 보면,
왜, 우아랫짝이 맞물려 돌면서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지만, 껍질도 벗겨지지
않은 채 통째로 빠져 나오는 놈이 있지 않던가? 신기하지. 꼭 그 통밀이나 통팥,
녹두같이 또글또글 살아서 튀어나온 희망, 그것이 저수지였다. 그때 나는 믿었
네. 우리 조선이 망했다 하지만, 결코 망할 수 없는 기운을 갊아서 여기 우리 매
안이 저수지에다 숨겨 둔 것이라고. 남모르게 그득 채워 재워 놓고 우리를 살려
줄 것이라고. 예사로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다 뜻이 있지. 밖으로
난 숨통을 왜 놈이 막았다면, 한 가닥 소중한 정기는 땅밑으로 흘러서 예 와 고
인 것이라, 나는 확신했었네. 아무한테도 발설한 일은 없었. 인월댁은 원뜸의 청호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고샅을 훑고 지나간 다음에도, 한참 동안을 그렇게 찬 방바닥에 망연히 누워만
있었다. 미영씨 기름 등잔의 빛이 바래어지는 것으로 보아 동이 트고 있는 모양
이었다. 인월댁은 기진한 듯 눈을 감는다. 청호 저수지의 물이 마르다 마르다 못
하여 뻘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선하게 보인다. 내장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허옇고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다리를 걷어 붙이고 소쿠리며 삼태기, 물통에 물
고기를 건지는 모습 또한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뙤약볕이 하얗게 내리
쪼인다. 둥그렇게 드러난 조개방위가 뙤약볕을 받아 불덩어리처럼 달구어진다.
이글거리며 달구어진 조개바위가 타오르면서, 그 불길에 뜨겁게 끓어 넘치는 청
호에 사람들이 와글거린다. 흡사 장바닥 같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쏟아져 나
온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손에 손
에 횃불을 들고 있다. 불빛이 넘실거린다. 횃불이 햇빛을 가리운다. 햇빛이 가리
워지자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관솔불, 횃불들이 어지럽게 쏟아진다. 가슴의 복판
에 쏟아진 불덩이로 꺼멓게 뚫리는 인월댁의 가슴이 써늘하게 식는다. 달도 없
는 깊은 밤이었지. 천지는 무거운 어둠에 쓸리며, 한쪽으로 기울어 무너지고 있
었다. 그날따라 소쩍새는 온 산에서 음울하게 울었다. 그 울음의 울림이 밤바람
을 타고, 번뜩이는 방죽의 수면으로 젖어 내리었다. 봄이 흐드러질 대로 흐드러
져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밤이면 그렇게 목이 갈라져 쉰 소리로 소쩍새는 울었
다. 그 몹쓸 소리. 컴컴하게 핏속으로 잦아드는 소쩍새의 울음 소리에 홀린 듯이
앉아서 해마다 몇 봄을 그렇게 그네는 쓰라리게 넘겼었는지. 내게 아무러면 소
쩍새만한 한이 없으랴. 기미년, 그때 서른 살을 막 넘기었던 그네는 아무 미련도
없이 초가삼간을 나섰다. 그네가 시집이라고 와서 십여 년 동안을 의탁하였던
집이었다. 그 사립문을 지그려 닫고 허청허청 원뜸의 방죽을 향하여 걸어가던
인월댁은 어둠 속에서 초가를 돌아보았다. 집은 마치 벗어 놓고 온는 것 같은 아픔에 가슴을 오그리며 한숨을 토하였다. 결
국, 문중은 종가에 모여 인월댁의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남의 일이라 가끔 궁금
하게 생각하고 염려는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까지는 가지지
못했던 문중 사람들은, 청암부인이 주도한 문중 회의에서도 의견들이 분분하였
다. 그렇게 분분한 의논 중에도 가끔씩 가라앉을 것 같은 침묵이 무겁게 좌중을
짓누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만 청암부인만은 시종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책임을 질 사람도 없이 무조건 이쪽으로 데리고만 오면 무슨 수가 나겠습니까?
차라리 친가에 있는 것이 신간이 편할 겁니다."
그때 생존해 있던 병의는, 데리고 오자는 청암부인의 말에 난색을 보였다. 병의
는 기표의 부친으로 청암부인에게는 시아재였다. 형수인 청암부인은 간곡하게
말했다.
