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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세례요한의 활동
(누가복음 3 : 1 - 6)
서 론 : 4복음서 어디나 세례요한의 등장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있어서 그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그가 오실 메시야 앞에 먼저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 말라기를 통해 그의 선지자적인 사명이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말4:5-6, 사40:3-5). 요한은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역에 충성하므로 순교의 영광을 누리고 하나님께 돌아간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의 등장
누가는 눅3장에서 세례요한의 활동시기에 대하여 역사적인 근거를 상세히 들고 그 배경을 설명해 주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같은 세례요한의 활동시기에 대한 증거는 또한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와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1) 요한의 활동은 디베료 가이사아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세례요한의 활동은 주후29년경을 말하는데 이런 역사적인 연대는 여러 학설이 다 일치하기가 어렵습니다.
(2)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지방에 파송된 것은 5대 총독으로 주후26-36년경 사이에 유대를 통치한 사람으로 그의 이 같은 통치기간에 세례요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3)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있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와있는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 이 자는 주전4년-주후39년경까지 왕으로 있었습니다.
(4) 헤롯의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이 빌립은 헤롯1세가 예루살렘엣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얻은 아들로 주전4- 주후34년에 이르기까지 종신토록 왕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5) 다음에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안나스는 주전6년에 임명된 대제사장으로 15년에 해임되었지만 그는 계속 산헤드린의 정신적 통치자로 군임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주후18년-36년 사이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2. 세례요한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이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세례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메시야의 예언자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한 것은 요한에게 주신 선지자적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하실 때는 반드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선지자란 꿈이나 환상이나 이적이나 기사를 보이는 사람은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몽사나 이적은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미혹과 유혹의 도구로 쓰실 때도 있습니다(신13:1-5). 꿈 이야기나 이적을 따르는 신앙은 가장 위험스런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실 때는 반드시 무엇을 고하라고 명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만약 선지자가 방자히 고하라고 하지 아니한 말씀을 전하면 그 선지자를 일컬어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2) 요한이 받은 선지자의 사명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람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와 세례’란 말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세례는 회개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세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둘은 구분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때 사용되는 물은 그 물에 죄 사함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란 말씀에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는 그 물이란 곧 주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은 이런 뜻에서 죄 사함의 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온전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세례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가 없이는 사죄의 은혜가 따를 수 없습니다. 회개란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는 일입니다.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회개란 양심의 악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에는 의의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요단강 들판에 등장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결 론 : 누가는 이 같은 세례요한의 요한의 선지자적 사역이 바로 이사야로 예언하신 바 그 예언의 성취임을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세례요한의 등장을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메시지의 핵심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내용인데 그러기 위해 너희는 그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길은 바로 회개의 세례를 말합니다.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첩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평탄케 한다는 말은 그 이름을 믿고 그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이 세례요한의 외침이 필요합니다.
(11)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누가복음 3 : 7 - 17)
서 론 :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요단강 부근의 광야에 메아리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신날 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그의 외침은 많은 무리들에게 책망으로 나타났으며 오실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회개의 세례로 나타났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무리들이 혹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들의 심중에 의논하는 것을 보고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세례로 구분하므로 메시야를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1. 요한의 책망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크게 책망했습니다. 이런 책망을 들은 무리들은 교만과 외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군임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마3:6-7).
(1)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독사란 무서운 독을 지닌 뱀으로 이 독은 죄와 사망의 독을 가리킵니다. 이 독사라고 표현한 대상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지적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영적인 의미로 사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의 아비인 사단을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의 독을 풍기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 같은 책망을 듣기에 충분했습니다.
(2)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말은 ‘휘포데이크뉘미’로 찾아내어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 비밀을 보여주어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누가 말하더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오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만이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천국의 보증서인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의를 추구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보내시어 구속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완악한 마음을 깨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임을 강하게 경종한 것입니다.
(4)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의 긴급성을 경종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놓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도끼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한 말입니다. 나무뿌리란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어야 할 인류를 말합니다. 이 같은 경종에 대하여 예수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요15:2).
