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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생활사 독후감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을 읽고
역사학과 20175534 김서영
I. 서론
1) 책 소개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은 허인욱이 집필하였으며, 출판사는 돌베개, 출판일은 2010년 9월 6일이다.
2) 저자소개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의 저자 허인욱은 전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를 거쳐 고려대 한국 사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역사학도로서 전통 무예, 애니메이션에도 관심을 가져 다양한 역사서를 집필해 왔다. 허인욱이 지은 책으로는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무예풍속사』,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사』 등이 있다.
3) 목차
➀ 조선의 할아버지, 육아일기를 쓰다 – 출생에서 돌잔치까지
➁ 책벌레가 되어야 한다 – 아이들은 서당에 다녔네
➂ 시집가고 장가오는 게 이리 힘들어서야 – 인륜지대사, 혼례
➃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 관리의 등용문, 과거시험
➄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항하여 – 조선 양반네들의 관직생활
➅ 60이라는 특별한 축하 – 회갑, 회혼례, 회방
➆ 삶과 죽음의 갈림길 – 3년으로 부모의 은혜를 어찌 다 갚나
4) 책 선정 이유
조선시대 생활사 수업을 듣고 시험공부를 하면서 내가 배운 내용들을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게 항상 아쉬웠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직접 겪어보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내가 조선시대의 일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림과 글 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옛 그림 속에서 양반들의 일생 및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문화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이 책의 특이점 중 하나는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이 사람들의 출생에 관한 것이라면, 2장이 서당, 3장이 혼례의식, 마지막 7장이 장례문화에 관련되어 있다. 즉, 1장부터 7장의 내용을 순차적으로 보면 출생부터 죽음까지 마치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이런 구성방식이 내가 조선시대 생활의 전반적인 내용을 알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책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7장, 삶과 죽음의 갈림길 _ 3년으로 부모의 은혜를 어찌 다 갚나 라는 부분이었다. 이번 중간고사 때 공부한 상례의 절차를 그림으로 확인해보고, 그 세세한 내용까지 배워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생활사 수업에서 배웠던 상례의 절차를 더욱 심화적으로 공부해보고, 당시 사람들의 유교적 가치와 효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선정하였다.
II. 본론
1) 출생
옛 사람들은 대를 잇는 일을 매우 중시하여 혼인한 후 몇 년이 지나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온갖 기원을 드리는 것이 당연했다. 사당에서 가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고, 굿을 하는 등의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아이를 가진 후에도, 난산일 때에도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일반적으로 태를 자르고 뜨거운 물로 아기를 목욕시킨 후 미역국에 밥을 말아 산모에게 먹였다. 민간에서는 태어난 아이의 태를 자를 때 칼이나 가위 등 날 있는 쇠를 사용했는데, 이를 ‘삼 가른다’고 한다. 이렇게 자른 태는 깔았던 짚과 함께 사나흘 구석에 세워 두었다가 태우거나 묻었다.
풍수학에 “태장경에서는 대개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그중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장성하게 된다고 했다. 하물며 그 현명하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하는 것 모두 태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중략)”이라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옛 사람들은 사람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성함과 쇠함이 태와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출생하여 만 1년이 되는 첫 생일을 기념하는 돌에는 어린아이를 위해 큰 잔치를 연다. 당시만 해도 전염병에 희생되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태어나 돌을 맞을 때까지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을 맞는 일은 새 생명이 오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받고 더불어 아이의 장수와 복을 비는 중요한 행사였다.
2) 조선시대 서당
서당의 본격적인 확산은 중종 때 사림파의 향약 보급 운동 및 향촌 사회의 구조 변동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후 제향 기능을 가지고 있는 향교나 서원이 제약을 받은 것과 달리, 서당은 위치하고 있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서당이 보편화되었던 이유는 글공부의 가치가 높기도 했지만 국가 차원에서도 유학의 진흥을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정에서 수령이 지방민을 통치할 때 주력해야할 조목인 ‘학교흥’에서 서당을 설치해 백성을 얼마나 잘 교화했는가를 고을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던 것에서도 국가의 장려정책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서당이 증가하면서 양반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도 교육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먼 시골의 학동들이 배우기 원하는 것은 소지장의 글이다. 그러므로 베껴서 외우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합격할 가망이 거의 없는 시골 학동들이 서당에서 글 공부를 한 이유는 사서삼경을 배우기보다는 자신의 억울함을 관청에 하소연하기에 적합한, 소지장과 같은 탄원서 쓰는 법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실제 과거 시험이 큰 의미가 없는 계층에서 필요로 했던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지금의 학교처럼 서당에서도 행사가 존재하였다. 아이들이 책을 한 권 떼면 훈장에게 약주와 음식을 대접하고 학동들에게는 떡을 해서 먹이는 책거리 외에도 서당에서는 개접례, 파접례 등의 행사가 있었다. 계접례는 지금의 개학식과 비슷한 행사이며 파접례는 서당이 일정한 기간의 학습을 끝내고 하는 행사였다.