"이미 이씨의 문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번 출가하면 그뿐, 친가에는 더 머
무를 수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쪽에서 오라는 말이 없으면 그곳에서 한평
생을 얹혀 살아야 하는데 그 정경이 오죽 딱합니까? 비록 신방에는 신발 한 번
벗었다 신은 인연밖에는 짓지 못하였으나 그 역시 내외는 내외인지라, 남편의
가문에 와서 생애를 보내야지요. 이곳에 와서 사는 것이야 어찌 살든 흉될 것이
없습니다만, 그쪽 친가에서 산다면 껀껀이 말이 될 것이며, 처신에 괴로움이 많
을 터이고, 죽어도 이곳에 와서 죽어야 도리일 것입니다. 기서 부모님께서 구존
해 계시다면 그 어른들께서 알아 하실 일이나, 지금은 두 분이 계시지 않는 형
편입니다. 문중이 책임을 지고 보살펴 주어야지요. 새댁도 지금이야 나이 젊고
부모님이 계시다지만 미구에 타계하시면, 그 인생이 어디에 몸을 의탁하고 살겠
습니까? 결국 자진을 하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소홀히 하고 있는 동안에
한 인생이 시들어 죽어간다면, 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기서는 이미
돌아오기 어려운 사람이나, 법도대로 새댁을 신행 오게 하십시다. 비록 신랑은
없는 집이라 하나, 이씨의 가문으로 오는 것이 바른 이치일 겝니다. 결정만 내리
면 목수를 불러 초가 한 채를 짓겠습니다. 새댁도 호사할 생각은 없을 것이니,
죄인은 아니로되 누옥에서 근신하며 살자면 때가 오지도 않겠습니까? 어쨌든 이
가문의 사람이라 종가에서 돌보겠습니다."
청암부인의 심정이 너무나도 간곡하여 사람들은 무해무득한 일에 공연히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아랫몰 개울가에 초가를 짓고 홀로 있는 듯 없는 듯 살 것인데,
정경은 딱하겠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게 된 신행이었
다. 물론 잔치도 없었다. 다만 구경꾼들이 울타리같이 두르고 있는 중에 종가의
청암부인에게만 시부모님께 올리는 구고례를 대신하여 절을 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랫몰 개울가 초가집에 들어서, 토방 아래 마당에도 나서지 않을 만큼
방안에서만 숨어 살다시피 하던 만 십이 년의 세월. 그것을 어찌 말도 다할 수
있으랴. 십삼 년째 되던 해, 봄 소쩍새가 그렇게도 울음을 토하던 밤. 그네는 방
죽에 몸을 던졌다. 울다 울다가 제 목에서 피를 토한다는 새, 토한 피를 다시 삼
키며 무슨 서러운 일, 무슨 한 많은 일로 제 속에 피멍이 들게 간직한 원통한
일로, 한세상을 밤이면 울다가 죽어 가는 새. 인월댁은 방죽의 수면 위로 번득이
며 파고들어 울려 오던, 그 낮고 목 쉰 울음 소리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었다. 내
가 죽으면 그 넋은 무엇이 되랴. 그때 여우가 빈 어둠을 향하여 길게 울었던 것
도 같았다. 그네의 귀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차가운 물 소리뿐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방으로 건져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신이 물에 젖어 혼곤
하게 눈을 떴을 때, 인월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똥이 떨어지고 있는 횃불의
무리였다. 횃불들은 허공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지럽게 웃으
며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하늘이 불붙으며 쏟아져 내렸다. 그 불덩어리 하나가
가슴에 떨어지면서, 그네는 다시 정신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 얼마 동안이
나 그렇게 길고 긴 혼수에 빠져 있었던가. 그네가 깨어났을 때, 북향의 뒷방에는
청암부인이 보낸 베틀이 그네의 정신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인월댁
을 위하여 각별히 새로 맞추어 만든 베틀이었다.
"한꺼번에 다 살려고 하지 말게나. 두고두고 살아도 꾸리로 남는 것이 설움인데,
원수 갚듯이, 그렇게 단숨에 갚아 버릴 생각일랑 허지 말어... 그런다고 갚아지는
것도 아니니."
청암부인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한참씩 쉬어가며 숨소리로 말했었다. 인월댁
은 아직도 얼굴빛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푸르게 질린 채 듣고만 있었다. 그
말소리와 숨소리 사이에 복숭아 꽃잎이 지는 소리가 들리었던가, 아니었던가. 그
날로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인월댁은 베틀에 앉아 살아 왔다. 동무
라면 오로지 속으로 나직이 흥얼거리는 베틀가 한 자락.