(5) 이 같은 세례요한의 책망을 듣고 있든 많은 무리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이처럼 하고, 세리들은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고, 군병들에게는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은 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2.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차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는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바라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혹 요한이 메시야가 아닌가 기대하면서 심중으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1)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였습니다. 요한은 메시야를 증거함에 있어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주는 세례와 메시야갸 주는 세례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물세례는 정결케 하는 율법적인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한의 이런 회개를 위한 세례의식은 메시야를 맞이하는 일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요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베푸실 세례에 대하여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한 성령세례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일이 있습니다(행2:1-4). 이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 실질적으로 임했습니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하심을 말하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으므로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신 이 불 세례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산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일은 요한이 세례란 말을 부친 점에 이 불 세례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이란 말을 쭉정이를 태우는 진노의 불, 심판의 불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불은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불은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는 권능으로도 사용됩니다(사6:6, 말3:3, 계3:18).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결 론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의한 종말적인 심판을 말합니다. 이때 알곡은 곡간에 들어가게 됩니다. 알곡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이요 쭉정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들입니다.
(1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누가복음 3 : 18 - 38)
서 론 :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함에 예수님의 공새애이 등장에 앞서 세례요한의 무대 뒤로의 퇴장을 먼저 기술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그의 사역에 있어서 약 6개월 가량 앞섰지만 1년간의 공생애가 서로 겹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세례요한을 퇴진시키려고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을 이곳에 미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리”고 말한 세례요한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나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나이 삼십은 공생애에 들어서는 법적인 연령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이에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요단에 이르러 백성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 중에 끼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 예수님의 사역에는 그의 세례 받으심이 반드시 필요하셨습니다. 세례란 원래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전혀 없으시고 정결하게 하실 필요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으로서는 세례를 받으시거나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처럼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지만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치르시는 속죄 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사역을 완성하기까지는 죄인들과 같은 자리에 계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시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하실 때 요한은 극구 사양하면서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고 말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 받는 일에까지 모든 사람의 본이 되신 것입니다.
(3) 세례요한으로 메시야이심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있어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여 그를 증거하게 된 동기가 바로 예수님게 대한 세례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는 이러합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세례가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32-34).
2. 성령의 임하심과 하늘의 음성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1) 세례가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아마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할 그때에 세례가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영이심으로 그의 형체의 나타나심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에 성령의 나타나심은 인류의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섭리하시고 성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루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모든 일을 성취하신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곳에 함께 나타나신 것입니다(눅4:1).
(2)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이 순간 하늘에 계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머리 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말씀이 육신이 되신 낮은 자리에서 세례요한 앞에서 죄인들의 대속제물이 되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낮아지신 예수님은 이제 위로가 필요하신 몸이 되었습니다. 배고프시고 유혹을 받게 되시고 시험을 당하시고 두려움도 당하셔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그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종의 몸으로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예수님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는 위로의 말씀과 사역의 확신을 주셨고 성령께서는 한량없는 능력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아들로서 하셔야 할 모든 사역을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결 론 : 23절 이하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이곳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님은 족보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족보란 혈통의 계보인데 예수님은 인간적인 혈통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동정녀의 몸을 빌려 “독생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커다란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혈통적으로 내려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실 인류의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그리고 이 족보에 나타난 주님의 이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온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주실 둘째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3) 시험받으신 예수님
(누가복음 4 : 1 - 13)
서 론 :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럼을 받으실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 그를 시험할 자격이 있을 것입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그 분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시는 바가 큰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왜 시험을 받으셔야 했나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왜 필요한 것인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성령께서도 예수님과 함께 동역 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육신으로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능의 행사가 필요하십니다. 인성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권능의 행사에 있어서 성령의 동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리심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는 충만이란 말은 ‘플레레스’로, 가득하다,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로 사역하시기에 충분한 성령의 임재하심, 성령의 능력의 부여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이 같은 능력을 부여받으시므로 그의 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기 위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기 위함이십니다(히4:15).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시험을 도우시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으며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으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심에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했으며 둘째 사람으로 반드시 마귀의 시험의 승리자가 되셔야 했습니다.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아담 안에서 사망을 유산으로 넘겨받았습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회복하시려면 이기셔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둘째 사람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셔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
마귀의 공격은 간교하기 때문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형편과 처지를 부단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틈새만 보이면 여지없이 공격을 가해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시험을 받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찾아왔습니다. 사십 일간의 금식이 끝난 직후에 예수님을 시험으로 넘어지게 하려고 날카로운 공격을 시도한 것입니다.