3) 혼례의식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남자는 열다섯, 여자는 열네 살이면 결혼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혼례를 의논하는 의혼은 아들딸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면 가능했다. 더 어린 나이에도 가능했는데, 두 집안의 부모 가운데 지병이 있거나 부모의 나이가 만으로 쉰이 넘고 열두 살 이상의 자녀가 있을 때는 관에 신고하면 혼인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신랑 될 사람의 집에서 신부 될 사람의 집으로 규수를 간택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하는 납채 후에 신부의 이름을 물어 길흉을 점치는 문명을 한다. 그 후 두 집안이 혼인을 하기로 정한 후에는 사주단자를 보내 신부 집에서 신랑의 연명을 알게 한다. 신랑의 연명을 받은 다음에 결혼 날을 받아서 보내주는 연길단자를 하고, 마두납채(신랑의 말 머리에서 납채가 이루어진다)를 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행해진 후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이하는 친영을 통해 성혼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결혼 후 신랑이 신부 집에서 머물러 사는 풍속이 있었다. 고구려 서옥제 등에서 그러한 예를 살필 수 있는데 이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이러한 풍속이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집안에서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여 친영례를 정착시키고자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행해지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절충하여, 신부 집에서 교배례(신랑과 신부가 서로 절하는 의식)와 합근례(술잔과 표주박에 각각 술을 부어 마시는 의식)을 행하고 다음 날 까지 혹은 사흘 정도 신부 집에 머문 다음에 신랑집으로 돌아가 현구고례(신부가 시부모님을 뵙는 예)를 행하는 반친영법이 정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예는 너무 번잡하여 왕공과 귀인의 경우에는 다 갖추었지만 대개 큰 틀만 지킬 뿐 융통성 있게 혼례에 대처했다.
4) 과거시험
조선시대에 관직에 나가는 방법은 천거, 음서, 과거 등 세 가지 제도가 있었다. 천거는 식년마다 3품 이상의 관료가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제도였다. 식년은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데, 이해에 과거를 실시하거나 호적을 조사했다. ‘음서’는 2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제에게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 사회의 속성을 보여 주는 제도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제도는 ‘과거’로, 과거 시험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직 종사자를 뽑는 잡과가 존재했다. 형식상으로는 천민을 제외한 일반 백성이라면 누구나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반 백성들은 응시하기 힘들었으며, 결국에 양반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시험 장소는 두 군데 혹은 세 군데를 두었는데, 이를 분소법이라 한다. 응시자인 거자와 시험관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면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를 수 없게 한 것이다. 당시에도 대작, 예상 답안지 만들기 등의 부정행위가 많았다. 부정행위를 하면서까지 과거에 응시한 이유는 그만큼 과거 합격이 갖는 사회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문, 무 과거의 급제자에게는 의정부나 예조에서 축하연을 베푸는데, 이를 은영연이라고 한다. 은영연 다음 날에는 문, 무과 급제자가 모두 문과 장원 집에 모여 왕에게 사은례를 드리고, 그 다음날에는 무과 장원 집에 모여 성균관 문묘에 나가 알성례를 드린다. 대과, 소과를 막론하고 합격자들에게는 사흘에서 닷새 동안 시가행진을 하게 하는데 이를 유가 또는 성행이라고 한다.
5) 관직생활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우선 관리 임명장인 사령장을 받는다. 관직과 함께 품계, 즉 직급을 명시한 증서가 사령장이었다. 이 사령장에는 그 사람을 관리로 발령을 내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의 서명인 서경이 반드시 들어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후 관리가 되려면 일종의 신고식을 거쳐야 했는데, 이를 면신례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고식은 발령이 난 관서의 집단으로부터 허락을 얻는 허참례와 신입 관리가 같이 일할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는 면신례로 나눌 수 있다. 급제자들이 근무할 부서를 배치받으면, 부서의 선배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했는데, 선배의 모욕적인 언사나 행위에도 참아야 했다. 이러한 행위를 희자 또는 투자라고 한다.