천상에 놀던 각시가 세상으로 귀양을 왔더라오 배운단 게 질쌈이요 부르나니 베
틀가라 명주 한 필 짜을라니 베틀 놀 데가 전혀 없어 좌우 한편 둘러보니 옥난
간이 비었구나 베틀 놓세 베틀 놓세 옥난간에 베틀 놓세 낮에 짜면 일광단 밤에
짜면 월광단 옥난간에다 베틀 놓고 베틀 몸을 동여매어 베틀 다리는 네 다리요
앞다릴랑 두 다릴랑 동에 동창 배겨 놓고 뒷다릴랑 두 다릴랑 남에 남창 맞쳐
놓고 앉을개라 돋우 놓고 그 우에가 앉은 각시 허리 부테 두른 양은 절로 생긴
산지슭에 허리 안개 두른 것고 북 나드는 저 기상은 피징강도 건넌 기상 대동강
도 건넌 기상 용두머리 우는 양은 조그마한 외기러기 벗을 잃고 슬피 우네 황새
같은 도투마리 청룡이 여의주를 다투난가 달을 따서 안을 삼고 해를 따서 거죽
을 삼고 삼태성의 끈을 달아 무지개로 선을 둘러 금자를 갖다 대어 옥자로 재어
보니 서른 대자로오구나 청태산 구름 속에 만학이 넘노난 듯 옥색 물을 반만 놓
아 서울 가신 서방님 청도포라 지어 보세 옷이라도 지어 보세
누가 올리도 없고 달리 갈 데도 없는 세월이, 베틀에 짜여지는 무명필처럼 흘러
갔다. 다만 인월댁이 남의 눈을 피하여 청암부인에게 다녀온 몇 번을 제하고는,
그 긴 세월 동안 집을 비운 일이라고는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원
뜸의 종가에서 안서방 내외가 번갈아 심부름을 내려오는 것이 손님의전부라고나
할까. 그네는 그림자처럼 홀로 살아왔다. 인월댁의 길쌈 솜씨는 드다지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동틀 무렵부터 해질녘까지, 꼬박 앉아서 하루 열 자를 짜기도 하
였으나, 매달이어 억세게 일을 하지는 않았다. (내 할 일이 이것뿐인 것이라 ...
그저 ... 벗 삼아서...) 그네는 때때로 잉앗대에 이마를 대고 베틀에 엎드려 울었
다. 멍울멍울 떨어지는 눈물은 무명의 올 사이로 스며들어 실을 젖게 하였다. 실
은 살이었다. 그리고 용두머리 위에 기름등잔을 밝혀 얹어 놓고, 밤을 새워 베를
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을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그네가 잘 못 이루며
길쌈하는 소리는 덜컥, 덜컥, 밤의 가슴에 얹히곤 하였다. 그럴 때 차갑게 귀를
적시며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는 얼마나 시리었던가. 차마 베틀에도 앉지 못한
채, 가슴을 오그려 우는 밤도 있었다. 명주실낱 같은 핏줄 하나하나가 땡기어 그
대로 터져 나갈 것만 같은 설움에 목이 메어 홀로 우는 밤이면, 각시복숭아 꽃
잎이 개울에 날려 떨어지는 소리까지라도 역력히 들리었다. 무섭게 적막한 밤이
었다.
"부질없는 것들같이 보일지라도 무엇에다 마음을 묶어 두면 의지가 되느니. 바늘
쌈지 부지깽이 하나라도 애중히 아껴 보면 어떻겠는가. 한 세상이라는 것이 허
허벌판 위태로운 바람닫이인 것을, 바람벽도 없이 어디에 마음을 가리우고 살
것인고."
청암부인은 인월댁에게 그렇게 간곡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인월댁은 길쌈한
것으로 논이나 밭을 사지는 않았다. 그네 앞으로 단 한 마지기의 논이나 하루갈
이의 밭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다른 치장을 할 리도 없었다. 다만
그네는 겨우 연명할 곡식과 몇 가지의 일용품을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일
은 장날이면 안서방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충직하게 맡아서 해 주었다. 인월댁
은 늘 그렇게 생각하였다. (논 사고 밭을 사면 무얼 하겠는가. 그것도 애착의 끈
이 된다. 내 무엇을 위하여 흙덩어리에다 마음을 묶어 두리오. 내 마음 하나도
나한테 묶여 있는 것이 짐스럽고 무거운 것을... 삼간 초가에 이 한 몸 의탁하고
있다가, 때 되면 툇마루에서 일어나 길 떠나가면 그뿐이라. 무엇에든지 나를 묶
어 두면, 떠나는 발걸음이 또 얼마나 무거우리.)