(1) 마귀는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시험이란 예수님으로 넘어지게 하려는 마귀의 실험이기 때문에 이 같은 마귀의 말은 동정이나 배 곺음을 면해 보라는 뜻에서 준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이 같은 간계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반격을 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마귀의 첫 번째 시도를 물리치셨습니다.
(2) 마귀는 두 번째 시험을 시도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왕의 영광을 이 세상에 있는 권세와 영광에 결부시켜 그 길을 택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경배하라고 하는 마귀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다시 한번 참담한 실패를 당했습니다. 그 옛날에 에덴에서 아담을 유혹했을 때 써먹었던 그의 솜씨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3) 마귀는 이번에는 마지막 시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유혹을 시도했습니다.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시편에 있는 말씀과 결부시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도록 시도했습니다. 마귀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시험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각 마귀의 간교함을 간파하시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결 론 : 마귀의 말에는 인간적인 합리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찾게 하는 것, 세상 영광을 보여 주는 것, 하나님을 시험케 하는 일 등,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거나 진리에 눈이 어둡고 육신의 일에 눈을 돌리는 한, 이 같은 마귀의 유혹에 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이한 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의 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는 이기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늘 마귀의 시험을 대비해야 합니다.
(14) 메시야의 증거
(누가복음 4 : 14 - 24)
서 론 :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의 권능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메시야적인 모든 사역은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로 예언된 말씀을 이루어야 하셨기 때문입니다(마46:12-16). 이미 예수님의 소문은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면 여러 회당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셨으며 그 결과 뭇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1. 나사렛에서 일어난 일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 이르셨습니다.
(1) 예수님은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규례대로 들어가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석해 오셨음을 가리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2)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셨다고 했습니다.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 순서는 먼저 회당의 직원이 법귀에서 율법의 한 두루마리를 풀어 가지고 읽을 사람에게 넘겨줍니다. 두루마리를 읽을 사람은 대개의 경우 회당장이 지명하는 데 회중 가운데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나 아니면 처음 손님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을 지명하여 읽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그 회중 가운데서 가장 뭇 사람의 시선을 끌었었으며 회당장에 의해 지명 받을만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라든가 그가 가르치신 교훈 등이 이곳에서도 그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에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넘겨받은 두루마리는 마침 이사야의 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책에서 이처럼 기록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곳은 이사야61:1-2절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글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에서 어느 대목을 분명히 찾으셨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의식적인 일입니다. 이사야의 글에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메시야의 사역은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시는 구원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으셨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눅4:1,14).
(2)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공로가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사람,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바라는 사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 물질에 욕심을 품지 않고 그날 그날의 양식에 만족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3)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합니다. 메시야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란 말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기름부음을 받는 이유는 메시야의 사역이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4)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세상에 보내심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포로란 죄의 포로를 말합니다. 이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죄의 사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의 결박을 풀어주고 자유케 하시는 일이 메시야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한다고 했습니다. 눈먼 자란 마음의 눈을 말합니다. 메사야는 눈먼 자에게 신령한 눈을 열어주십니다. 소망의 눈, 천국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눌림이란 억압을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생은 율법에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서 자유함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란 복음의 시대를 말합니다.
