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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전신은 광주 가톨릭센터다. 가톨릭센터는 가톨릭 광주대교구 소속으로 2013년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 5월의 기억’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록관에서 일하면서 꼭 만나고 싶은 이가 있었다. 바로 윤공희 주교다.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총탄이 6층 사제관까지 날아들었다. 윤공희 대주교와 사제들은 이 건물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지켜봤다. 5·18 이후에는 구속자들의 구명, 석방, 진상규명을 위한 공간으로 기꺼이 역할을 했다. 유족들과 부상자들의 집회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기억의 공간으로 탈바꿈됐고 전국, 아니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
윤공희 주교는 내년이면 1백세가 된다. 주교와의 만남을 앞두고 가슴이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 지난 5월, 이기홍 변호사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5·18이 43주기나 됐는데, 윤공희 주교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윤공희 주교에 대한 찬사를 반복했다. 그러잖아도 만나고 싶었던 필자는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했고, 윤공희 주교는 흔쾌히 방문해 주셨다. 기록관 식구들을 비롯해 모두가 감동했다. 이기홍 변호사는 “속된 이야기로 5·18민주화운동에서 공신이라면 윤공희 주교님이에요. 모든 시민들에게 힘을 줬고, 우리를 보호해 줬다”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에 대해 윤공희 주교는 화답했다. “제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여기서 뭐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을 두드려 패고 발로 밟고 그랬어요. 6층에서 골목 길을 내다보니까 젊은 신사가 보였는데, 저고리를 벗고 있는데, 피가 나더라구요, 저 사람 빨리 가서 응급치료를 해야겠는데 나도 겁이 났어요. 마구 두들겨 팰 것 같고, 예수님 말씀에 강도 만난 사람 있었는데, 랍비(사제)가 지나가다가 비켜가고 마는 거야,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이 가서 치료해 주는 거야. 내가 그때 비켜간 그 사제와 같구나. 그래서 사실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요.” 기록관 6층 상설전시실(진실의 눈)에는 “사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살지 못해 지금도 반성하며 살고 있습니다.”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윤공희 주교는 많은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 때 그 어려움 속에서 시민들을 위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노력하는데, 나도 일어나서 같이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본 것 뿐”이라고 했다. “진실과 정의 위에서 살아야한다. 더군다나 이사회, 공동체가 진실과 정의와 사랑위에 세워져야 한다.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방법이 잘못되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5·18은 민족적 큰 시련인데, 우리가 이런 민족의 그런 비극을 기억하고 진실을 알고, 모두가 평화스럽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독일의 경우 아우슈비츠 유태인 학대를 계속 기억하고, 남기고, 뉘우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을 항상 세상 사람들에게 깨우쳐 준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참 훌륭하다”며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윤공희 주교는 덧붙인다. “저는 하느님의 안배 같습니다. 센터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내가 광주 항쟁 때 그런 역할을 할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하늘의 이상한 섭리에요”라고.
43년 전의 일을 회고하는 윤공희 주교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광주의 5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기억의 공간이 여기에 있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윤공희 주교가 보았던 광주 5월의 이야기는 잊힐 수 없는 것이다. 기록관은 그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가 방문하는 이들에게 켜켜이 토해낸다. 윤공희 주교가 지키고자했던 광주의 5월 정신이 뜻깊고, 견실하게 전해진다. 많은 이들이 1980년 5월의 뜨거웠던 광주정신을 느끼고 돌아간다. “윤공희 주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