그런 인월댁의 생각에 청암부인은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깊이 고개만 끄덕
이었다. 인월댁은 인월댁대로 그러한 청암부인의 모습에서 풍우를 가려 주는 지
붕을 느끼었다. 그런데 지금 청암부인은, 이미 며칠째 혼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부인의 연세는 올해 일흔. 고희에 이르렀다. 인생칠십고래희라, 해서 사람의 나
이 일흔은 예로 부터 드문 일이니. 일흔 살이 되는 생일에는 환갑 때보다 더 융
숭히 차려 큰 잔치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경우에도 물론이겠지만, 청암부인
의 고희연이라면 가히 그 정성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을 뻔했으나. 이기채의
간곡한 소청에도 부인이 끝내 허락 아니하여서, 내놓고는 준비하지 못하던 중,
팔월 열나흗날, 그러니까 추석 하루 전날이 생신이라. 율촌댁이 알게 모르게 마
음쓰고 있는데, 그 눈치를 못 챌 리 없는 청암부인이 아들 내외를 불렀다. 그리
고 준절히 나무랐다.
"시절이 이와 같아, 나라를 잃은 것도 분하지마는, 그 통한을 지금에 비하겠느냐.
나는 일개 아녀자라 큰일은 모른다. 다만 내 앞에 주어진 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나라 이름 앞세운 것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내 힘을 다 하려 했다. 만일
에 결과가 불미스럽거나 미흡했다면 이는 내 능력이 모자라 할 수 없었을 뿐.
내 뜻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헌데 오늘, 이 가문의 성씨를 바꾸어 왜놈의 이
름으로 갈아야 한다는데, 창씨개명을 내 손으로 해야 하는 마당에, 내가 무슨 염
치로 낯을 들고 앉아서 고희 상을 받는단 말이냐. 조상님께 사죄하고 스사로 목
숨을 끊어도 부족하리라. 내 일찍이 너희 아버님 조세하신 것이 늘 애통하여, 세
상의 온갖 목숨이 다 아름다워 보이고, 곰배팔이 째보도 살아만 있다면 귀해 보
였다만. 이제 와 이런 참혹지경을 당하니, 일찍 죽지 못한 것이 오직 한스러울
뿐이로다. 내가 오래 살아 이런 전고에 없는 욕을 당하는 것이야. 너희가 나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고희라고 물 한 그릇도 떠 놓지 말아라."
그리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큰집에 좀 올라가 봐야겠다. 오늘은 차도가 있으신
가) 인월댁은 찬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리고 아직도 빛을 밝히고 있
는 등잔불을 불어 끈다. (저렇게 사람들이 청호로 몰려가서, 공들이던 고기들을
손으로 거머잡고, 저수지 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다면 종가의 운수가 ...)
마음이 허방으로 떨어진다. 그네는 서둘러 매무시를 고친다. 이만큼 날이 밝았으
면 청암부인을 찾아뵙는 것도 이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인월댁은
아까부터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애가 탔었던가 보다. 여자가 식전 손님이
될 수는 없는 탓이리라. 그네가 막 방문을 열고 나오자, 햇살이 실린 감나무 가
지 위에서 까치가 까악 까악 운다. 지금까지의 인월댁은 아무리 아침 까치가 울
어도 마음이 설레지 않았었다. 설렐 일이 없는 것이다. 기다릴 소식도 없었다.
그리고 까치에게라도 걸어 보고 싶은 아무 소망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까치 둥
우리를 한 번 울려다보면 그뿐이었다. 그럴 때 까치는 검은 감나무 가지 꼭대기
에서 까악 까악, 눈부시게 아침 햇살을 토해 내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달랐다. 저수지로 몰려가던 거멍굴 사람들의 어수선한 발소리와 양철 대야 물통,
물지게 소리를 몰아내 주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월댁은 까치 소리를 깊
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뻘밭이 되어 버린 저수지 밑바닥과 뒤재비를 치는 가물
치, 뱀장어, 큰 붕어들의 검은 몸부림, 그것들을 삼태기로 건져 내는 사람들의
손, 덩그렇게 드러나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는 조개바위들이 한꺼번에 청암부인
에게로 달려들어, 덮어 누르는 것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털었
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까치 소리를 마셨다.