(5)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 신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목수 요셉의 아들이 어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메시야를 배척하는 그들에게 두 가지 속담을 들려주셨습니다.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배척한 메시야가 앞으로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여 찾을 날이 올 것이라고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5)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
(누가복음 4 : 25 - 30)
서 론 : 예수님이 고향이신 나사렛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일은 나사렛사람들의 거역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실패가 없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는 곳일지라도 그곳에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겔3:17-19).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은혜를 받은 것은 이들에게 이스라엘에게 없었던 아름다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엘리야 시대의 경우
엘리야 시대에 극심한 흉년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도우심을 받았는가를 상기시켜 주시면서 이스라엘 안에 있었던 그 수많은 과부들이 아니라 이방 땅 사렙다에 있는 한 과부가 아니냐고 하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에 있었던 흉년은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모든 백성들로 여호와를 떠나게 하고 산당에서 바알신을 섬겨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게 하셔서 그들의 악을 징계하셨습니다.
(2)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과부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십니다. 특히 재앙의 날이나 기근의 날에 이들 과부들에게 특별하신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엘리야를 공궤할 과부를 찾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시므로 그 과부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에는 엘리야를 영접할만한 믿음의 과부가 없었습니다. 엘리야를 숨겼다가 아합 왕에게 잡히는 날이면 죽임을 당할 위험이 따랐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흉년에 엘리야를 대접할 말한 믿음의 과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참 믿음의 과부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과부는 이스라엘에 있었던 과부가 아닙니다. 이방 땅인 사렙다에 살고 있는 이방 여인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은 사렙다와 같은 지명입니다.
(4) 이 여인은 믿음으로 엘리야를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과연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을 믿는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언약을 지키시므로 복을 주십니다. 엘리야는 성문에서 나무 가지를 줍고 있는 이 과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17:13-14). 이 과부는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과부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약속하신 복을 그의 가정에 내려주신 것입니다.
2. 엘리사 시대의 경우
사렙다 과부의 경우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다음에 또 문둥이로 있다가 믿음으로 고침 받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경우를 들어 나사렛 사람들의 불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문둥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나아만은 자기 집 종으로 있는 한 소녀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왕하5:1-4). 나아만은 일신상 부족함이 없는 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소망 없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 온 자기 집 하인의 말을 믿고 그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듣고 멀리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찾아 나섰으니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믿음이었습니다.
(2) 나아만은 엘리사의 어려운 조건을 결과적으로 순종하므로 그 몸의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명예나 위신이나 권위를 더 버리고 엘리사가 명한 대로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일곱 번 담갔습니다. 그가 요단강 물에 몸을 담근 것으로 문둥병이 치료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의 순종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의 문둥병자가 이스라엘에는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후일에 있을 예수님의 교훈을 위하여 이방인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의 이 같은 역사적인 사건의 인증은 나사렛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시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떠날 때 그들을 버리시고 믿음이 있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롬11:16-20). 이 말씀은 또한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데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배척하고 진리를 거슬리는 나사렛 사람들을 버리시고 믿음이 있는 이방인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의 말씀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16) 말씀의 권세
(누가복음 4 : 32 - 39)
서 론 : 예수님은 쉬실 틈이 없으실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발걸음을 가버나움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 가버나움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여전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마가복음에서는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막1:38-39).
