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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5;14-30, 얻는 권세와 잃어버리는 현재의 것. 2023. 12. 17
예수님은 호산나 찬송한다는 영광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하지만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씨 뿌리는 비유와 누룩의 비유와 마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인내의 시간을 지나, 씨를 뿌리는 단계에서부터 씨와 싹과 이삭과 곡식인 열매와, 추수의 순서로 일정한 과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씨를 심으면 바로 열매와 곡식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기까지는 여러 과정과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고, 열매를 맺어 마침내 추수 때가 되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처음 시작은 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을 해서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이삭이 되고 이삭에 충실한 알곡이 되어 마침내 추수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런 자람과 성장과 성숙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입성하신 셋째 날 화요일은 마24;1-26;5의 내용을 말씀하신 변론의 날입니다. 제사장들은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서 많은 질문을 하고 공격을 했습니다. 질문마다 변론을 하고 바른 믿음과 지식과 신앙적 해석을 하시는데, 변론만 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시대적 예언을 합니다. 권세를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혼인 잔치의 비유와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일과 부활과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 이 내용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지금까지 표현하지 않으셨던 화 있을 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표현을 7번 반복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성전이 무너질 것과 마지막 날과 심판의 때에 일어날 재난의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눅19장에 나오는 므나 비유와 의미상 같은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각각 사람들에게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눅19장에서는 똑 같이 한 므나 씩을 10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주면서 때가 되면 나중에 다시 계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무엇입니까? 장사하고, 그 장사로 어떤 결과를 남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한 므나를 받은 사람은 무엇이라 합니까? 한 달란트는 땅을 파고 한 므나는 수건으로 쌌습니다. 왜 땅을 파고, 수건으로 장식을 합니까? 농사짓고 데코레이션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계산할 때에 땅이나 수건은 이익이나 손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땅을 파고 수건으로 감싸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26-29절에서 오랜 이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나이다.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때에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희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너희에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이 여기 있나이다. 그때 주인이 대답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사람들에게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더하며 또한 많은 것을 맡기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케 합니다. 누가복음은 10고을 권세를 더하여 줍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곳에 있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재능과 능력의 차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백인백색입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상황이 다르지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상황 자체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힘든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러한 현실과 상황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 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요? 바로 그 상황을 헤치고 지나가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비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것과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아무리 작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그 가치를 소홀히 하면 아니 됩니다. 비전은 바로 이 작은 것과 내게 주신 것을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충성하는 것이 숫자의 무게를 있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보시고 주님의 뜻과 재능대로 하나, 둘, 다섯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신 것은 반드시 나중에 회계할 때가 다가옵니다. 회계할 때에 10고을 권세를 받기도 하고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도 빼앗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것이 본문의 내용인데 그러면 이 내용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1. 세상이 주는 유산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유산을 넘어서 내일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야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한 므나를 받은 사람은 내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세상이 주는 유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유산이 무엇입니까? 바로 비교와 계산과 삶의 환경입니다. 여러분, 거울은 내 앞에 두어야 하고, 등받이는 등 뒤에 두어야 합니다. 잘못은 앞에서 말해야 하고 칭찬은 뒤에서 해야 합니다. 미소를 앞세우면 원수가 사라지고, 사랑을 앞세우면 상대편의 단점이 사라집니다. 