청직에서의 가장 중요한 일은 언관이다. 언관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단 기준이 분명해야 하고 행동에 흠결이 없어야 했다.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이기에 자신의 소견을 당당하게 개진하는 기개 역시 필요했다. 언관의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삼정승 등의 고위직에 올라가지 못했기에 홍문관을 포함한 언론 삼사는 관료사회의 꽃이었다. 청요직에서의 청직 외에 요직은 관리의 인사권을 쥔 이조, 군사권을 쥔 병조, 재정을 담당한 호조를 가리킨다.
관찰사는 국왕의 특별한 명령을 받은 사신으로서 끊임없이 도내를 순회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수령을 비롯한 모든 외관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일을 하였다. 지방 장관의 기능을 하며 도내의 모든 군사와 민사를 지휘, 통제했으며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상당의 직단권이 주어졌다. 관찰사는 수령들이 해야 할 일곱 가지의 일, 즉 수령칠사의 수행 여부를 매 계절마다 종합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는데, 이런 수령칠사는 지방관의 기본 임무이면서도 중요한 일이기에 관찰사와 수령 사이에는 상피법이 적용되었다.
“이현보가 경상관찰사로 있을 때에 감사는 풍헌 직책을 겸했는데, 본도는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곳이니, 사사로이 통하는 문을 한번 열면 정치와 법도가 무너지게 된다 하면서 한계를 엄하게 하여 자제와 친척이라도 감히 공관에 출입하는 자가 없었다.”에서 볼 수 있듯 부정부패를 미리 예방하고자 하는 노력도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일반적으로 일흔이 되면 나이가 늙었다며 관직을 반납한다는 뜻으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치사’라고 한다. 그리고 정 3품 이상의 당상관으로 나이 일흔이 넘어 치사한 관료를 대우하기 위해 ‘봉조하’라는 제도를 두었는데, 국가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단지 정월 초하룻날 조신이 임금에게 문안드리는 정조와 임금 탄신일 등의 조하의에만 참여했다.
6) 회갑, 회혼례, 회방연 _ ‘60’
“회갑 이후의 나이는 모두 하늘이 내린 것이다. 하늘의 은혜가 그처럼 넓고 크니 다른 것이야 바랄 것이 있겠는가” 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옛 사람들에게 60년을 산다는 것은 매우 큰일이었다. 회갑 날은 장수를 자축하여 잔치를 열고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회갑을 맞는 사람은 부모가 생존하고 있을 때는 색동옷을 입고 부모에게 절을 하고, 재롱을 떨기도 했지만, 돌아가셨을 때는 애절한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부부의 연을 맺고 60년을 같이 살면 자손들이 이를 기념해 그 부모를 축하하는 잔치를 여는데, 바로 회혼례이다. 회혼례를 올릴 때는 노부부가 신혼 때와 똑같이 대례청을 차리고 혼례식을 차린다. 회혼례는 부부 모두 살아야 가능했던 것으로, 회갑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회방연은 생원, 진사시나 문과 등의 과거에 급제한 후 60년이 지난 뒤에 열리는 잔치다. 회방연은 문과 급제의 평균 나이가 30대 후반임을 고려하면 거의 아흔 살이 되어야 가능한 잔치였다.