1. 권능 있는 말씀으로 들림
회당에 모여 있었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심히 놀랐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자기들을 가르쳐온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에 그런 위엄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니고 계시는 영원한 모습을 우리는 요한복음1장에서 찾게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라”(요1:1-2).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께는 하나님의 엄위가 있으십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권세 있는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6:63). 영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울릴 때 그 말씀이 좌우의 날선 검이 되어 심령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므로 권세 있는 말씀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이르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이 권세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아버지의 권위가 있으므로 권세 있는 말씀으로 들린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스스로 그의 말씀에 대하여 영원한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절대불멸의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가 따른다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말씀으로 나타내신 주님의 권세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후, 친히 그의 말씀의 권세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곳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귀신을 더럽다고 표현한 것은 귀신은 죄악의 존재지만 회개를 모르고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럽다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견딜 수 없어 부르짖었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귀신이 느끼는 영적 괴로움의 부르짖음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귀신의 호소를 듣고 귀신에 대한 몇 가지 비밀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귀신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고 외쳤는데 이 사람에게 들어온 귀신은 하나인 것이 아니라 여럿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란 말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무슨 상관이냐는 말은 자신들이 아직은 멸망 받을 시기가 아닌데 어찌하여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귀신들을 없애버리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무리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활동할 것입니다. 그의 최종적인 운명은 천년왕국 후에 영원한 지옥, 둘째 사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의 활동을 용서치 아니하십니다. 그의 말씀의 권능으로 쫓아내시고 그 사람으로 더러운 귀신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다음에 귀신들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기까지 메시야의 태어나실 일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의 방문과 예방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영적 존재가 한번 타락하면 그 타락을 회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세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귀신은 쫓겨나고 그 사람은 다친 곳이 없이 온전해졌습니다. 이에 이 같은 일을 바라본 회당 안의 사람들이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 도다”고 하며 놀랬습니다.
결 론 : 이 같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소문이 그 근처에 도루 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그 집에는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바 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열병을 꾸짖어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병에서 일어나 곧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봉사에 들어갔습니다.
(17)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누가복음 4 : 40 - 44)
서 론 :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고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너무나도 값진 인생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일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할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을 온전히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환영하며 환대하는 무리들로부터 자기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뿌리치면서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각색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말씀으로 쫓아내셨는데 이런 소문이 순식간에 그 근처사방에 퍼져나갔습니다. 또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에 붙들린 시몬의 장모의 병을 꾸짖어 고쳐주신 일 등의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나가자 그 날 해질 무렵이 되니 각기 자기 집에 병 있는 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 그의 안수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안수하심은 몇 가지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1) 주님의 손은 창조적인 권능의 손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권능의 손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의 안수하심은 그의 창조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에 못 고치실 병이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그의 거룩한 손을 병자의 더러운 환처에 친히 얹으신 일은 그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긍휼의 표시입니다. 문둥병자의 고름나는 환부에도 손을 데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사53:4).
(3) 예수님이 각색 병든 자를 고쳐 주신 것은 두 가지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병고침의 권능을 복음을 전하시는 전도의 방편으로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의 기적은 그 소문이 당장에 그 근처사방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므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는데 그쳤을 뿐 좋은 결실을 거둔 경우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병 고침의 기적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인생들이 불쌍히 여기시어 치료를 베푸신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손은 자비와 사랑의 손길입니다. 믿는 자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치료의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치료의 체험이 그들의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체험의 신앙을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체험적인 신앙은 병을 고침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취되는 신앙적인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2. 귀신의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심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의 각색 병을 고치실 때 귀신들이 나가면 소리질렀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의 외치는 소리는 다른 소리가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고 소리지른 것입니다. 이 귀신의 소리는 두려움에서 비명처럼 외치는 몸부림이지만 예수님은 이 같은 귀신의 소리지름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귀신의 이런 소리지름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으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을 그리스도로 들어내 놓은 귀신의 소리지름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에 그의 사역에 중대한 차질이 생겨날 것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현시적인 영광의 메시야 대망인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당장에 유대인을 중심한 다윗의 왕국을 건설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기대하고 그에게 소망을 둔 이유도 알고 보면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 같은 메시야로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헛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셨을 때도 이 같은 기적을 바라본 군중들이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인 줄로 알고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요6:15).
예수님은 그날 밤을 어느 곳에서인가 쉬시고 다음날 아침, 아침이 밝았을 때에 일어나시어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동리에 사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잠깐동안만이라도 기도하실 수 있도록 가만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간청을 즉시 물리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분명하신 목적을 가지시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아가신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하실 사역에 관한 말씀인데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다고 하신 말씀에서 전도란 사명이 얼마나 위대하고 광범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도란 말씀 속에 그의 낮아지심과 그가 당하신 모든 고난까지 모두 포함시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에 성공하신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 위대한 성공을 거두신 것입니다. 우리도 전도에 성공하는 성도가 됨으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