내가 읽던 책이 없어져도 그 책의 내용이 머리에 남듯이 내가 알던 사람이 떠나가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머리에 남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불가능한 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산을 뛰어 넘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1-1. 삶의 환경입니다. 지금 환경이 어렵고 고난의 연속입니다. 세상은 그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 어려운 때가 있었나요? 세상의 환경은 스스로 만들기도 합니다만 대부분 외부로부터 오는 어려움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해결해서 풀어야 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환경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73;28, 주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어렵고 힘들고 고난이 길어질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환경이 열려집니다. 주님의 약속과 명령에 대하여 얼마나 간절함이 있고,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충성되는가에 따라 환경이 열리고 닫힙니다. 여러분,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니다. 은혜의 연못입니다.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물이 동할 때 물속에 손만 넣어도 낫습니다. 이 낫고자 하는 의지와 생각과 행동이 없습니다. 그냥 머물러 있습니다. 현상만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보고만 있고, 그냥 어쩔 수가 없다고 구경만 하시지 않습니까? 타개하려는 그 어떤 의지도, 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발상의 전환이 없습니다. 생각과 마음의 문을 닫아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고난의 세월 속에 나를 기억하시고 찾아 오셔서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5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아니 됩니다. 기억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허락을 하시고 맡기신 현장을 떠나면 아니 됩니다. 살 후 3;8절에서 바울은 자신들도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씀으로 주야로 일함으로 양식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수고하고 애쓰되 주야로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과 소망의 사람은 자신의 수고와 애씀을 통하여 환경을 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에 성실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일에 성실하지 못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방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입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보다 저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학생이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는 평가 기준이 아닙니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들을 위하여 얼마나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가르치느냐에 따라 평가가 됩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하더라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여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선생님은 훌륭한 선생님이 아니고 지식만 전달하는 선생님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어느 자리에 있던지, 어떤 일이 주어지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일터는 어느 곳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힘들고 어렵고, 자신을 매우 지치게 하는 곳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달란트 비유가 무엇입니까? 충성입니다. 삶을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면 주어진 현장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여러분, 수고하고 심어야 합니다.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따라서 각각 분량을 다르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이후에 종들과 회계할 때, 숫자를 가지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실함과 충성됨을 가치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물려준 유산을 뛰어넘어 환경을 바꾸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비교와 계산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한 므나를 가진 사람은 땅에 묻고 수건에 싸서 보관을 했습니다. 한 달란트나 한 므나는 가지고 있는 나의 능력이고 재능입니다. 그런데 이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어치가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막연히 세상이 주는 기준에 비교를 하고 계산을 했습니다. 땅 속에 묻은 한 달란트가 얼마입니까? 17년에서 18년간의 품 삵을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그 전체를 모은 돈입니다. 받은 한 달란트가 대단한 것인데 다른 사람의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비교함으로 그 위대함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이 커보였습니다. 주님께서 한 달란트는 비교할 일이 아니고 계산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버린 한 달란트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그런데 행 4:10-11.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을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아무 쓸모없다고 버린 성전 미문에 앉은 사람이 너희 앞에 당당하게 존귀한 자로 서 있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버린 예수님이 예배 공동체의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달란트와 한므나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수건에 쌓아두고, 흙속에 묻어 둘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와 한 므나가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예수님도 소자 하나를 기억하셨고 냉수 한 그릇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소경 바디메오와 수가성 여인과 세상이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작은 것을 성실하게 정성을 다하여 감당을 했습니다. 하찮은 것과 작은 일이 인생의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조그만 일로 내일을 예측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이 주는 유산으로 비교와 계산을 하지 않고 상황을 말하지 않습니다.