7) 상례문화
이 책에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성일의 시문집인 『학봉집』의 순서를 따른다. 『학봉집』에서는 먼저 죽음을 확인하는 속광의 절차를 한다. 입이나 코에 솜을 대어 숨이 끊어졌는가를 확인한다. 그 후 ‘복’, ‘초혼’ 등으로 불리는 죽은 자의 혼을 부르는 의식을 한다. 이름 앞에 주소를 먼저 외치고 “복, 복, 복”하고 세 번 소리친다. 초혼 후에 입에 뿔로 만든 숟가락을 넣어 이를 받치는 ‘설치’를 한다. ‘반함’을 할 때 구슬을 물리기 위해서이다. 그 후 시체가 굳기 전에 몸을 펴서 반듯이 눕혀 놓고 묶는 ‘습’을 한다. 그 후 구멍이 없는 구슬을 입의 좌우에 두고, 깨끗하게 씻은 쌀을 입 속에 조금 채우는 ‘반함’을 한다. 이는 자식이 어버이의 입 속을 차마 비워둘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이 반함을 하지 않으면 매우 큰 죄로 여긴다. 초혼에 사용한 옷을 상자에 담고 비단을 묶어서 신이 의지하게 하는 혼백을 설치하고 영좌를 올린 다음 명정을 세우고, 치관을 한다. 시체를 옷과 홑이불로 싸서 묶는 소렴과, 망자를 관 속에 넣는 의식인 대렴은 사대부의 문화에 해당되는 것이고, 임금의 경우에는 사흘 째에 ‘소렴’을 하고 닷새째에 ‘대렴’을 했다. 상주들이 상복을 입는 성복을 하고 성복제를 지낸다. 관을 방에서 들고 나와 상여로 옮기는 천구를 하고, 상여가 상가를 떠나 장지로 출발하는 발인을 한다. 발인 시에는 견전제를 지낸다. 상여를 장지로 운반하는 것을 ‘운구’, 또는 ‘운상’ 이라고 한다. 망자가 묻히는 산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무덤의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략) 무덤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혼이 잘 지낼 수 있도록 자리를 잡으면 그 혼은 막대한 이익과 부, 행복으로 후손들에게 보답하겠지만 무덤에 거주하는 혼이 불편함을 느끼면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소홀히 한 후손들에게 화를 폭발시켜 갖가지 재앙을 엄청나게 퍼부을 것이다.”에서 묘지 선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구덩이를 팔 때는 길이와 너비를 금정이라는 나무틀을 이용하여 판다. 그리고 회격을 하고 관을 묻고 다시 회격을 하고 흙으로 채운다. 신주를 다 쓰면 신주를 대신하던 혼백을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든다. 봉분을 만든 후에는 봉토제와 산신제를 지낸다. 집사가 영좌를 철거하고 상주는 상여에 혼백을 모시고 왔던 길로 집으로 되돌아온다. 이 때 망자의 옷가지나 상여나 상례에 사용한 기구는 불태운다. 반혼한 혼백을 빈소에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제라 하는데, 우제는 총 3번에 걸쳐 한다. 삼우제 3개월 후 날을 잡아 졸곡제를 지내고 다음에 부제를 지낸다. 그리고 사망 1주기가 되면 소상을, 2주기가 되면 대상을 지낸다. 대상 후 두 달 째 되는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이날 탈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담제 때 탈상을 하고 사당 고사를 한 번 더 지내는 길제를 하면 상례가 모두 끝난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이 탈상을 할 때 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이다. 상례는 집안이나 지역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이만큼 복잡한 것은 육체를 가진 한 사람의 일생을 정리하는 의례이기에 그 어떤 의례보다 최선을 다하자는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III. 결론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드는 생각은 조선시대 살았던 한 사람의 일생을 엿보고 왔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출생하고 사망하기까지 조선시대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눈에 그려졌고, 또한 나의 생각과 책 속 그림을 비교해보면서 당시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도 매우 흥미로웠다. 책머리에 저자가 “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어떻게 일상을 영위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라는 말을 했다. 이 책은 국가의 위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을 녹여낸 책이었다. 생각해보자면, 당시 시대를 이끌었던 것은 국가적 위인, 왕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고, 그 시대에 맞는 문화를 향유한 것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그런 사람들이 아닌, 위인들 등 ‘대인’에 집중했지, ‘소인’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그들을 대인과 소인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저자의 말을 빌려 표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생활사에서 배웠던 향도나 장승과 같은 문화들을 직접 누렸던 주체들이라 생각하니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특히, 앞서 선정이유에서 밝혔듯이 7장의 상례문화는 매우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도, 요약을 하면서도 공부했던 내용들이 떠올라 재미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알고 있던 만큼 상례의식들이 다가왔다. 열심히 외운 상례절차를 다시 곱씹어보면서 책 속의 순서와 비교해가는 과정도 매우 유익했다.
조선시대는 우리와 가깝고도 먼 시대 같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많은 역사적 수난들이 있어서 그런지 정말 역사 책 속에만 존재했던 시대 같지만, 이렇게 책을 통해 만나면 그냥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았던 전 시대의 사람들로,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조선시대의 생활을 공부하는 것은 정말 흥미롭다. 한 학기 동안 조선시대 생활사 과목을 통해 더욱 배워보고 싶다.
<참고문헌>
- 허인운,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 돌베개, 2010
-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8일 기유 4번째 기사
- 이옥(1760~1813), 『필영장사』
- 이정형(1549~1607), 『동각잡기』
- 이유원(1814~1888), 『임하필기』
- 까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첫댓글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양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양반에 대해 심도있게 조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양반에 대해 잘 알게되었습니다
옛 그림에 그려진 양반의 모습을 통해 생활상을 유추하는 것이 정말 흥미로워 보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