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독락당에서 품다회 후, 독락당을 무대로 ‘가상의 차회’를 설정하여 '차회 운영방식'에 대해 이론화해본 글입니다.
* 원 제목은 '차회의 중첩된 세계와 에너지/ 차회 진행 방식에 관하여' 이지만,
차의세계 잡지에는 <미학적으로 발전해 가는 한국 다회의 다양한 모습들> 제목을 달고 실렸습니다.
찻자리 미학과 다회가 다양한 양상으로 뻗어가는 형태에 조명하였기 때문입니다.
* 이 글에서는 원고 원문을 올리므로 '원 제목'으로 올립니다.
차회의 중첩된 세계와 에너지/ 차회 진행 방식에 관하여
아란도
독락당의 이원적 세계
세심마을에 있는 독락당은 고요하게 앉아서 자계천을 옆에 끼고 있었다. 자계천을 집 안으로 가두어 놓지 않았다. 가두어 놓지 않아서 자유롭게 또 하나의 세계가 독락당에 중첩되어 있는 것 같다.
독락당을 거닐고 있을 바로 그때 ‘회재 이언적’의 머릿속을 거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공간으로 가는 통로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내가 회재라면 그 공간으로 가는 길을 쉽사리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독락인 이유는 그 자신의 세계에서 그 자신만이 아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어서 독락이지만, 그것은 외로움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만 즐기는 것을 반드시 외로움으로 치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 자신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것에서 보자면 바깥에서 보기에 외로운 시간만큼 적합한 환경 조성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솟을대문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솟을대문과 계정은 서로에게 역설의 관계인 듯하다. 독락당까지 오려면 말 타고 와야 한다. 말 탄 채로 솟을대문을 지나면 말에서 내리지 않아도 된다. 만약에 회재 당시에 솟을대문을 지었다면 독락당을 찾는 손님들을 배려한 차원이지 않았을까.
계정의 건너편에서 계정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계정은 이해된 깨달음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만나러 올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솟을대문의 독락당과 계정의 세계라는 서로 상반된 독락당의 구조에서 보자면 말이다.
밖으로 보여 지는 회재와 안으로의 회재는 어떤 차이가 있다. 그 자신의 정신세계의 지향성이 높은 솟을대문에서 만난다. 그것은 계정을 통하여 들어간 회재의 이상 세계가 구현하는 정신성을 상징한다. 높은 솟을대문은 독락당에서 만큼은 세속적인 권세의 위치가 아니라 정신의 높이를 상징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독락당은 계정이라는 차원의 문과 솟을대문이라는 정신의 높이로써 이원적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 계정이라는 문을 통하여 이상세계로 들어간다. 사방에 포진한 정신적 형이상학적 산과 일체가 되어 솟을대문을 통하여 그 세계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솟을대문은 계정이라는 정신의 앞문을 열고 나가서 다시 들어오는 정신의 뒷문인 셈이다. 독락당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현실세계와 이상세계가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를 설계한 회재의 세계는 예술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이기이원론은 정신으로 느끼는 예술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황의 학문을 이기이원론이라고 한다. 퇴계 이황은 회재 이언적의 학문을 집대성하였다. 회재의 학문을 퇴계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증거는 일본에 있다. 일본 성리학은 퇴계의 경敬철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 문화에서 다도와 정원 조경에 이상주의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도학적 이상주의이다.
하나의 이상향을 극도로 축소해서 표현해 놓은 형태이다. 퇴계의 학문을 실증적으로 반영하고 섬세하게 구현한 결과라고 여긴다. 이러한 예술 작품의 구현과 독락당에 회재가 구현한 세계관이 크게 다르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차이적 차이가 있다면 인공적인 정원 예술 작품으로 구현한 이상주의와 자연 그대로에 이상주의를 중첩시켰다는 점이다.
이기이원론은 정신성에 기반한 선험성의 영역을 탐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독락당의 특이한 구조와 계정을 둘러 싼 세계는 바로 회재의 정신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된 세계 그 자체가 예술적인 시도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이념적으로 하나의 이상세계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회이다. 조선시대는 사회 전체가 통으로 예술을 실험했던 무대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구현된 예술적인 사회에서 우리 조상들은 일상을 실천적으로 살고자 했었다.
