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2;21-40. 아기 예수님은 만난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 성탄주일. 2023. 12. 24.
좌우 앞뒤에 계신 분들과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2023년 성탄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 주목하고 깨달았던 것같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왜 인생의 답이고 인생의 소망이 되었는가를 깨닫고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이천여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셨고 빛이 되셨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광이 되셨습니다. 구원과 빛과 영광이 이 땅에 오셔서 축복하시고 사랑하신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생명과 능력은 성전이라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복음을 통하여 전달이 되었습니다. 복음인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지고 자라나서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구원과 빛과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런 구원과 빛과 영광이 나에게 까지 전파가 되었고 오늘 이렇게 영광스러운 성탄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은 순서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준으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은혜를 받을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놀란 나머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던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 부터 또 다시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아들은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로부터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에 충격이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습니까? 반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천사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였던 네 친족 엘리사벳도 아이를 잉태한 지 여섯 달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잉태함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고 아이를 가질만한 때가 이르지 않은 처녀입니다. 엘리사벳과 경우가 다릅니다. 하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동일한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합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내용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된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면서 평안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기다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2023년의 성탄이 나의 삶 속에 개입한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축하하는 생명의 성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잉태된 생명에 대하여 700여 년 전에 이미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잉태된 생명을 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 생명 때문에 왜 평안을 소유해야 합니까? 예언을 할 당시의 상황이 매우 절망의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과 절망에 신음했습니다. 어두움과 흑암이었습니다. 어두움과 흑암이라는 것이 강조될 만큼 세상과 이웃으로 부터 이야기 거리와 우스게 거리로 조롱을 받았습니다. 사5:30에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다. 사8:22절, 땅을 굽어보아도 환란과 흑암과 고통의 암흑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사9: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 들입니다. 여러분, 좋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삶 전체가 암흑과 고난과 흑암입니다. 절망이며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서글픕니까? 그런데 사6:13절은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 운 바 될 것 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서글프고 괴로운데 그 중에 90퍼센트가 없어지고 10퍼센트만 남아도 마지막 남은 인원까지 다 절망이고 흑암이라고 합니다.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나중이 더 어렵습니다. 정체성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역사를 통해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소외된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뻐할 이유가 없고, 감사할 일이 없으며, 그래서 평강이 아니고 고통과 두려움의 삶이었습니다. 조금도 소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고 한 줄기의 빛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힘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했습니다. 정치와 경제적 상황을 보면 다시 세워지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현실은 그랬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고통과 어둠과 절망에 빠진 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십니다. 소망과 위로의 증표로 한 아기를 말씀하고 이 아이를 통해서 장차 선민 이스라엘은 모든 흑암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이 아이를 통해서 평화의 왕국을 영원토록 세우실 것을 약속 하셨는데, 그 아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잉태된 생명,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잉태된 생명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이 땅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어떻게 보내셨나요?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잉태한 새 생명의의 이름이 임마누엘 예수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하실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팔일이 지나시면서 있었던 내용입니다. 2;21-24,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히브리민족은 첫 태의 처음 난 남자 아이가 출생을 하면 팔일이 될 때에 정결 예식인 할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25-2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어떻게 합니까? 28-32.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 시므온이 성령에 감동되어 아기 예수를 보고 찬양을 했는데 그 찬양의 내용에 중심이 되는 key word 세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구원과 빛과 영광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면서 찬양하고 축복했는데 그리스도, 구세주로서 구원과 빛과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34-35을 말씀합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또 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안나 여 선지자입니다. 36-38.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 하니라. 속량을 바라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나 선지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을 했습니다. 이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 그러면 절망의 현실을 반전시키시는 소망의 미래를 만들어 가실 분이 누구십니까?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700여 년 전에 이미 예언을 했습니다. 특히 사9;6, 임마누엘인 예수님을 가리켜서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시므온과 안나는 중요한 키 워드 구원과 빛과 영광을 말씀했습니다. 이는 사9;6절의 말씀을 세단어로 표현한 내용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으로 말씀하신 이름의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다는 임마누엘이라고 하셨는데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병원의 신생아실에 가면 갓난아기들이 누워있는데 저마다 명패에 쓴 이름이 있습니다. 부모나 집안 식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의 이름이 장차 태어날 생명의 인격이고 삶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되고 더 복되고 더 뛰어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사랑하는 마음인데 자녀들의 이름에 이런 의미가 삶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어떤 모습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내용의 의미입니다. 그 어떤 상황과 어떤 모습과 어떤 관계의 자상한 부분의 역할을 가리켜서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이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서 나에게 있어서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어야 나에게 주신 영역과 나의 삶의 모든 영역과 나의 남은 살아가야 할 삶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습니다. 구원과 인생의 문제와 관계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이 것을 오늘 3가지 표현으로 구원과 빛과 영광으로 축약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이름의 본 뜻과 그리고 구원과 빛과 영광이 여러분의 삶의 모든 곳에 적용되시기를 그래서 주어진 삶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워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시므온의 세 가지 표현과 이사야 선지자의 5가지 표현은 어떤 관계가 됩니까?