2. 왜? 라는 의문과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원어로 카리스 입니다. 카리스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왜 하나님은 성실한 에서를 선택하시지 않고 교활한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이 없다고 선지자 한 명 보내시지 않고 멸망시키시고, 니느웨 성은 요나를 보내어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삼손에게 그렇게 큰 힘을 주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정통이 아닌 솔로몬에게 그렇게 탁월한 지혜를 허락하셨을까? 왜 예수님은 수많은 어부들 가운데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수제자로 삼으신 것 일까? 왜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바울을 선택하셔서 최고의 선교사와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삼으셨을까요? 욥과 아브라함은 동시대 사람인데 욥은 동방 최고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메시야 조상으로 욥을 선택하시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까요? 베드로와 야고보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감옥에서 순교하게 하시고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어 감옥에서 끌어내셨을까요? 이새에게는 아들이 8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막내아들 다윗을 다음 이스라엘의 왕으로 미리 기름을 부으셨을까요? 왜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주었을까요? 대답은 모두 은혜이고, 은혜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왜? 라는 의문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가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느냐? 그보다 더 많이 받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셔서 받은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세상적인 개념으로,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각하면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가 적용된다면 혼란스럽습니다. 왜라는 의문과 질문 앞에 세상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으면 좋고, 적게 받으면 계산을 합니다. 왜 싸우고 왜 으르렁 거릴까요? 세상 원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라는 것에 명쾌한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평과 정의와 균등을 말하지만 왜 라는 의문과 질문에 정확한 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문제를 푸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인의 뜻입니다. 차별하여 받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않았습니다. 불러준 것만도 감사한데 얼마를 주든지 주는 것으로 감사해야 할 상황입니다. 여러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감사를 알고 은혜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달란트라도 준 것만으로 이미 감사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 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돈을 얼마를 주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 은혜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어떤 대가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상황만으로 은혜가 넘치고 감사한데 또 다른 것을 요구하거나 욕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달란트의 비유는 이런 은혜를 아는 사람이 바로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본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롬3;24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전도자 스데반을 죽인 죄인의 괴수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을 가리켜, 고전15;10,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2;8-9에 너희는 그 은혜의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주님의 사람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어떤 분량의 달란트도 은혜입니다. 세상과 영적인 것은 이해부터 다르고 출발이 다릅니다. 생각도 다르고 그래서 산출되는 결과도 다릅니다. 비전도 다르고 출발도 다르고 이루어지는 삶도 다릅니다. 그러면 왜? 라는 질문을 어디에서 왜 해야 합니까?
2-1. 주님의 주권에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를 주고 두 달란트를 주고 다섯 달란트를 주는 것은 주님의 주권입니다. 주인의 권한입니다. 주님은 하신 약속과 하신 언약을 이루시면 됩니다. 한 달란트를 받고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는 것은 나의 권한이 아닙니다.
마20;1-16에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는데 1절.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합니다. 천국은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입니다.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려는 집주인의 그 무엇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루는 포도원의 주인이 아침 일찍 포도원의 품꾼을 구하기 위하여 포도원을 나섭니다.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을 하고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는데 제 삼시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했습니다. 이어서 제 육시, 제 구시, 심지어는 제 십 일시 까지도 일거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인 그 장소에서 놀고 있는 품꾼들을 일하도록 선처를 베풀어 줍니다. 원래 유대인의 시간 개념은 해뜨기 시작한 6시부터 해가 지는 6시까지 한 시간 단위로 제 일시부터 제 12시까지로 구분하여 시간을 계산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삼시는 오전 9시를 말하고 계속해서 12시, 오후 3시, 심지어는 일이 끝나는 1시간 전인 오후 5시까지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오후 5시에 나가보니 일군이 있는 것을 본 포도원 주인이 이제 오후 6시에 해가 지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여기 섰느냐?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서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데 한 시간 만에 모든 작업이 끝났습니다. 최대 9시간 일한 사람부터 적게는 한 시간 일한 사람까지 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말합니다.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사람까지 삯을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후 5시에 들어와서 한 시간 일한 일군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합니다. 너무나 감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 정오, 아침 9시에 먼저 온 일군들에게도 똑 같이 순서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포도원 주인이 품삯을 주는데 일한 시간대로 주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의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며 말을 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에 13~16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무슨 의미일까요? 주님의 주권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뜻입니다. 주인은 일을 많이 했다고 불평과 비교를 하는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라고 합니다. 주인의 뜻입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없고,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러분, 뜻대로 결정하시고 약속한대로 주시는 것이 주인의 주권입니다. 여러분, 엿장수가 엿 가위를 일분에 몇 번 두드릴까요? 간단합니다. 엿장수 마음대로입니다. 그 분 마음이고 그 분 뜻대로 입니다.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주는 것은 주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이 주권에 대항한 사람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고 주권을 수용한 사람이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권을 인정한 사람과 받아들인 사람의 남은 인생이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10고을 권세와 더 많은 것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사람과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면 확실한 삶의 해석이 됩니다. 