그 삶의 방식은 예술적인 행위였지만, 모두 학문을 한다고 말했으며 또한 풍류라고 말했다. 현대에서 이러한 관점들은 모두 미학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락당은 차와 만날 수 있다. 차회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중첩된 세계를 만드는 예술적인 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이 범주화를 구성할 때 의미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 전체를 포괄하는 원리 즉 메커니즘에 의해 접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 메커니즘적 접근이야말로 전체적인 조망이며 연역적인 관점이기 때문이다.
연역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귀납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관점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 여기서 시작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작점에서 여기를 바라보아야 하다.
차회 안에 담긴 것들을 풀어낼 때 그 범주화가 드러나서 풍부해진다. 이 범주화는 차회라는 개념 안에 오랫동안 축적된 모든 것들이다. 이런 연유로 차회는 다양한 변주로서 현재까지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회는 무엇보다 형식이 필요하다. 그 형식을 통하여 차회라는 개념 안에 있는 것을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풀어낸 것은 해석이 적용된다. 해석된 변주로서 실제로 실행되는 것이다.
모든 의식적인 것은 어떤 동작을 기반으로 한다. 그 동작이 바로 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에서 범주화를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의식적인 것은 어떤 장소를 필요로 한다. 그 장소에서 중첩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소에 사람이 모이고 형식을 가동하면 바로 그때 그 장소는 무대의 역할을 한다. 형식이 작동하면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그 무대는 바깥에 대하여 안으로 닫힌계를 형성한다.
닫힌계가 형성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에너지가 연결된다.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에너지 교섭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에너지를 수렴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차회는 에너지를 생성하는 기관이라고 여겨도 좋을 것이다.
차라는 개념 안에는 세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차는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을 잇는 매개체로서 존재한다. 차는 우선 ‘차茶’라는 그 개념 안에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차의 첫 번째 개념은 자연으로 존재하는 식물로서의 차이다. 그러므로 이 때의 차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차이다.
차의 두 번째 개념은 차가 인간과 만나는 접점에서 차법茶法이 등장한다. 차법은 차의 운용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차법을 통하여 인간은 반복적 동작에 대한 이미지와 어떤 해석적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 이 차법은 다도구와 함께 축적된 방식이다. 차와 다도구는 인간이 연결시킨다. 이렇게 연결시켜가는 상태에서 더 다양한 행다법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다양한 시도의 차법들에서 집단 차회가 등장한다. 행다법으로 차를 우려 마시는 차법이 개인의 세계관과 만나는 독작의 시간이라면, 차회는 나와 타인들이 만나는 회합의 시간이다. 차회는 개인의 세계관을 넘어서는 집단 공동체의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의 세 번째 개념은 개인과 집단의 관계인 ‘사회성’으로서의 차이다. 차회는 차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구분을 해줘야 한다. 차회는 사람이 모여 있는 형태를 가리키고 있다. 차도는 도道를 더 중점에 두고 있다. 도란 무엇인가? 어떤 하나의 운용체계인 법칙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어떤 이상적인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세계관이 이상주의와 맞물리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상주의는 예술의 잠재태이기도 하다. 사회성의 차는 개인과 집단이 서로 맞물려 있는 상태이다.
차도가 사회성을 띠고 확장되면 차회가 된다. 요즘은 개인뿐 아니라 팀을 이루어 창작 차도를 만들어 실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차도에 차객을 초대하여 같이 차도를 펼치기도 한다.
이렇게 차도茶道와 차객茶客이 만나서 차로 어우러지는 현장을 우리는 ‘차회茶會’라고 한다. 그러니까 차회의 형식은 차도가 그대로 복제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상황 따라 변주되고 그 범주가 확장된 것이다. 더 많은 사람과 같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차회 안에 특정한 차도가 자리할 수도 있고 행다법만을 가지고 차회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 유무에 상관없이 차회는 사람이 모인 곳이므로 반드시 형식이 존재하여야 한다.