1-1. 구원의 실제이고 역할입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이 기묘자와 모사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기묘자와 모사라는 것은 전쟁과 경영과 삶에 있어서 탁월한 지략가를 의미합니다. 전쟁과 경영에 있어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계획을 세우는 지혜 자입니다. 그러면 왜 기묘자와 모사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사실 인생의 전쟁터에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만남은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시지만 관계는 내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물론 특별 계시는 관계까지도 하나님이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계시를 적용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것이 쉽지 않고 전쟁터입니다. 승리가 내게 있지 않습니다. 모사이고 기묘자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신기하면서도 신비스런 지략가 모사인 예수님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가진 능력을 뛰어 넘어 기묘하게 하나님 나라를 내 안에 보여주시는 기묘자이시고 지혜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 모사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2023년이 어떻습니까? 절망과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고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어렵습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삶의 모든 것이 힘이 듭니다. 상대적인 가난이 고통스럽고, 절대적인 가난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좋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삶 전체가 암흑과 고난과 흑암입니다. 절망이며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서글픕니까?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떠해야 합니까? 이런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이 주실 지략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어진 영역에서 소망으로 열심히 수고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전진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오고, 흑암을 물리치는 광명의 태양은 반드시 떠오릅니다. 왜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묘자이시고 모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이 계획했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12지파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셨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늘 열강에 짓밟히는 나라와 민족이었습니다. 꿈에도 소원은 자주국방과 부국강병이고 한 번 잘 살아보자는 마음과 소망입니다. 그래서 사모했던 것은 강력한 통치자 메시야입니다. 앗수르, 바벨론, 애굽이나 로마를 물리칠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 아기를 약속하셨는데, 바로 본문의 말씀에 기록된 한 아기, 예수님입니다. 기묘자와 모사는 흔히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특별한 뜻입니다. 기묘자는 신기한 이름이라는 뜻이고. 모사는 신기한 지혜입니다. 아이의 이름이 신기하며 특별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이름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기 때문에 기묘자라는 이름입니다. 신기한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지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신기하고 오묘한 신비스런 비밀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경제가 어렵고, 정신적인 위기와 마음과 육체의 병이 들었습니다. 낙심과 절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 시대는 사람들의 마음에 물질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고, 삶이 곤핍하고 어려워져서 마음과 믿음도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현상 때문에 신앙까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울수록 기묘자요 모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구원하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이 되신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 구원이 내용이 삶과 죽음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영역에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구원의 또 하나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자녀들을 돌보고 부양하는 보호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영존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아이의 신성으로 영원한 존재를 말하며, 다른 하나는 죄와 죽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핵심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가장 편안하며, 친근합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보호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계급이 아닙니다. 부양하는 보호자, 후원자입니다. 히브리 사고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무게와 거리를 무너뜨립니다. 스스로 무게와 거리라는 담을 헐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곁으로 와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있는 무거운 담과 죄의 담을 제거했습니다. 엡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아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담을 헐어버리는 현장을 700년 전에 보았습니다. 결코 상상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현장을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아이 예수님을 전할 때에 기대감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후손들은 이 아이가 그 담을 허는 것을 실제적으로 목격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700년 후에 이스라엘 땅에 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빛으로 오셨고, 실제적으로 막힌 담을 헐었지만 후손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느낌마저도 없고, 거부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구원자로 보셨고 찬양을 했습니다.
1-2. 시므온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빛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무엇으로 말씀합니까? 요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생명으로 잉태된 예수님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었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요1;6-11.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빛이었습니다. 그러면 잉태된 생명이 왜 빛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은 단순한 혈통을 이어받는 사람이 아니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함을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지만, 근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이는 사람인데 이 아이의 이름이 하나님의 신적인 성품을 소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인격적인 주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자주 불렀던 이름인데 전능은 불가능이 없고 전능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아이가 행할 능력을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가 증명합니다. 이 아이에게 신적인 성품과 전능이 있기 때문에 어깨에 정사를 메였고 우주적 통치를 이루었습니다. 우주적 통치는 영원입니다. 처음과 끝이고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처음에도 빛이시고 나중도 빛입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님께 있습니다. 그 권세를 소유하신 예수님은 세계를 영원히 통치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 되는 통치가 아니고 세계와 우주를 영원히 통치하고 현재의 나를 통치합니다. 그래서 이 땅과 우주와 나에 대한 빛이 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빛이 있으면 악한 사탄과 마귀도 사라집니다. 물러납니다. 빛이 있으면 질병도 물러나고 죽음도 떠나갑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더불어 영과 육과 정신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어두움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아기 예수는 영광입니다. 누구에게 영광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영광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하나님과 우리에게 영광입니다. 그래서 평강의 왕으로 이사야가 예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왕은 통치적 개념입니다. 백성들을 돌보는 책임자로서 왕입니다. 왕의 일반적인 통치 개념은 왕궁에 앉아서 왕의 상징인 왕복을 입고 백성들을 통치합니다. 그러나 평강의 왕의 통치는 일반적인 통치 개념이 아닙니다. 평강의 왕은 왕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백성들과 함께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변화 산 사건이 일어 날 때에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집을 짓고 변화 산에서 안주할 것을 요구받았을 때 주님은 거절하고 세상으로 내려 왔습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자기 백성들과 함께했습니다. 평화의 왕은 피 흘림이 없습니다. 피 흘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 흘림입니다. 여러분, 피 흘림이 없이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야 세계를 통치할 수 있었지만, 아이 예수님은 스스로 피를 흘리는 방법으로 세계를 통치합니다. 피 흘림을 통한 통치는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왕들과 예수님의 피 흘리는 방법과 그 의미는 다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이웃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하여 죽이고 포로 잡아야 만이 세계를 통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쳐서 피를 흘려 세계를 통치합니다. 세상의 군왕은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이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포로 된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통치입니다. 세상의 군왕과 예수님의 차이는 영원한 통치와 평화의 통치로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은 기묘자와 모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주신 바 되었습니다. 이분이 오실 만왕의 왕이고,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십니다. 사9;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 앞에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나에게는 평강이 주어집니다. 영광이 됩니다. 구원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심을 다하여 구원과 빛과 영광을 이루시고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전 영역에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구원과 빛과 영광으로 각 부분과 삶의 전 영역에 나타나시고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다시 한 번 사랑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