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문화적인 흐름을 미니멀리즘이라고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각 예술 분야에서 출현하여 음악, 건축, 패션, 철학 등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최소의'라는 뜻의 '미니멀(minimal)'과 '주의'라는 뜻의 '이즘(ism)'을 결합한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가 50년을 넘은
현재에까지 생존해 있고,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추구된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그저 지나가고 마는 트렌드(trend)의 수준은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은 사물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존재자의 근본, 즉 본질을 찾아내고, 알아내고 또한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원적(始原的)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어떤 기교나 각색 등
인간의 주의를 끎으로써 대상의 본질을 가려 본질을 망각하게 하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가 바로 단순함과 간결함입니다. 단순함과 간결함 속에서 비로소 대상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이 대상의 본질이 반드시 단순하고 간결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대상의 본질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
뭔지 모르는 대상의 본질이 단순함과 간결함 속에서 제대로 사유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입니다.
회화와 조각 등 미술 분야에서는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해 기하학적인 뼈대만을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의 미술작품이 등장했고,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단조롭고 반복적인 합주곡처럼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박자에 반복과 조화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건축과
패션, 철학 등의 영역에서도 미니멀리즘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개인의 현실적 삶의 영역에서도 미니멀리즘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복잡하게 늘어져 있는 거실의 값비싼 가구와 벽면의
장식이 왠지 정신 없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져 모두 사라졌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은 입을 만한 옷장
속의 옷들도 몇 벌만 제외하고는 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책꽂이에 그냥
버려진 채로 꽂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이 드는 편안하고 화려한 여행이 아니라, 옷 몇 벌에 간단한 짐만 꾸려서 배낭 하나 매고 그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들은 결코 미니멀리즘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미니멀리즘이 존재자의 본질에
대한 시원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렇게 미니멀리즘이 현대사회의 하나의 문화 형태로 분명하게 뿌리내리게
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현대사회가 인간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할 시원적 사유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시원적 사유의 방해를 넘어 존재의 시원 그 자체를 망각하도록 인간을 미혹하고, 결국 비본질적인 것에 매몰되도록 유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어보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파트, 빌딩, 자동차
그리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뿐입니다. 밤은 더 이상 캄캄하지 않으며, 밤하늘에서 별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머리 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더 벌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은 할 여력이 없습니다. 방심하면 금방 뒤쳐지고 낙오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잉여인간 취급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있음(존재)’은 고사하고 ‘있는
것(존재자)’조차 사유할 수 없습니다. ‘있는 것’을 도구로 해서 현재를 살아내기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렇게만
살도록 창조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존재를 망각하기 쉬운 환경에서도 기필코 존재를 다시 떠올리고야
맙니다. 지인(知人)의 죽음 앞에서, 거울 앞에서 한해 한해 늘어만 가는 얼굴의 주름을 보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길가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서, ‘과연 나는 누구이고,
코스모스는 무엇인가?’ 즉, ‘존재자(있는 것)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존재 그 자체, 즉
‘도대체 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합니다. 도무지 답을 알 수도 없으며,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기분만 침울해지고 힘만 빠집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유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 같습니다. 존재 혹은 존재자가 본질이요, 나머지는 비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우선되고 훨씬 중요한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진행시키다 보니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미니멀리즘은 하나의 필연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는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더욱이 순례자가 지녀야 할 짐은 가벼워야만 합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마 10:10)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우리가 따르고 본받아야 할 그 분께서 친히 미니멀리즘의 표본처럼 사셨으니 우리들 역시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다.
순례자가 가볍게 해야만 할 짐이 소유의 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최소한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짐입니다. 죄의
짐은 이미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에 논외로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짐은 관계의 짐입니다. 얕으면서도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관계의 짐 역시 가볍게 해야 할 짐이 분명합니다. 온갖 단체나 모임에 소속되어 있고, 직함이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아도 본질을 놓친다면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잡한 관계의 짐 그 자체가 본질을 놓치게 하고 망각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관계의 짐은 그 양을 줄인다고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미움이나
적대 관계가 청산되어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고, 용서할 것은 용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임종
시에 자신과 적대 관계였던 누군가를 용서하고, 또 용서받고 싶어한다는 것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임종을
지켜봐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짧게나마 상상해본다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움은 우리가 결코 천국에 지고 갈 수 없는 짐이기 때문 아닐까요?
첫댓글 간결한 것, 무소유의 삶을 미니멀리즘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예수님이야말로 지독한 미니멀리즘주의자가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화한 것을 매우 질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상수훈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새 언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유대문화로 복잡하게 하면서 진리인 기본을 떠나서 인간 마음대로 율법을 재단해 버린 것이지요. 예수님은 한 마디로 이를 바로잡으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우리가 말씀 안에서 진리를 알면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이룰 것입니다. 진리를 떠난 것이 무거운 짐
무거운 짐이 되어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고 종이 되어 허덕이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미니멀리즘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몸글의 순례자의 귀한 삶의 고귀함을 훼손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듭니다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미니멀리즘을 규정지어봅니다. 샬롬
뭔가 미진한 몸글의 마무리를 장로님께서 잘 해주신 것 같습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본질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정신은 결국 신에 대한 사유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수많은 신들의 신, 사실은 유일한 신, 진짜 신인 하나님에 대한 사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유하는 경로는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런 경로로 하나님을 사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밖의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유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분이 아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체험이라는 표현을 꼭 쓰고 싶다면 사유로 체험된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꼭 불경스러운 것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사유합니다. 이루어지기 어려워 보였던 기도제목이 나도 모르게 이루어져 있음을 느낄 때,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또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 앞에서도 하나님을 사유하게 됩니다.
뭐가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미니멀리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에 대한 사유는 아마도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에 집중될 것이고 그 밖의 여러 경로를 통해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 등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