차가 예술성을 획득하는 시점
그렇다면 무엇이 예술인가? 어떻게 해야만 우리는 예술적인 체험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빈 공간을 찾아내어야 하며, 그 공간에 그 자신의 세계를 연출하여 보아야 한다. 마치 감독이 빈 무대에 작품을 올려 빈 무대를 연출하듯이. 그러니 그 자신이 연출가인 디렉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디렉터의 관점으로 올라서야 한다. 자신이 연출가가 되어 그 자신의 차를 작곡하고 디자인하고 그려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차도를 만드는 관점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차도는 디자인된 차법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차도는 하나의 이상 세계의 관점을 투사시킨 것이다. 그 자신이 본 도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다. 도는 어떨 때 드러나는가? 그것은 성속/미추의 대비가 극명할 때 드러난다. 즉 그 대비로 인하여 그 사이를 슬쩍 지각하게 되는 형태가 도이다. 어떤 작품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는 그 작가가 본 도이다. 하나의 세계이다.
차도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에서 도를 지각하기 때문에, 살짝만 어그러져도 그 아름다움이 손상된다. 아름다운 것은 금세 추해질 수 있다. 완전한 것은 파손되기 쉽다. 조그마한 실수도 크게 보인다. 그래서 차도가 어려운 것이다. 고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동작을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훈련된 동작들이며 반복으로 만들어진 어떤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차도가 실행되면 차도라는 개념 안에 담긴 내용들이 펼쳐진다. 그때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이 이지미들의 모임은 범주화를 만든다. 차의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축적된 이미지들은 모두 차도라는 개념 안에서 튀어 나온 것이다.
이 범주화가 제대로 드러나면 우리는 그때 전율하며 어떤 환희감을 전달 받게 된다. 그 환희감은 순간에 범주화 전체를 연결시킨다. 차를 마신 후 또는 차도를 직접 실행하거나 체험한 후 또는 차회를 직접 진행하거나 참석한 후에 우리는 여운을 느낀다고 말한다. 차의세계에서 출간한 책 제목 <차운선미>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범주화 형성은 차도 실행의 동작들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예시를 상정해보겠다. 차도는 차신이 직접 실행하거나 또는 초대 받아서 체험할 수 있다. 단독 차도는 그 차도만의 룰을 따르면 되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러 다수의 차도가 모여서 동시에 찻자리가 펼쳐질 때이다. 이번 경주 세심마을 독락당에서 치러진 차회가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여러 차인들의 수고로움에 의해 만들어진 차회였다. 이 수고로운 차회가, 차회라는 개념 안에서 범주화를 제대로 풀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범주화가 잘 형성되려면 ‘장소와 조건이 잘 갖추어진 형태에서’ 라는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술작품은 원래의 자리에 잘 배치된 상태로 존재할 때, 관람객이 전달 받는 강도는 훨씬 높고 느낌 전달 역시 빠르게 일어난다. 반면 그 작품이 원래의 공간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외따로 있다면 관람객에게 범주화가 잘 형성되지 않아서 쉽사리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현대 예술은 오히려 범주화를 방해하는 형태인 쇼크방식으로 예술작품을 만들거나 아예 범주화를 암호처럼 만들어 한 번에 작품에 다 집어넣기도 한다. 전자든 후자든 이해하기가 난해한 것은 마찬가지다.
현대예술은 이렇다 치더라도 차는 그런 것은 아니다. 차는 오랜 반복을 통해서 바로 그때에 범주화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도는 장소 중심적이며 즉흥적인 형태이다. 차도는 동작으로 형태를 드러낸다.
그 동작이 실행되지 않으면 차도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는다. 차도는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범주화가 잘 생성되는 예술작품처럼, 실행에서 장소와 조건이 제대로 구비되었을 때 차도의 범주화가 잘 생성된다. 차도에 집중할 때 그 자신이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개념화 된다. 그 개념화된 것을 공유된다. 공유를 통하여 우리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가상의 차회’를 설정하여 차회 운영방식에 대해 설명하다
그럼 네 개의 차도 팀이 모여서 연합차회를 한다고 가정하였을 때 그 차회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에 대한 도식을 글로 풀어 설명하겠다.