10 무심한 어미, 이제야 두어 자 적는다
여아봉견 거 이십일일은 날도 청명하엿다. 매안역을 출발하야 순천서 일숙하
고 이십이일 오전 십시 득량착 기차로 무사히 집에 도라왓다. 그런데 너의 모친
과 남욱이는 무탈한데 용원이가 이십일부터 알키 시작하엿다는데 그 형상이 대
단 안탁갑게 되엿다. 곳 의사의게 왕진을 청하여 진찰하니 신열이 사삽오도이며
급성폐렴에 늑막염이 겸하였다 한다. 겁이 안 날 수 업서 백방으로 치료하여 십
일일 만에 어제부터 게우 사십도가 넘든 열도 나리고 차차 미음도 마시고 잠도
자기 시작한다. 한참 동안은 대소가가 소동되고 정신이 수수하엿난데 이제는 안
심이다. 조금이라도 걱정은 하지 말어라. 요사이 너의 시조모주 기력은 엇더하시
냐. 좀 차도가 잇스시냐. 궁금하구나. 요사이 용원이 약하려 노동 의원이 오섯난
데 노환에 조흔 약을 좀 지엇기로 조생원 편에 보낸다. 지극 정성으로 다려 드
려라. 그리고 너의 성질을 잘 아는 바이나 매사 승순하면 탈이 업스리로다. 일기
화창하면 한 번 갈가 한다. 남욱이는 날로 충실하게 자라고 잇스니 걱정 말고
너의 몸을 주의하여라. 일자가 너무 오래되어 네가 답답할가 하여 두어 자 소식
을 전한다. 일후에 너의 모주도 편지할 것이다. 대소 층절이 일안하시길 빌며 이
만 긋치니 너는 속히 소식을 통하여라. - 기묘 음삼월 이일 부서
효원은 아버지 허담의 편지를 손에 들고 글씨를 가만히 만져 본다. 글씨에서 아
버지의 체온이 묻어난다. 가늘고 선명한 주색 붉은 줄이 세로 그어진 편찰지 칸
에 잉크를 찍어 쓴 글씨였으나, 서법과 필체가 여전히 예 같고 역력해, 마치 아
버지의 숨결을 마시는 것만 같다.
일전 조생원 편에 네 소식을 들엇스며 또 너의 수서로 대략 알고 잇섯스나. 네
가 조생원 편 구전으로 용원 병기를 들엇스면 얼마나 놀라 상심하엿슬가. 용원
이는 지난 번 병치레 끝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이번 음유월 이십일경부터
우연 목이 앞으기 시작하여 낫지 안 터니, 할 수 없이 음칠월 이십일에 광주도
립의원에 입원하여 그날 오후 구시에 수술한 후 인공호흡하여 차차 치료하니 칠
월 이십오일에는 완치되어 이날에 퇴원하여 귀가 하였다. 입원한 지 누 이십일
간에 칠백원의 경비를 내엿스나 의사의 말에 딸 하나 병원에서 어더가지고 간다
고까지 말하엿스니 병세가 엇더하다는 것은 알 수 잇슬 것이다. 병명은 지유데
리(디프테리아)라는 것이엿는데 호흡이 불통되어 못 사는 것인데 수술하기 전
삼십분만 경과하엿스면 곤란하다고 의사로서는 일희일비를 마지안엇섯다. 불행
중 대행인 것은 그 가운데 추석은 집에서 맞은 점이다. 보름달을 갓치 보았다.
그러니 이 앞으로는 안심하고 일신을 보전하여라. 남욱이도 습종으로 불안하나
약치를 하고 잇스니 요사이는 좀 나은 듯하다. 이외에는 별다른 말 없스니 다음
에 자상히 통신하겟다. -음팔월 이십일 부서
추신. 너의 시조모주께서는 여전 그만하시다니 일변 다행이고 일변 근심이다. 이
럴 때일수록 성심을 다하여 손부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바란다.
매안에 거짓말인 듯, 꿈결인 듯, 아버지 허담이 들리어 며칠간 사랑에 유하다 간
것은 작년 봄, 음이월 말이었다. 부녀 상봉이라고는 하나, 허담은 사랑에 머물며
이기채와 함께 이씨 문중 대소가 종족들을 만나면서, 담소로 인사하는 데 거의
모든 일과가 다 지나고 막상 효원과는 마주앉을 겨를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하였
다. 그러나 그것이 법도였다. 시가에 어른들 엄존하신데, 저의 친정에서 살붙이
가 왔다 하여 버선발로 뛰어나간다거나, 그 곁에 붙어앉아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은 몰풍스럽고 본데 없는 짓이었다. 벙싯거리며 반가움을 참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범상한 낯빛으로 은근히 교감하고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비
켜 서서 친정붙이를 대하며, 시댁에 자신이 잘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드리
는 것이 도리였다. 둘이서 낮은 소리로 속삭이거나, 남모르게 무엇을 주고받으
며, 눈물을 짓는 것은 결코 가격있는 집안의 풍도가 아니었다. 지그시 가슴을 누
르고, 가까운 곳에 와 계시는 밧어버이 훈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 일상에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는 위선이 아니라 품위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
돈댁을 방문한 친정 쪽에서도 출가한 여식을 대하여 지켜야 할 은연중의 불문율
이었다. 하지만, 심정도 그러했으랴. 효원은 돌덩어리를 삼키듯, 복받치는 반가움
과 설울을 함께 삼켰다. 늦도록까지 불이 밝혀진 사람에서 두런두런 홍연대소가
터지는 밤. 효원은 이만큼에 서서 남모르게 그 덧문에 번지는 불빛을 바라보며,
어느 그림자가 우리 아버지신고. 헤아려 보았다. 다만, 그렇게. 허담이 떠나는
날, 효원은 큰사랑에 좌정하신 아버지께 마루에서 하직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는
은혜로이 높으시니, 여식은 문외배로 방문 밖에 엎드리어 공례로 큰절을 하는
것이다. 허담은 묵묵히, 수그린 여식의 노란 저고리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대문을 나서며 말했다.
