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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추수감사절 특강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 / 시편 126:1-6
요절 / 시편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오늘은 2023년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올해도 영육 간에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감사 제목을 주시고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일 년 열두 달 기쁘고 감사해야 하지만 오늘 특별히 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특송처럼 장미꽃이 만발한 분도 감사하고 장미의 가시로 인한 고통을 겪는 분들도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오늘 시편 126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지. 붙잡혀 갔던 이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시온으로 데려오셨을 때. 우리, 웃음을 터뜨렸네. 노래를 불렀네. 너무 좋아 믿을 수 없어 했지. 우리는 뭇 민족들의 화젯거리였네. “저들의 하나님, 참으로 놀랍군!” 그렇고말고, 우리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 우리는 그분의 행복한 백성. 하나님, 다시금 그렇게 해주소서! 가뭄에 찌든 우리 삶에 단비를 내려주소서. 절망 가운데 곡식을 심은 이들, 환호성을 올리며 추수하게 하소서. 무거운 마음을 지고 떠났던 이들, 한 아름 복을 안고 웃으며 돌아오게 하소서.』
오늘 시편은 바벨론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을 경험한 누군가가 지은 찬양시이면서 탄원시입니다. 시인은 첫째, 매우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웃음과 감격과 찬양으로 표현됩니다. 둘째,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셋째, 시인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소망하며 결단합니다. 이 시간 시인의 기쁨과 기도와 소망과 결단이 우리의 기쁨과 기도와 소망과 결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3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우리가 기쁘다고 말합니다. 행복하다고 말하고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은 밑바닥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슬픔도 있고, 때로는 슬픔도 필요하지만, 기쁨이 없다면 살아갈 의미를 찾기 힘들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쁨을 찾습니다. 기쁨이 없으면 돈을 주고라도 얻고자 합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는 이른바 좀비들의 거리라고 불립니다. 몰핀의 100배의 환각 효과가 있다는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이 온몸이 배배 꼬인 채로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매우 작은 양으로 사람을 환각 상태에 빠트리는데 매우 기분이 좋아지니 그것을 끊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몸이 망가지고 돌연사합니다. 이는 기쁨이 없는 세상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몸부림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편리하고 재미난 세상이 되고 있지만,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3절을 다시 보면 우리는 기쁘다는 말이 우리는 기쁨으로 채워졌다는 말입니다. 2절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다는 말도 웃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다는 말도 기쁨의 노래로 채워졌다는 말입니다. 채워지고 가득 차는 것은 내 힘만으로는 안 되고 누군가가 도와줘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하나님께서 포로를 돌려보내시니 꿈꾸는 것처럼 환희와 감격이 넘쳐났습니다. 이 시의 핵심 단어는 ‘돌려보내다’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님의 진노로 인해 초래된 고통의 상황이 주님의 은총이 넘치는 상황으로 회복될 때 주로 사용됩니다.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가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된 상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귀환 명령 때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고레스 왕이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낼 때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라고 말합니다. 고레스가 조서를 내렸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때를 기억하며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말합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불타고 성전은 파괴되고 성전의 기구와 모든 그릇이 바벨론으로 옮겨집니다. 유다 시드기야 왕은 사로잡혀 두 눈이 뽑히고 포로로 끌려갑니다. 고관과 귀족들, 그리고 쓸 만한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70년간 먼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합니다.
시편 137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조롱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그들은 시온을 기억하며 목 놓아 웁니다. 70년 동안 나라 없는 설움과 절망 속에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과 싸워 이긴 새로운 강대국의 왕,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에게 놀라운 조치를 합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유대인 중에는 아주 어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함께 왔다가 아직 생존한 백발의 노인도 있을 것이고 그들 부모에게서 태어난 2세 혹은 3세의 자녀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조상들이 섬기던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고레스 왕은 유대 민족과는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이방인이었지만 포로된 유대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뿐만 아니라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때 빼앗긴 성전의 금과 은그릇과 모든 보물을 함께 돌려보내 줍니다. 더 나아가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조서를 내려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도록 명령합니다. 심지어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참 신’이라고 고백합니다. 고레스 왕이 왜 이렇게 유대인들을 향한 선행을 베푸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서 그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만에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고국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그들 혀에는 찬양이 가득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웃음이고 찬양이고 기쁨의 외침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때만큼은 원망과 불평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니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큰일을 하셨네, 하신 게 맞네, 부럽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선포해도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이방인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며 조롱했습니다(시42:3).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려보내시는’ 것을 보고 감동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큰 일로 인정합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이방인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위해 큰일을 행하셨음을 깨닫고 찬양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방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 구원의 당사자인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움을 넘어 기뻐합니다. 고난과 슬픔이 컸던 만큼 기쁨도 컸습니다. 이 기쁨을 이사야서 35장 10절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도다.” 하나님께서 기쁨과 희락을 주시니 모든 슬픔과 탄식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기쁨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주님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이 주님의 구원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꿈꾸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꿈꾸는 것처럼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포로가 되어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면서 몸은 정욕에 이끌려 쾌락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물질의 종이 되어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돈을 모을까 하는 생각에 매여 있었습니다.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죄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동역자들을 정죄하면서 밉고 못마땅해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죄의 포로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도저히 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죄의 포로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 자체가 꿈꾸는 것만 같습니다. 꿈꾸는 인생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날에 우리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또 한 번 꿈꾸는 것 같이 기쁠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만을 감사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와 죽음, 어둠과 운명의 포로에서 생명으로, 빛으로, 구원과 영생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의 나라 상속자로 회복시켜 주심으로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내가 바라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기대하는 것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낙심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를 위해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했지 않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그 하나님이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의 큰일을 행하셨으니 꿈꾸는 것 같고 기쁜 것입니다. 가장 큰 기쁨이 구원의 기쁨입니다. “죄의 포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국으로 귀환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선발대에 불과했고 여전히 이방 땅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소수의 사람들로 폐허가 된 성전과 성을 재건해야 했습니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소서’라는 말은 아직 이방 땅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시인은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바벨론과 애굽과 여러 지역에 흩어져 아직도 고국을 그리워하는 동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 나만 기쁘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구원이 나만 얻고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자유를 얻어야 하고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동족을 생각하며 그는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 기도합니다.