차회에서 네 개의 ‘차도’를 체험하는 방식은 이러하다. 헌다를 마치고 그 외 여러 사전 식순 의식을 행하고 나면 차회에 할애된 시간은 대략 두 시간이 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차회가 진행되는 것이다.
‘가상 차회’에서 참여한 차객은 사십 명이고 차도마다 다섯 명씩 한 팀이 되어서 차도 체험을 한다. 이러한 가정 하에, 한 차도가 진행되는 시간은 십오 분 정도이다. 십오 분이 지나면 다음 찻자리로 이동하여 그 차도를 체험하며 한 바퀴 원 운동을 하게 된다.
차객이 네 팀의 찻자리를 돌면 대략 오십오 분에서 한 시간여가 소요 된다. 이때 찻자리가 회전할 때 대합실 및 정거장 역할을 해주는 찻자리가 ‘여유 찻자리’이다. 차도가 펼쳐지는 찻자리로 이동하기 전에 남아 있는 차객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 머물 장소이다.
네 개의 차도 찻자리에서 그 자체만의 차도가 제대로 진행되려면 주변이 어수선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팽주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차도를 체험하는 차객들 역시 온전히 차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여유 공간에 찻자리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 찻자리가 네 개의 차도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지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찻자리가 차회의 완성도를 높이게 된다.
대합실 역할을 해주는 여유 공간 찻자리는 차도를 체험하는 자리가 아니고 기다리는 곳이다. 좀 더 편안한 형태의 자유로운 찻자리로 구성되어야 한다. 좌식이나 입식 찻자리 어느 형태나 무방하다. 가벼운 음식과 차를 마시고 담소를 하며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찻자리로 꾸며져야 한다.
여유 찻자리는 다소 자유로운 찻자리인 만큼 긴장도가 풀릴 수 있으므로, 차도가 진행되는 장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곳에 여유 공간에 찻자리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차객은 이 찻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 이 여유 공간 찻자리의 명칭은 ‘본부 찻자리’라고 부르겠다.
이 ‘본부 찻자리’를 구성하는 인원은 그때의 상황에 맞게 구성한다. 본부 찻자리에는 다소 요기가 가능한 음식을 같이 마련하는 것이 좋다. 본부 찻자리가 기다리는 공간만이 아니라 휴식의 공간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각 차도 찻자리로 안내하고 찻자리 이동 동선을 알려주고, 차객이 이동한 차도 찻자리에 본부 찻자리에서 차객을 이동시키고, 이러한 역할을 스탭진이 해줘야 한다. 이 스탭의 명칭을 차협스텝이라고 부르겠다. *차협은 다동을 대체하여 이 글에서 새로 만든 명칭이다.
1차로 각 차도에 참여한 차객이 이동할 때 마다 차협스텝이 이동 동선을 안내하여 주는 것이 좋다. 차객이 A차도 찻자리에서 차도 체험을 마친 후 다음 B차도 찻자리로 연쇄적인 이동을 해야 한다.
차객이 이동하지 않고 자기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이탈하여 주변을 구경하려 배회하면 차회 진행이 원활하지 않게 된다. 차회에 참석한 차객은 열외 없이 모두 차회의 형식에 동참해야 한다. 마음대로 동선을 이탈하면 안 된다.
이렇게 원을 그리며 A -> B -> C -> D로 자리 이동이 일어나면 맨 처음 A차도 찻자리에 참여할 인원은 본부 찻자리에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차객을 우선 이동시킨다. 왜냐하면 A차도 찻자리로 한번 이동하면 D차도 찻자리까지 계속 연달아 이동해야 때문이다.
