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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안에는 더 특별한 존재가 없습니다. (우애하고 존경하라- 10절)
우리 모두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누가 더 특별하고 특별하지 않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누가 더 특별한가?를 갖고 경쟁을 합니다. VIP로 만족할 수 없어서 VVIP/ VVVIP를 만들어 돈을 많이 쓰면 더 특별한 사람이라고 부추킵니다. 그런데 주안에서, 교회안에서는 더 특별한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른 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인이 되었습니다. 친구의 전도로, 부모님의 믿음으로 인해, 수련회에 가서 은혜받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다가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혹은 성령의 불을 받아서, 어떤 사람들은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는 가끔 나의 부르심이 더 특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런 생각을 고집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에 한 집사님이 신학을 하고 싶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의 간증과 계시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나처럼 이렇게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저는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간증을 말씀드리면 집사님의 그 간증은 초라해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집사님만 특별하게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인생의 황혼을 즐기는 노인들을 보다가 ”아 저런 인생을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나만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만약 그 생각을 계속 갖는다면 결코 목회를 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특별함을 고집하면 평범한 은혜의 경험밖에 없는 교인들과 하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보통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구별하고 싶어할까요? 세상 사람들의 교제는 학연, 지연, 혈연등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뭔가 특별한 연결고리를 강조함으로서 친밀감과 연대감이 생긴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출발점은 연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교제의 출발점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교제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과 성별과 사회적인 지위의 차이를 그리스도의 피로 메우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평등한 인격적인 존재로서 교제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엡2:13-14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은 1세기 교회를 다룬 바울서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중에 <이야기 뵈뵈>는 폴라 구더라는 기독교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고린도교회 집사였던 뵈뵈가 로마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갖고 로마를 방문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엮은 책입니다. 이 책중에 로마의 영향력있는 뵈뵈의 전 주인이기도한 티투스가 복음을 듣고 비공개로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세례 받기를 청합니다. 그의 지위와 가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단호하게 세례는 공개적으로 티베르 강에서 행해질 것이고 티투스가 결단할 문제라고 거절합니다. 로마의 원로이며 영향력을 가진 귀족 티투스는 로마의 귀족들이 꺼리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결국 결단하고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때 그의 하인들도 함께 세례를 받고 성찬에 티투스와 하인들이 함께 참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은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자리를 피하자, 로마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브리스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입니다. 그들도 이제 우리의 일부, 가족의 일원입니다.” 그리고“그리스도안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노예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가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고, 그것이 진리라고 말로만 선언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교제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중에 누구도 더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아서, 많이 배워서, 많이 가져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아무도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특별한 존재입니다. 더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성경적인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3절에서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씀을 묵상해봅시다. 하나님께 받은 것인데 분량 즉 양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좀 기분이 나쁩니다. 믿음을 양으로 측정한단 말입니까? 양보다 질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양을 따지는 것은 좀 미개해보이고 비인간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입사원과 경력자 특히 직급자들이 월급을 동일하게 받나요?
솔직히 일은 신입사원들이 일을 더 하겠죠? 사소한 일들부터 회사일까지 더 많은 시간 일하지만 받는 월급은 적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입사원이 왜 과장님이 나보다 더 월급많이 받냐고? 따지는 사람 보셨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회사생활이 아주 외롭거나 오래 못할 겁니다.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까요? 월급의 양이 회사에서는 역할의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생각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나 해리슨(Harrison)같은 주석가들은 본문의 '믿음'은 구원의 수단인 진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닌,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의 성격을 알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교인들에게는 받은 은사의 차이, 역할의 다름이 있다는 뜻입니다.