그 해석이 무엇입니까? 롬5;1-2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무엇을 즐거워합니까?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여기에 이미와 아직, 그리고 사이가 나옵니다. Already but not Yet 그리고 사이 입니다. 2절의 말씀에서 동사로 표현하는 시제가 다릅니다.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는데 과거 완료이고 이미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미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계시되고 보여 진 곳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갔으나 아직 소망 중에 바라고 기대해야 할 것이 있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을 바라고 기대해야 합니다.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영광을 향하여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것은 아직의 천국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이고, 과거 완료와 미래입니다. 무슨 해석입니까? 신앙인은 길 위에 서 있는 나그네입니다만 세상이 말하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귀한 존재인 나그네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소망의 존재인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아직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예배를 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은 이미의 다양한 은혜를 모두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미의 은혜 때문에 또한 아직의 수많은 약속의 성취가 나타날 줄로 믿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을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지만 저와 여러분은 소망이 있고, 저와 여러분은 믿음을 가진 주님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로 가는 것이 아니고, 침륜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고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보고 기대하며, 영광을 사모하며 전진하고, 상급을 바라보며 주실 은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것이 우리의 좌표이고 위치이고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동시에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실수하고 잘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것이 세상 속에 사는 저와 여러분의 현실이고, 좌표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의 위치입니다. 이미와 아직, 이 두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를 우리가 임의로 벗아 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그 때까지 저와 여러분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이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미와 아직 사이가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영향을 더 받을 수 있는 위치이고 좌표입니다. 이미를 더욱 생각하고 행동하기 쉬운 자리입니다. 아직을 바라보기 보다는 이미에 더욱 가깝습니다. 갈등을 하고 고민을 하는 자리입니다. 넘어지기 쉬운 위치입니다. 사탄의 영향을 더욱 받을 수 있는 좌표입니다. 부정적이고 낙심하고 절망하기 쉬운 자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좌표와 자리와 위치와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재의 자리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이가리 있지요? 미리 당겨서 사용하는 것이고 아직의 것을 지금의 자리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의 좌표에서 아직의 모든 것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누려야 합니다. 이 것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감당하고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달란트와 함께 있지만 다양한 은혜가 부여된 특권과 아직의 모든 것들 사이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이고 므나입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 두 달란트를 받은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1. 자신의 위치에서 입니다. 이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왜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로 차등을 두었을까요? 왜 한 달란트와 세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로 하지 않았습니까? 왜 중간이 아니고 두 달란트일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달란트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고 중요한 의미입니다. 달란트는 위치와 좌표를 나타냅니다. 한 달란트는 세상입니다. 다섯 달란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위치이고 좌표입니다. 그러면 왜 두 달란트일까요? 오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빼앗기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미 천국에 가까이 있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까? 두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왜요? 빼앗기고 슬피 울며 이를 갈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통곡해야하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옆에, 가까이 있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인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함께 있기 때문이고 이 사람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나요? 세상하고 살지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에 살지만 천국을 사모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살지만 한 달란트의 사람으로 살지 않습니다. 몸은 세상에 있지만 신앙과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의 한 축을 이루는 사람이 도스토예프스키 입니다. 그의 인생은 우울하고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해되어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청년기에는 혁명당에 가담한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사형집행 전에 그의 천재적인 문학성 때문에 황제의 특사로 사면이 되지만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4년 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지만, 그의 아내는 결혼 전에 사귀던 사람과 계속적인 불륜관계를 맺었습니다. 어린 자녀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견디지 못하고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일평생을 그를 쫓아다닌 질병이 있었습니다. 간질병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일평생을 인생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좌표와 위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인생의 깊이와 고뇌,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되는 작품들을 남겼을까요? 그것은 그가 인생의 고통을 절망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와 함께 있지만 두 달란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고통을 거룩한 병으로 불렀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좌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영혼의 돛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그의 믿음 때문에 그는 자서전적인 소설인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작품으로 고통스런 인생을 승화시켰습니다. 여러분, 두 달란트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에 가까이 있지만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달란트를 받으셨습니까? 이 땅의 주인공이 되어서 10고을 권세와 더 많은 것을 맡기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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