그리고 D차도 찻자리에서 이동한 차객들은 본부 찻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휴식하며 기다려야한다. 본부 찻자리에는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차객들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본부 찻자리에서 서로 합의하에 순서를 바꿀 수도 있다. 본부 찻자리는 ‘원환 그리기’ 이동에서 일어나는 ‘병목현상’을 조절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병목현상을 조절하며 원환을 그리며 이동한 차도 찻자리 체험은 2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차도 찻자리를 참여한 인원이 차도 체험을 모두 마무리할 때까지, 먼저 체험이 끝난 차객들은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며 기다린다.
참여한 차객들과 차도 팀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머지 프로그램이 있다면 같이 소화한 후 서로 예를 표하고 마무리 하게 된다.
차회에서 지켜야 할 예禮
차회에 룰이 있다면 그것은 참여한 사람 중에서 혼자서 배회하는 사람 없이 각자가 무엇인가에 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차회에서 각자가 해야 할 역할이며 일이다. 각자가 열중해야 하는 일은 차회가 가진 프로그램을 다 같이 소화해야 하고 찻자리가 어수선하지 않도록 서로가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회에서는 같이 차를 마시고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그 자체가 차객에게 주어진 일이다. 특별한 다른 것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길면 길지만 두 시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시간 내어 차회에 참석한 이상 그 두 시간 동안은 자기를 고요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시간이다.
차회는 짧은 시간 동안 깊게 들어가는 훈련과 같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그래서 특수한 시간이다. 이 시간이 혼자서 십년 차 마신 시간 보다 더 강도가 높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짧은 시간에 깊게 몰입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사람의 긴장도를 단 시간에 높인다.
이 긴장도는 곧 각자가 갖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 에너지를 차회 안에 모으는 것이다. 차회에 집중하면 서로의 에너지가 모아진다. 그리고 차회 밖으로 에너지가 흐트러지지 않으려면, 차회가 만든 프로그램 이외의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차회의 룰을 지켜주는 것이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일이 된다.
차인의 이미지
타인과 마주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차를 내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차회는 차와 사람이 만나는 곳이면서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에너지들이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에너지는 모두 고유한 파장을 가지고 있다.
차회의 에너지가 하나로 모아질 때 사람들은 자기를 넘어선다. 어떤 충일감은 환희로 자기에게 전달된다. 멋진 연주 음악을 들었을 때, 아름다운 전시회를 관람했을 때처럼 차회 역시 같은 감흥을 준다. 그때 사람이 느낀 그 환희감은 다른 예술작품들에서 얻는 것과 동일한 감정이다. 순수한 기쁨은 그 자신이 실제로 행한 것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기쁨으로 솟아나는 바로 그것에서 환희감은 피어난다.
이 순수한 환희감이 그 자신 안에서 퍼진다. 그 자신과 그때 만난 것이다. 차를 하며 느꼈던 그 예술적인 느낌이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그때 다시 전달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수한 환희감에 의해 차를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을 그 자신은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찻자리에서는 어색하다고 하여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되며, 특히 서로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표현들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차회는 그 자체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차회는 차도처럼 미리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차도는 훈련의 결과다. 반복적으로 수행한 것에서 어떤 선들이 만들어지고 그 차도만의 분위기가 잡힌다. 그것은 오랜 시간 반복적 시간 투여의 결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반복에 의하여 하나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 형태는 일상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 반복은 특정한 것이다. 그 특정한 반복이 어떤 일상의 형태와는 다른 그 형태를 만들어 낸다. 차의 이미지는 그렇게 범주화된 축적으로서의 이미지들의 모임이다. 그 이미지들이 어떤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차회의 개념을 열어서 범주화를 드러내는 일이며 그 범주화에서 의미가 튀어 나온다. 그 의미가 범주화를 연결시킨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영감을 받고 환희감을 느낀다. 그 의미의 연결이 깨달음이다.
우리는 차 하나로 세계를 감각할 수 있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 수 있고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그 세계의 이해를 통해 다양한 관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 그리고 이내 그 관점은 어떤 원리를 관통하며 세상에 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차회는 실로 오묘한 이치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 달빛 포구에서 아란도 쓰다.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