"삼가 공경을 다해서 조석으로 어른들 지성껏 모시고, 이서방 잘 섬겨라. 아부지
간다."
효원은 눈물어린 고개를 수굿하였다. 말씀을 잘 알겠다는 표시다. 정거장으로 가
는 먼 길까지 고불고불 한눈에 들어오는 대문간에 서서, 허담은 잠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세상에 제일 큰 것은 마음이다. 마음 안에는 담지 못할 것이 없느니."
효원의 고개가 좀더 숙이어졌다.
"항상 부지런하고, 너의 규문의 예에 어긋나지 말아라."
"... 예"
"들어가거라."
"예..."
허담은 시선을 멀리 들어 아물아물한 길 끝 너머를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한테는, 잘 있더라고 전할 터이니 그리 알고."
효원은 목이 막혀 대답을 못한다. 잘 있지 못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차마 여
쭙지는 못하옵지요만, 이 불효여식은 아직까지 음양을 모르고, 부부의 도리를 다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신랑이 어리어 초립동이 소년이라 그러한가 하옵고,
다음에는 학업이 중하여 객지타관 전주로 유학을 하느라고, 집을 떠나 멀리 있
어 그러하옵고, 혹 어쩌자 집에 들러도 시어르신 뫼시고 사랑에 머무온즉, 여식
은 빈방에 청 등을 홀로 지키고 있사오니, 병자년에 혼인하여 정축에 신행 오고,
무인,기묘 다 지나서 경진년에 이르도록 아직 공규를 면치 못, 하릴없는 세월만
축내고 있습니다. 아무 생산 없는 세월은 쌓여서 무엇에 쓰오리까. 손이 귀한 남
의 집 대종가에 종손부로 들어와서, 책임이 막중한 무릎에 좀이 슬고 먼지만 가
득하니, 슬하의 근심을 어디에 하소하올지. 시조모님 뵈옵기 민망하고 면구스러
워 삿갓을 쓰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머니. 한 여인으로서 이 수모를 어찌 당하
며, 어찌 갚으리잇가. 눈물이 굳어서 돌덩이 되었단 말 들은 일은 없으나, 이 마
음은 돌보다 더 굳어 풀리기가 어려우니. 이 돌로는 또 인생에 무엇을 하오리요.
성벽을 쌓으리잇가.
"자, 이제 들어가거라."
허담이 효원에게 눈빛을 남긴다. 대문간에 저만큼 고샅길로 내려선 이기채가 기
표, 기응과 함께 몇몇 안면들을 대하며, 허담을 배웅하려고 나와 있다. 그만큼까
지 나가 있는 것은 부녀 작별의 말미를 잠시 주고자 하는 배려이다. 이제, 언제
나 다시 뵈올꼬. 근친이나 한 번 간다면 모르지만. 그날이 쉽게 올 것 같지는 않
았다. 효원의 뇌리로 나부산 형님이 근친 오던 날이 번개처럼 스친다. 그네가 나
이 아직 어려서 철 모를 때 본 정경이었지만, 하도 기이하여 잊히지 않았던 것
이다. 마을 뒷산이 나비머리 모양이라 동네 이름도 그러한가, 나부산으로 시집간
재종매가 대실 천정 부모님께 처음 근친을 온 것은, 출가한 지 사 년인가 오 년
인가 지난 다음이었다고 한다. 그때 재종매는 젖먹이 아이를 하나 안고 왔는데,
안에서 비자가 나와 아이만 안고 들어갔다. 그리고 나부산형님은 개구멍으로 들
어갔다. 시부모 상을 당하였거나 시댁에 우환이 있어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닌데,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어버이를 뵙는 근친을 신행 후 삼년 안에 못하면, 그
다음에도 가도, 버젓이 대문으론 못 들어가고 개구멍으로 기어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법이라 했다. 왜 그리했을까. 사람 못났다는 나무람일까. 괘씸하다는 꾸중
일까. 야속하고 매정한 시댁에 대한 무언의 응징일까. 금의 환향을 해도 시집간
딸은 바라보기 애처로운데, 굳이 이처럼 홀대하여 우세 망신을 주는 심정인들
오죽하리야. 이러한 시속을 아는 까닭에 시댁에서도 어지간만 하면 삼 년 안에
며느리 근친을 보내 주는 것이 상정이었다. 그러나 죄 많은 세상에 여자로 난
것이 또 하나 죄라서, 한 번 시집가고 나 끝내 친정에는 못 오고 만 사람도 있
었다. 개구멍을 기어 나가느라고 흙투성이가 된 나부산형님이 친정어버이께 절
을 하면서, 온 식구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는 말도 있고, 폭소 끝에 목을 놓아
울었다는 말도 있었으나. 지금 와 생각하니, 그 둘 다 맞는 말 같았다. 어떤 마
을에서는 개구멍 입납을 시집간 햇수로 세어 삼 녀이라 하고 어떤 마을에서는
햇수와 상관없이 첫아이 낳도록까지 안 오는 경우에 행한다고도 하지만. 어무러
나 두 세월 모두 짧다고야 어이 하리. 눈이 짓무를 시간인 것이다. 효원은, 내가
언제 매안으로 왔던가, 헤아려 본다. 그리고는, (나도 이미 대문으로 들어가기는
틀렸구나.) 고개를 젓는다.
