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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빼앗긴 고향 오천 군자리
이장희 추천 0 조회 40 14.10.28 15: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빼앗긴 고향 오천 군자리


긍구당 고택을 나와 도산서원 방향으로 약 10여 분 가면 국도가에 오천 군자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은 넓은데 차는 한 대도 없었다. 별로 찾는 이 없이 고요하고 조용한 곳이라는 뜻이다. 군자리는 광산김씨 예안파가 20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살아온 터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이곳으로 가옥들을 옮겨온 곳이다.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건물들이 해체되는 과정에 대들보와 지붕 사이에서 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기존의 것들과 합쳐 고문서 7종 429점과 전적 13종 61점을 보물로 지정하여 단지 내 박물관인 승원각에 보존하고 있다.


오천 군자마을이라는 이름은 안동부사였던 한강 정구 선생(서원기행 1 도동서원 참조)이

‘오천 한 마을에 군자(君子) 아닌 사람이 없다.’ 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당대 오천의 도학 7 군자는 후조당 김부필, 읍청정 김부의, 산남 김부인, 양정당 김부신, 설월당 김부륜, 일휴당 금응협, 면진제 금응훈이다. 이들은 모두 형제 사촌 내외종간이며 퇴계의 문인에 속한다.

군자마을의 누정과 고택의 이름은 이들 군자들의 당호를 딴 것이다.

군자리에서 특히 눈에 뛰는 정자가 있다.

후조당과 탁청정이다.

 

 후조당

 

1. 후조당(後彫堂)

후조당은 광산김씨 21세손이며 예안입향조(禮安入鄕祖)인 김효로(金孝盧, 1455∼1534)의 손자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종택은 별당·정침·사당·재사·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정침에 부속된 건물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一자형에 오른쪽으로 2칸 마루와 방을 달아 ㄱ자형을 이룬 큰 규모의 별당이다. 왼쪽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신문(神門)이 있다.

후조당이란 당호(堂號)는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며 대청 안에 걸려있는 ‘後彫堂’ 편액은 퇴계선생의 글씨인데 내 눈에는 ‘臨淸閣’ 글씨보다는 한 수 떨어지는 느낌이다. 글자 크기가 고르지 않아 균형감과 글자 획의 힘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진다.

 

 후조당 현판(퇴계선생 글씨)


2. 탁청정(濯淸亭)

탁청정은 김효로의 둘째아들인 김유(金綏, 1491∼1552, 호는 濯淸)가 중종 36년(1541)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탁청정은 지금까지 내가 본 정자 중에서 가장 잘 지어진 정자로 느껴졌다. 집을 지은 나무의 재질과 규모면에서 임청각의 군자정보다도 한 수 위라고 느껴졌다.  정면 4칸, 측면 3칸이지만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팔작지붕으로, 두 칸이 방이며 네 칸이 대청마루다, 대청은 높은 호박 주춧돌에 큰 허주를 높이 세워 다락을 만들고 둘레는 계자난간을 붙였다.

정자 안에 있는 현판에는 농암 , 퇴계선생의 시구(詩句)도 있다.

대청에 현판된 ‘濯淸亭’ 편액(扁額)은 한석봉(韓石峰, 1543∼1605)의 글씨다. 도산서원 편액도 석봉 한호의 글씨인데 부족한 내 눈에는 濯淸亭 글씨가 陶山書院 편액보다 한 수 위인 것처럼 보인다.

탁청정 현판(한석봉 글씨)

 

본래 탁청정은 이곳으로 옮기기 전 외내 군자리의 푸른 시내가 언덕 위 시원하고 운치 있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옮겨 온 곳에는 푸른 시내가 없어 옛 맛을 상상하기가 어려워 아쉬웠다. 탁청정 대청마루에 누워서 오천군자리 마을을 내려다보니 아늑하고 편안하면서도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본래의 제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풍수를 보면, 옮겨온 오천 군자리는 산의 7부 능선에 들어서 있다. 앞에 있는 골짜기는 물도 없으면서 깊기만 깊다. 뭔가 불안하고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다.


퇴계선생이 놀았던 도산구곡 <제1곡이 운암(雲巖), 제2곡이 월천(月川), 제3곡이 오담(鰲淡), 제4곡이 분천(汾川), 제5곡이 탁영(濯;), 제6곡이 천사(川砂), 제7곡이 단사(丹砂), 제8곡이 고산(孤山), 제9곡이 청량(淸凉)>

 중 제일곡인 운암곡(雲巖曲)이 바로 군자리다.

수려한 낙동강의 운암곡, 즉 구름과 바위와 물안개가 흐르는 고요하고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을 떠나 이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군자리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600년 동안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 자기 대에 수몰될 수밖에 없었던 슬픔을 말로써 형용할 수 있을까?

안동댐이 그토록 절실히 필요했던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유교문화박물관이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으로 향했다.

유교문화박물관은 2006년 6월 국학진흥원 안에 설립된 유교전문박물관이다. 조선시대의 선비의 삶과 정신을, 우리 전통문화의 멋과 향기를 돌아보는 좋은 학습장이다. 둘러 보니 유익한 것이 많았다.그 중 이곳에서 새롭게 배운 한 가지만 들면,


우리나라 과거제도는 세조 2년(1466)부터 정착이 되었다. 대과 문과는 33명인데 그중 갑과는 3등까지고, 을과는 4등부터 10등까지 7명이고, 병과는 11등부터 33등까지 23명이다.

1등을 장원(壯元), 2등을 방안(榜眼), 3등을 탐화(探花)라고 부른다.

생원과 진사 합격자는 급제(及第)라고 하지 않고 입격(入格)이라고 한다.

세종 이후 생원, 진사 각각 100명으로 관례화되었다.


볼 거리, 읽을 거리가 너무 많았지만 날도 저물고 몸도 피곤하여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다음에 한 번 더 올 생각으로 마음을 접고 숙박지인 농암종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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