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록 金丙錄(1885 ~ 미상)】 "이재명의사와 매국노 이완용 처단동참”
1885년경에 태어났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85년 10월 12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 府용당리(龍塘里)에서 아버지 기근(起根)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초명은 사차(四次)이고, 자는 병선(丙善)이다.
1904년 (음)3월 25일 진남포(鎭南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 고베(神戶)와 요코하마(橫濱)을 거쳐 그해 5월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이민자로서 사탕수수농장에서 2년간 일하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1906년 11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공립협회(共立協會) 로스엔젤레스지방회(羅城地方會)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07년 5월에는 리버사이드지방회(河邊地方會)로 이전하여 그해 6월 리버사이드 한인들이 발기한 「국혼환기취지서(國魂喚起趣旨書)」에 참여하여 15달러를 의연금으로 기부하였다. 1907년 7월 하순, 귀국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가 이교담(李交倓)과 이강(李堈)을 만났다. 이즈음 공립협회에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동회를 개최하고 매국적(賣國敵) 숙청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재명(李在明)이 파견되었다. 곧바로 그를 뒤따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부산에서 약장사를 하면서 신민회(新民會) 인사들과 접촉하며 활동하였고 이재명이 거사 준비를 위해 권장회(勸獎會)를 조직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김병록에 대한 선고 관련 보도(『대한매일신보』 1910.7.13) [판형2] |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2월 4일에는 일진회(一進會)가 「합방성명서(合邦聲明書)」를 발표하였다. 이에 12월 6일 박태은(朴泰殷)의 집에서 권장회 비밀 회의를 열고 이재명·김정익(金貞益)·박태은·이응삼(李應三)·전태선(全泰善) 등 권장회 회원들과 모여 거사 실행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재명이 먼저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처단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자 격론 끝에 이완용과 일진회의 이용구(李容九)를 동시에 처단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12월 7일 비밀 회의에서 이재명·이동수와 함께 이완용 처단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오복원(吳復元)·박태은·이응삼 3인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조창호와 전태선은 거사에 사용할 권총 및 단도 등 무기 구입을 담당하였다. 이재명의 지시에 따라 부산에서 12월 12일경 서울로 올라왔다. 12월 17일경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하고 이완용을 먼저 처단하고, 이용구를 나중에 총살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후 기회를 엿보던 중 이완용 등 매국적(賣國敵)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鍾峴)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여 이재명·이동수와 함께 천주교회당 앞으로 갔다. 오전 11시 30분 이완용이 인력거에 타고 통과하려고 할 때 이재명이 비수를 휘둘러서 이완용을 공격하여 어깨와 허리에 치명상을 입히고 이를 저지하려던 인력거꾼을 찔러 죽이자 이를 곁에서 도왔다. 이재명이 이완용 호위 순사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자, 그 자리를 피해 동지들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잠적하였다.
1910년 1월 말경 부산에서 경찰에 붙잡혀 1910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85년경에 태어났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85년 10월 12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 府용당리(龍塘里)에서 아버지 기근(起根)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초명은 사차(四次)이고, 자는 병선(丙善)이다.
1904년 (음)3월 25일 진남포(鎭南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 고베(神戶)와 요코하마(橫濱)을 거쳐 그해 5월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이민자로서 사탕수수농장에서 2년간 일하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1906년 11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공립협회(共立協會) 로스엔젤레스지방회(羅城地方會)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07년 5월에는 리버사이드지방회(河邊地方會)로 이전하여 그해 6월 리버사이드 한인들이 발기한 「국혼환기취지서(國魂喚起趣旨書)」에 참여하여 15달러를 의연금으로 기부하였다. 1907년 7월 하순, 귀국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가 이교담(李交倓)과 이강(李堈)을 만났다. 이즈음 공립협회에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동회를 개최하고 매국적(賣國敵) 숙청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재명(李在明)이 파견되었다. 곧바로 그를 뒤따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부산에서 약장사를 하면서 신민회(新民會) 인사들과 접촉하며 활동하였고 이재명이 거사 준비를 위해 권장회(勸獎會)를 조직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김병록에 대한 선고 관련 보도(『대한매일신보』 1910.7.13) [판형2] |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2월 4일에는 일진회(一進會)가 「합방성명서(合邦聲明書)」를 발표하였다. 이에 12월 6일 박태은(朴泰殷)의 집에서 권장회 비밀 회의를 열고 이재명·김정익(金貞益)·박태은·이응삼(李應三)·전태선(全泰善) 등 권장회 회원들과 모여 거사 실행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재명이 먼저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처단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자 격론 끝에 이완용과 일진회의 이용구(李容九)를 동시에 처단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12월 7일 비밀 회의에서 이재명·이동수와 함께 이완용 처단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오복원(吳復元)·박태은·이응삼 3인은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조창호와 전태선은 거사에 사용할 권총 및 단도 등 무기 구입을 담당하였다. 이재명의 지시에 따라 부산에서 12월 12일경 서울로 올라왔다. 12월 17일경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하고 이완용을 먼저 처단하고, 이용구를 나중에 총살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후 기회를 엿보던 중 이완용 등 매국적(賣國敵)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鍾峴)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여 이재명·이동수와 함께 천주교회당 앞으로 갔다. 오전 11시 30분 이완용이 인력거에 타고 통과하려고 할 때 이재명이 비수를 휘둘러서 이완용을 공격하여 어깨와 허리에 치명상을 입히고 이를 저지하려던 인력거꾼을 찔러 죽이자 이를 곁에서 도왔다. 이재명이 이완용 호위 순사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자, 그 자리를 피해 동지들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잠적하였다.
1910년 1월 말경 부산에서 경찰에 붙잡혀 1910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