차이도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차이는 거리를 만들죠. 학력의 차이, 소유의 차이, 거주환경의 차이, 차이는 거리를, 거리는 단절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내가 당신보다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위험합니다. 한 몸인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병들게 만들고 분열하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차이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만들고 승패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안에는 승자와 패자는 없습니다. 경영학의 대가인 피터 트러커는 “결국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성과를 내는 것이 경영”이라고 했습니다. 수십년동안 전 세계를 지배한 경영원리죠. 기업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을 세웠고, M&A등을 통해서 남의 소중일군 땀의 결과물을 손쉽게 뺏고, 원칙이 아닌 반칙도 전략의 하나로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몇 번씩 경제위기를 겪었고 대한민국도 IMF구제금융을 겪었습니다. 약 10여년 전부터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세계적인 학자들은 그동안의 경영학의 원리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했고, 경영전략의 1인자로 인정받는 마이클 포터 교수는 공유 가치 창출이라는 사회 서비스를 연구하고, 마케팅의 아버지인 필립 코틀러 교수는 시장점유율의 선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연구를 모든 책에서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이익을 창출하는 효율의 경제가 아닌 동양사상의‘인’개념(긍휼)을 도입해서 인간을 경제적 이익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아닌 영혼을 가진 전인적인 존재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효율을 비용의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로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제학자들이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안에서 충분히 경험했어야 하는 것을 세상이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갖고도 못한 거죠. 믿음읩 분량이란 말은 차별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포용해야 한다는 당부입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역할과 섬김의 방식이 다른 것 뿐입니다. 금요찬양을 서권사,이권사,제가 인도하잖아요? 세 사람의 인도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한 분 주님을 높이고 동일한 은혜를 주시는 성령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분량의 차이가 아닌 다름에 초점을 맞추고 주안에서 교제해야 합니다. 10절은 우리에게 주시는 실천사항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Be devoted to one another in brotherly love.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서로에게 헌신하고, 자신보다 서로를 존경하기를 우선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서로에 대한 헌신(희생)과 존경으로 이루어집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존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는 예신가족들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교제의 근거를 갖고 어떻게 예신교회를 그리스도안에서의 한 몸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말씀안에 세가지 실천사항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⓵소망중에 즐거워하라.
성도의 교제는 소망의 기쁨을 나누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창소년들에게 뭐가 되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이 “유투버”하나로 쏠리는 것처럼 어른들의 희망도 “부자”라는 한 단어로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모여서 매일 돈타령이나 하고 뭐하면 돈번다는데 이런 고민을 나눈다면 소망이 있는 모임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구걸하던 바디매오가 목청껏 예수를 부른 이유는 새 삶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12년을 고생하고 돈도 탕진한 한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예수에게로 온 것도 병을 고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가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가정에, 기업에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모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성도의 교제의 본 모습입니다. 그래서 한주간 힘들고 어렵게 살다가도 속회로, 선교회 모임으로 모일 때 소망을 함께 나누며 기쁨을 회복하고 힘을 얻도록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⓶환난중에 참아라.
환난이란 hard times, 힘든 시기를 말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힘에 겨운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게 됩니다. 이때 주변사람들에게 짜증도 많이 내고, 화도 내고, 불쑥 불쑥 본의 아니게 파괴적인 말, 냉소적인 말, 저주하는 말도 하게 되는 때입니다. 웃는 사람보면 괜히 화가 나는 시기입니다. 그때를 잘 지낼 줄 알아야 합니다. 참는다는 말을 우리는 인내한다 혹은 견딘다는 말로 이해합니다만 본문에서의 참으라는 말은 주저 앉지 말라는 뜻입니다.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다시 일어서지 못할만큼 완전히 주저앉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hard times는 Good times를 기다리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가능하면 더 웃고,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힘과 용기를 주는 모습으로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서 가능하겠습니까? 성도의 교제 가운데 어려운 시기를 지내면서 모임을 통해서 용기와 힘을 얻고 소망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어려운 시기를 지내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배우는 모임으로 준비되고 진행되어야 합니다.
⓷기도에 항상 힘쓰라.
더욱 열심히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일종의 본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각양 다른 벽돌들이 모였습니다. 이것이 건물로 든든하게 세워지려면 중간에 견고하게 붙어있도록 붙이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밀접한 동행의 관계, 동반자의 관계가 되는 것처럼 성도는 서로를 위한 기도를 통해서 더욱 친밀해집니다.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는 예신교회 가족여러분, 시간을 내어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우리를 영원히 한 가족이 될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서로를 기억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기도의 제목을 함께 나누며 응답을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도우십시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 건강하게 세워져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위대한 교회로 쓰임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로마서 12장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은 부분은 이런 구절이었습니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존경하라는 말을 이렇게 그는 이렇게 풀어서 해석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친구 갈렙은 여호수아를 주인공으로 만들며 존경하고 따라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는 용기의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는 아무도 믿지 못했던 바울을 믿어주고 고향에 내려가 세월을 보내던 바울을 선교역사의 전면에 내세워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우리의 모임이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기쁨으로 조연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모임이 되기를 소워하며 기대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한 몸의 지체된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