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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자모임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통달무아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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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상인의 행장
선화 노스님의 법명은 안자(安慈), 자는 도륜(度輪)이다. 허운(虛云) 노스님의 법맥을 이어 중국 위앙종(館仰宗)의 제9대 법손(法孫)이 되었으며, 사호(賜號)는 선화(宣化)이다. 노스님은 일생 동안 명예와 이익를 구하지 않고, 더욱이 다른 사람과 승부 다투기를 원하지 않았다.
노스님은 중국 길림성 쌍성현(雙城縣, 후에 흑룡강성으로 편입됨) 출생으로 민국(民國) 7년(1918년) 음력 3월 16일 태어나셨다. 부친의 성은 백(白) 씨이고 모친은 호(胡) 씨이다. 부친은 근검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농사를 지었으며, 모친은 일생 채식하며 염불하였다. 사남삼녀(四男三女)를 낳은 후 밤에 아미타부처님이 큰 광명을 놓고 천지를 비추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았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채식하며 염불하였다. 나이 11세가 되었을 때 우연히 황야에서 죽은 아기를 보고, 생사(生死)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수행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스님은 부모에 대한 효가 지극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져 사람들은 ‘백효자(白孝子)’라고 칭하였다.
15세 때 스님은 부모를 떠나 사방으로 선지식을 찾다가, 마침내 하얼빈시 교외의 삼연사(三緣寺) 상지(常智) 노스님께 귀의하고 삼보의 제자가 되어 선정(禪定)을 닦았다.
19세 때 모친이 왕생하자 모든 인연을 놓아버리고 사월초파일 불탄일에 삼연사 상지 노스님께 청하여 삭발 출가하였다. 사미계를 받은 후 초막을 짓고 3년간 효를 지켰다. 하루 한 끼만 먹고 저녁에는 눕지 않았다. 『화엄경』에 절하고 정토참법(淨土懺法)으로 참회하였으며, 날로 선정의 공부가 순일해지고 자비의 마음이 깊어졌다.
19세 되던 해 6월 19일 관세음보살 성도일(成道日)을 맞이하여 불전에서 18대원(大願)을 발하였으며, 원에 따라 독실하게 행하고 일체 중생의 질병고난을 구제하시고자 하였다. 중생의 무명, 번뇌 등 모든 업장을 자신이 떠맡고 짊어지고자 발원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용과 뱀, 여우, 귀신들을 감화시켜 삼보에 귀의하게 하고, 계를 받게 하여 악을 고치고 선을 닦게 하였다.
28세 때인 1946년 스님은 남하하여 행각하면서 선지식을 참방하였다. 1947년 보타산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1948년 만리길을 걸어 광동성 남화사(南花寺)에 도착하여 당시의 선종의 태두이신 허운 노스님을 참례하였다. 허운 노스님과 만날 때 일찍이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 일화가 있다. 스님은 그에 따라 게송을 지었다.
虛公見我云如是 허운 노스님이 나를 보고 이와 같다고 하시니
我見云公證如是 나는 노스님을 뵙고 이와 같음을 증하였네.
云公與我皆如是 노스님과 내가 모두 이와 같으며
普願衆生亦如是 중생도 모두 이와 같기를 두루 원하네.
당시 109세의 허운 노스님은 선화 스님이 용상의 법기임을 아시고 율학원의 감학을 맡겼다. 아울러 삼단대계의 증명아사리로 삼았다. 허운 노스님께서는 선화 스님을 “이와 같다! 이와 같다!(如是! 如是!)”라고 인가하였다.
1949년 봄철수계를 원만히 마치고 허운 노스님과 작별하여, 홍콩으로 가서 널리 교화하였다. 스님은 평등하게 불교의 다섯 종파를 선양하면서 문호 파벌을 타파하였다.
1956년 4월 9일 허운 노스님께서 특별히 운거산(云居山)에서 오셔서 위앙종 조사맥의 원류를 선화 스님께 맡기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전승하신 법의 제46대, 중국 위앙종 제9대의 사법인(賜法人)으로 임명하고 ‘선화(宣化)’라는 이름을 내렸다.
1962년 인연이 성숙하여 불자들의 요청에 의해 미국으로 갔으며, 후에 삼번시(三藩市)에서 불교학당을 설립하여 정법을 계속하여 서방세계에 전하였다.
1968년 시애틀 워싱턴대학 학생의 요청에 응하여 ‘능엄경 하계연수반’을 만들었다. 96일간의 연수 후 스님의 감화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여 수계를 받았으며, 그 중 5명의 미국인이 발심 출가하여 미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스님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976년 선화 스님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유키아 탤마지에 만불성성(萬佛聖城)을 건립하였다. 만불성성이란 이곳에서 만 분의 생불(生佛)을 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후 계속하여 미국 각지에 절을 세워 27개의 도량이 건립되었으며, 북미불교의 깊고 두터운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스님은 일생 동안 계율을 엄정하게 지키고 부처님의 제도를 준수하였다. 만불성성에 출가한 제자는 “하루 한 끼만 먹고 가사가 몸을 떠나지 않게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수행에 정진하면서 수행가풍을 지켜나갔다.
제자들은 스님이 세운 육대종지 즉, “다투지 않고〔不爭〕, 탐하지 않고〔不貪〕, 구하지 않으며〔不求〕, 사사롭지 않고〔不自私〕, 이기적이지 않으며〔不自利〕,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打妄語〕.”를 수행의 지표로 삼고, 쉬지 않고 정진하여 정법이 세상에 상주하게 하였다.
스님은 말씀하시길, 역경은 천추만세에 썩지 않는 성스러운 사업이라고 하면서 1973년 국제역경원을 설립하여 역경의 인재를 배양하였다. 지금까지 백여 종의 영역본을 출판하였으며, 서반아어, 베트남어로 불경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스님은 평생을 홍법에 노력하였으며 수십 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미국을 위시한 영국, 폴란드, 프랑스 등 서방세계뿐만 아니라 대만, 홍콩, 인도, 싱가포르,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를 다니면서 홍법하였으며, 귀의한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스님은 일생 동안 위법망구하고 힘든 괴로움도 사양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국내외로 다니면서 보살의 자비원력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다가, 1995년 6월 7일 세수(世壽) 78세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원적(圓寂)하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선화노화상약전』(宣化老和尙略傳, 北京 靈光寺 발간)에서 발췌 수록하였다. 옮긴이 각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