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묻곤 합니다. 물론 “주님, 어떤 것이 현명한 것일까요?”하고 묻는 것이 기도가 되기도 하지만, 부조리한 현실과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주님, 당신의 정의와 진리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거나, “의로운 이가 왜 억울하게 고통을 받습니까?”라는 질문들 말입니다.
오늘 1독서의 욥이란 인물은 성경에서 의로운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고통을 받습니다. 욥은 당연히 위의 질문들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자기의 의로움과 지혜에만 집착하여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억울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욥은 울부짖듯이 하느님께 탄원의 기도를 바칩니다. “부르십시오.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아뢰겠으니 저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죄와 허물이? 저의 악행과 죄를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욥기 13,22-23).
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죄를 지어서 받게 된 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은 인간의 한계를 알게 해주고, 나아가 하느님께 향하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억울한 재판, 억울한 고통,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면서 그 고통, 당신의 몸을 송두리째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통을 봉헌합니다. 예수님 고통에 동참합니다. 부서진 마음으로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이 모든 고통을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신 예수님처럼, 그 고통을 봉헌하신 예수님처럼 올곧이 받아들여 달라고 말이지요.
욥기는 지혜문학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지혜가 무엇일까요? 의로운 이가 받게 되는 억울한 고통에 대한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좀 생뚱맞게 천지 창조와 우주 만물에 대한 당신의 통치와 섭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시면서 말이지요.
단지 대자연계의 온갖 것들을 파노라마처럼 제시하시며 되물으십니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 38,3-4)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응답하여라.”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도전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체감한 욥의 기도는 이렇게 바뀝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3.5-6).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욥 38,1), 폭풍을 잠재우시는 예수님(마르 4,39),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로 임하시는 성령님(사도 2,2) 모두,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당신 섭리로 이끄십니다. 그 가운데 고통, 어려움, 괴로움은 분명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당신께로 향하길 바라십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고린 10,13).
복음삼덕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 순명, 정결 중에 가난은 꼭 물리적인 가난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주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극도로 받으셨다는 것 또한 주님의 엄청난 가난이요 내려오심입니다. 이것이 강생의 신비가 담고 있는 내용이고,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고통에 합하여 다시 주님께, 고통받는 나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은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첫댓글 불확실성 안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아멘...
인간의한계를 알게하고
하느님께 향하게하는것.
"고통은 은총"이란 말씀 새기겠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