‘남방 시내’는 유대 남부의 네게브 광야 시내를 말합니다.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건조한 곳입니다. 그러나 우기에 폭우가 쏟아지면 메마른 이곳에 갑자기 많은 물이 흘러서 세차게 흐르는 시내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시내를 ‘와디’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메마른 땅에 갑작스레 물이 흘러 풀이 자라고 동물들이 와서 물을 마시는 생명의 땅으로 돌아오듯, 여전히 포로로 잡혀 있는 백성들을 갑작스럽고 놀랍게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비만 오면 물이 흘러넘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은혜의 단비만 내려주시면 우리 포로들도 돌아올 수 있다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또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대적들에게 영적인 모멸과 수치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로 귀환 공동체가 다윗 왕국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하나님이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고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돌아와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죄와 죽음 권세의 포로에서 돌아오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도 있고, 우리 친구들 중에도 있습니다. 이 사회 이 나라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와 그들의 차이는 은혜의 단비의 차이입니다. 내가 죄와 죽음 권세의 포로에서 돌아온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이런 큰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놀라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시면 광야 같은 세상이 옥토가 될 것이고 죄의 포로된 자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와 옥토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아직도 죄와 죽음 권세의 포로된 자들을 네게브 시내처럼 돌려보내 주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돌려보내시고 은혜의 비를 내려주셔야 하므로 나는 가만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사람에게 하도록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첫 인류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에덴동산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시작은 홀로 하셨지만, 진행과 보전과 완성은 인간과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나라는 식물이 자라는데 적당히 비도 오고 기온도 식물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강우량에 따라 그해 농사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슴을 졸이면서 기도하면서 씨를 뿌려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척박한 환경에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눈물 나는 일이었습니다. 기계화된 영농이 자리 잡기 이전에 대부분 파종은 울면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속담에는 “씨를 뿌릴 때에는 웃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거둘 때 울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포로는 하나님이 돌려보내셔야 하지만 이를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이 울었습니다. 울면서 회개하고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울면서 금식하고 여러 날 동안 수심이 가득한 채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고자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앞장서서 백성들의 죄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삶은 전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포로들이 바벨론 땅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전에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던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무너져 심판받게 될 것을 전하며 회개를 외쳤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끌려가면서도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호소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지만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해 세 번 작정 기도를 하고 신앙에 있어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자굴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에스겔도 바벨론으로 끌려가 함께 끌려온 동족들에게 회복의 꿈을 심는 일을 눈물로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의 눈물의 씨앗이 결국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기쁨의 추수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절의 시온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일이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이었습니다.
주석가 매튜 헨리는 ‘눈물은 마치 농부가 이른 봄에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이 뿌리는 씨’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눈물로 뿌려야 할 씨가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자신과 이웃의 죄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의 씨앗이다. 둘째, 교회의 고난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 흘리는 눈물의 씨앗이다. 셋째, 말씀과 기도로 감동 받아 흘리는 눈물의 씨앗이다. 이 모든 씨앗은 우리가 마땅히 뿌려야 할 씨앗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 기간 회개와 기도의 눈물의 씨앗, 고난으로 인한 눈물의 씨앗, 말씀의 감동으로 인한 눈물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랬을 때 때가 되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포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눈물로 씨를 뿌리고자 결단합니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릴 때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여기 ‘반드시’가 중요합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얻을 기쁨의 추수를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눈물이 있어야 기쁨도 확실합니다. 또 추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불확실성을 인내해야 합니다. 시인은 현재 겪고 있는 현실이 고달프고 힘들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 풍요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하고 소망합니다. 그 확신과 소망 가운데 눈물로 씨를 뿌릴 것을 결단합니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네게브 지역처럼 척박하고 메마른 삶입니까? 우리 삶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분이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눈물 흘리는 분이 있습니다. 불투명한 장래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다. 복음 역사를 보더라도 전도하는 것이 메마른 땅에 씨를 뿌리는 느낌입니다. 거둘 수 있을지 불확실합니다. 몇 년간 눈물과 기도로 섬겼던 양이 떠나가면 나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 듭니다. 눈물 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크게 기뻐하고 미래에 이루실 구원을 소망하고 확신하며 나아가야겠습니다. 어려운 현실에 있다면 그 현실에서 건져주시고 축복하실 하나님을 바라며 믿음으로 인내하며 감당해야겠습니다. 나에게 꿈꾸는 듯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서 자녀들과 양들에게도 꿈꾸는 듯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소망하면서 눈물과 기도의 씨앗을 심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말씀과 기도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삶을 살아내면 우리 자녀들과 양들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로 인내하며 현실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쁨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인내를 받으시고 반드시 기쁨으로 거두게 하실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우리가 눈물과 기도의 자리에 굳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에게 반드시 기쁨으로 거두게 하시는 큰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감사찬송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