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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6-1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2일, 전북 부안에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한반도 어느 지역이든지간에 위험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6월임에도 불구하고, 한낮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예년보다 일찍 시작되어, 온열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만 할 것 같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내일부터, 서울대 병원 교수들이 휴진한다고 하니, 치료받아야 환자들이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앞으로는 여러분의 소원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내 은혜가 족하도다”라는 제목으로, 사도 바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자기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평가하기를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어떻게 이방인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았던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까?
사울과 예수님과의 첫만남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동참하는 등,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가서,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고자 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너무 놀란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대답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아무 말을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로서 살아왔던 사울이 바울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첫만남은 사울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가 배우고, 알고, 믿고 있는 대로 행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바르고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울을 찾아오셨고, 그를 만나주셨고, 그에게 말씀하여 주셨고,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훗날, 바울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기 스스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했지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바울이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벽했습니다.
바울은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비치는 너무나도 강한 빛을 보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시력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낼 때,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라고 말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쓸 때, 다른 사람들이 대신 써주었고, 마지막 인사말 정도를 바울 본인이 직접 썼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글씨를 크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하늘로부터 강한 빛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눈이 나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좌우지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지금처럼, 안경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 나빠지면, 평생을 불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저함 없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그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그의 부르짖음, 그의 기도, 그의 믿음을 통하여, 눈을 뜰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바디매오와 같은 부르짖음이 없었을까요? 바울은 바디매오보다 기도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바울에게는 눈을 뜰만한 믿음이 없었던 것일까요? 바울의 믿음이 바디매오의 믿음보다 못한 믿음이었던 것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면, 귀신도 쫓아낼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짖는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령하였을 때, 지금껏 걸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은 일어나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그는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걸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세 번이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가시가 없어지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의 기도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아직 육체의 가시가 없어질만한 믿음이, 그에게 없었던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고 말했던 바울이 기도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기도의 사람 바울에게는 크고 은밀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왜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거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믿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이 당한 어려움이 어찌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습니까? 육체의 가시가 그것 하나뿐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셀 수도 없는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그 누구의 믿음보다도 월등하게 앞서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탁월한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는 좋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그 캄캄한 감옥 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억울하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감옥 안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바울의 믿음은 월등하게 좋았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할만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만큼 찬양의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일 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경우, 원망과 불평 대신, 기도와 찬송을 할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훗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말할 정도로, 감옥 안에 있을 때, 바울은 원망과 불평이 아닌, 감사와 기쁨으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캄캄한 감옥 안이, 기도와 찬송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감옥 밖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 감옥 안에 갇혀 있을 때, 한 말이었습니다. 감옥 안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할 수 있는 그런 장소인가요? 바울에게는 그리했습니다. 감옥 안이라 할지라도, 바울이 있는 그 자리는 바로, 기도와 찬송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장소와 형편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있는 삶의 자리가 원망과 불평의 자리가 아니라, 감사와 기도와 찬송의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응답을 받을만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1-2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과 26장을 보면,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던 환상에 대하여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분명하게 만났을 뿐 아니라,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오기도 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응답을 받을만한 믿음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분명하게,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의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 번이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가시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바울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많은데, 그 옛날에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의 고민거리요,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육체의 가시를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응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단번에, 그의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셨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육체의 가시가 없다면, 어쩌면, 육체의 불편함이 없이, 더욱더 자유롭게, 더욱더 활발하게,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을텐데, 하나님은 왜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지 않으시고,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러분!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서,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을까?, 왜 없애주지 않으셨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왜 고난을 당하였을까?”라는 문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구나.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고, 나에게 고난을 주셨구나”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만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 나의 능력,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면, 원망과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어려움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고난을 당함으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복 받기를 원하시고,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며, 앞으로도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자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자랑거리가 있었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지만,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좌우를 두리번 거리며, 우왕좌왕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기준으로, 좋은 일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건강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실패하지 않고, 망하지 않고, 항상 성공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에게 육체의 가시뿐이었습니까? 굶주림과 풍랑과 같은 죽을 고비도 많이 만났습니다.
어쩌면, 그가 가지고 있던 믿음도 흔들렸을 것입니다. 한 순간, “기도한들 응답도 해주지 않는데, 기도할 이유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보고, 그를 따르던 성도들의 믿음도 흔들렸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바울이 기도해도, 육체의 가시가 없어지지 않았는데, 나 같은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일 것이야”라고 생각할 성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받는 바울에게 죽을 고비를 비롯하여,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는데,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은 더 많은 고난을 당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거야”라고 생각할 성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성도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들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맞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닥쳐온다 할지라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고, 끝까지, 이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여러분! 매순간마다, 자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지금껏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