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산문] 내 아이만 구구단을 못 외웠다고?/송미소

2학년 종업식을 며칠 앞두고 아이는 학교에서 나머지 공부를 하고 왔다. 처음에는 선생님께서 신경을 써주시니 감사하고 잘된 일이라고 아이에게 말했는데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이어지니 신경이 쓰였다."너 구구단 아직도 못 외웠어?”“알기는 아는데 느려서 그래. 선생님이 답이 빨리 나와야 된다고 하셨어. 칠칠하면 사십구. 이렇게 바로. 근데 나는 빨리는 안 돼.”“그렇구나. 좀 천천히 해도 될 거 같은데... 그래서 너희 반에 몇 명이 남아서 공부하는 거야?”“나 혼자야”“너 혼자라고? 언제부터?”“처음부터 나 혼자였어”“아니 너 빼고 다른 애들 전부는 구구단을 그렇게 빨리 외운다고?”“응.” 아이는 태연하게 답했지만 나는 너무 놀랐다.딸아이는 구구단 외우기에서 꼴찌를 한 셈이었다. 구구단은 학교 수업 시간에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될 줄 알았다. 만약 잘 안 외워진다면 앞에서부터 차례로 더하면 된다는 나의 생각이 너무 안이했구나 싶었다. 아이 공부에 무심했던 것에 자책했고,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잘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어딘가 잘못된 거 같아 불안했다. 그때 내게 위로가 되었던 친구의 말이 있다. “너무 걱정 하지마.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으니 그런 거지 외국이었으면 이런 걸로 고민했겠어?” 그 말을 들으며 세계지도를 떠올리자 눈앞에 크게 보였던 문제가 멀어지면서 작게 보였다. 9세의 구구단은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만 한정된 문제이다.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인 문제이다. 지금 이곳의 문제가 다른 시대, 다른 나라로 옮겨간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걱정에서 빠져나와 고민과 거리두기를 할 수 있었다.옥타비아 버틀러의 SF 소설 <킨>의 주인공 다나는 1976년에서 1815년 노예제가 폐지되기 이전의 시대로 시간 이동을 한다. 시간 이동이라는 SF소설적 장치를 이렇게 잘 활용한 작품이 또 있을까? 1815년의 다나는 개별적인 존재로서 주체성을 가진 한 인간이 아니라 흑인 여성노예라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똑똑한 다나를 노예로 길들이는 끔찍한 폭력을 생생히 목격하도록 한다. 어떤 시대에 당연한 것이 다른 시대에서는 야만이 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가치 중 많은 것은 그 시대와 장소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혜택을 누리기도 하지만 시대로부터 고통받기도 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말만이 불변의 진리일지도 모른다.구구단 외우기에서 꼴찌를 해서 선생님을 걱정시켰던 딸아이는 3학년이 되어 나눗셈을 배우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이가 수학을 잘했기에 이 이야기의 결론이 해피 엔딩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 아니다. 단지 어떤 답답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 시대에 이곳이 아니라면 겪지 않을 문제는 아닌지를 생각해보고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생기고, 때로는 그 틈으로 통찰의 싹이 피어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