"매안이 작별이 본대 길어서 아마 오늘 해 지기 전에 정거장까지 닿기는 어려우
실 겝니다. 아예 천천히 이약 이약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별사가 섭섭잖게 나
누고 가시지요."
기표가 농을 섞어 말했다. 그러나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다 정 깊은 일이지요. 그래서 귀문에 예부터 체리암이 있지 않겠습니까?"
허담의 응대에 기표가 호오, 놀란다.
"체리암을 알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체리암은, 동구밖에서 한참 오 리 바깥으로 나간 길목에, 큰 내를 낀 갈림길 어
귀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바위다. 매안 이씨 문중에 손님이 왔을 때, 헤어지기
몹시 서운하여 떠나는 길의 발걸음 동무를 하면서 따라 걷다가, 차마 떨치기 어
려운 소맷자락을 아쉽게 서로 놓고
"자, 이제는 여기서 헤어지자."고 명표를 해 놓은 이 바위 글씨는 매안 이문 몇
대조 할아버님께서 몸소 쓰시어 음각한 것이라 하였는데. 머물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떠나는 바위. 이 은근하고 그윽한 바위까지 효원은 아직껏 한 번도 나가
본 일이 없으나, 대문간에 선 채로 흰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 펄럭, 검음을 따라
나부끼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날은 날씨도 ...
청명하였다. 그 아버지가, 매안역을 출발하여 순천에서 하룻밤 자고, 아튿날 대
실이 있는 득량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 음력 삼월 초이틀.
그리고 다시, 소식 없는 효원에게 두 번째 서한을 띄운 것은 팔월 스무날이었다.
그 사이에 반 년이나 흘렀건만 효원은 일자 서신을 감히 올리지 못하고, 날마다
속으로 먹만 갈았다. 효원은 벼루에 붓을 적시려다 말고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진정하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 시집와서 한 번의 문안서도
올리지 못한 까닭은 단순히 인편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힘주어 버티고 있는
어깨의 천근 같은 무게가 손끝으로 쏟아지면, 결국 그것이 오히려 더욱 큰 불효
인 것을 그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네는 탄식이 두려웠다. 검은 벼루 시꺼먼
먹물보다 더 짙은 한숨을 밀어내며, 효원은 아우 요원의 봉서를 펼친다. 여린 듯
부드럽고 애처러운 글씨체가 아직 병중인 기색을 머금고 있어, 울컥 눈물이 솟
는다. 아아, 내 동기간. 간절 사념 나의 형님은 무용제의 필적을 받으쇼서. 우리
형님 옥음을 언제 드럿든고. 수십 년 수백 년이나 되온 듯 기억에도 아득하고
지체없는 세월은 머나먼 곳으로 달리는지 발셔 기묘를 지나 경진 ㅈ춘이라. 가
물거리는 아즈랑이는 만ㅊ청산의 너울이 되고 진달래 봉오리가 오는 봄을 재촉
난대 이 수심 많은 아녀의 심리를 울울케 하오며 일우우일우하니 시드는 고목에
ㄸ봉오리가 구슬 갓고 빳빳 마른 잔디 우에 새 움이 동아 금수강산이 형형색색
으로 아름다온데, 그간이라도 우리 형님 기체후여전 만안하시온지요. 이곳은 아
버지 기체후 강녕하시옵고 어머니께서도 여일하시오나 아버지께서는 몃 가지 집
안일로 분망하시오며, 거번에도 기곳 행차하려 하셨사오나, 이제는 단 십 리만
왕래하셔도 기력이 부치시니 하정에 뵈옵기 죄송만만, 작추지사를 생각하면 심
장이 탈 지경이나 뉘라서 일호인들 아라 주리요. 이 쓸모업는 아우 뜻박게 병을
얻어 목을 찢고 구멍을 뚤어 대수술을 하온 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과 가산
을 만금이나 탕진하여, 아버님 그 일로 십년은 쇠하시고, 문서와 곳간이 남의 것
이 되오니, 이 사제의 찌저지는 설움을 뉘기다려 말 한 마디나 할까. 입술이 마
르고 심장이 타는 이 속을 그 뉘라 일 분인들 아라 주오며 뉘게다 반 분인들 호
소하올까요. 쓸 곳 업는 이 인생, 무엇하러 차세에 탄생하여 이러케 자랏는고.
분분하고 원통절통. 젼생에 뉘게다 척을 지어 이 세상에 태였든가. 피어나는 한
시절에 설빙을 뿌려노니, 무쇠라서 견듸오며 철석이라 견듸리요. 부귀영화로 한
없이 살아도, 초로인생이니 부유인생이니 하난대 이 갓탄 인생이야 무엇에나 비
하리오. 삼경 월색 명백하야 남창에 가득하고 고요이 들려오는 귀촉도 ㅅ은 소
리 깊어가는 울울심사 더욱 잡지 못하온대 꽃 피어도 아까운 청춘의 구곡지중에
회한만 가득 넘치나이다. 상젼이 벽해 된다 하더니만, 사람의 사는 일이 일일 한
만 커지오니 우리 형님이나 계시오면 만단정회를 풀어 볼까요. 집안의 형세가
이와 갓타 마음이 무너지고 질정을 못하온대 여자로 태어난 죄를 또 어이할까,
무용제의 혼사로 걱정만이 크십니다. 우리 형님 떠나실 때 그다지도 작별을 설
워하여, 소맷자락 잡고 울고, 놓고 돌아서서 울고, 꿈속에서 반겨 만나 또 울었
는데, 이 무용제,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고, 천산 갓튼 한이 남아 이 한 몸 바
회에 부서뜨려 다 바친다 할지라도 손톱 티끌만치라도 갚을 길이 전혀 없어, 앉
아 생각하여도 어즈럽고 일어서서 헤아려도 일천간장이 촌촌이 잘리우는 것만
갓타서 첩첩한 이 죄를 어디다가 호소하여 용서를 받으리오. 터질 듯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업나이다. 그리운 우리 형님, 해동하여 일기 온화하면 만사 제폐하시
고 이 아우를 생각하여 이삼 일 경영하시와 부듸부터 오시압소셔. 아모쪼록 이
소원이 공허가 되지 안토록 천신께 복원 축수 하나이다. 학수고대 일각이 여삼
추로 우리 형님 반가운 발소리를 기다리오니 형님은 사제의 심정을 저바리지 마
오소셔. 만일에 못 오실 테면 점점이 금옥 갓튼 알들하옵신 글이라도 반기게 하
여 주옵기 간절히 바라오며 금츈 상봉을 고대고대하옵고 회생하난 봄바람에 내
내 귀체 만안하시옵소셔. 그리운 우리 형님 - 경진 중츈 염일일 사제 용원 올림
글자마다 가슴을 짓찧으며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용원의 편지를 차마 접지 못
하고, 옷고름짝 하나도 떼어 줄 수 없어 애간장이 미어지는 효원의 무릎 위에,
어머니 정씨부인의 두루마리 궁체들씨 편지가 어루만지듯 펼치어져 놓여 있다.
시시로 보고 십흔 여아 보아라. 무심등한한 어미 이제야 두어 말 적난다. 너를
일생 삼셰 유아로 아랏더니 너의 연기 어나듯 스무 살이 되어시여 어언간 다리
밧기여 열두 다리 가고 또 몃 해가 가니, 보고 십흔 내 여아야. 우리 모녀 몽ㅈ
상봉은 밤마둥 안면을 대하여 흔흔 반기다가 깨다르면 헛본 몽ㅈ이라 실 데 업
더라. 내 새끼야. 이졔나 저졔나 마음 조려 문 밧글 내다보아 이리저리 둘러보나
내여아 오는 기색이 업섯구나. 일구월심 고대하던 너의 제 용원이 하로에도 몃 물어져 버린 맥락의 기둥을 어떤 것으로든지 떠받치지 않으면 금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