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주고 약 준다
함석헌
씨알 여러분 가을 맛 참 좋습니다. “국화를 동편 울 밑에 꺾다가, 물끄러미 남산을 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는 도연명의 글귀를 몇 번이나 입속에 읊는지 모르겠습니다. 읊조리노라면 어쩐지 나도 그 모양 멍하니 나를 잊어버립니다. 사실 가을은 나를 잊어버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거기가 좋습니다. 그때에 나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장군 노기 마레스케(乃本希典)가 여순 항구를 점령하고 나서 지은 시가 있습니다.
山川草木轉荒凉,十里風腥新戰場, 征馬不前人不語, 金州城外立斜陽.
(산천초목전황량 십리풍성신전장, 정마불전인불어 금주성외입사양)
(눈을 들어 보니 산일지 물일지, 나무고 풀이고 다 쓰러져 스산한 꼴이구나. 십리(우리 이수로는 백리)에 벋은 갖 지나고 난 싸움터에는 피비린내가 아직 코를 찌르는구나. 그 처참한 꼴을 앞에 놓고 보니, 날뛰던 말도 나가려고 하지 않고, 사람도(나도) 할 말이 없이 금주성 밖 저무는 저녁 햇빛 속에 올 줄 갈 줄 잊고 섰구나.)
다이니뽕데이고구, 덴노혜이까, 무찌르자, 이겼다, 할 때는 미쳤어도, 또렷또렷한, 눈감을 수 없는 사실 앞에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리는 피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멍하니 섰을 때는 참 사람이 됩니다.
엊그제 같이 새 교황의 자리에 올랐는데 갑자기 자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는 요한 바오로 1세의 부음을 듣고, 급급히 로마를 향해 떠나는 김추기경 편에 우리의 조의나마 붙여 보내자고, 몇이서 차를 타고 앉아, 인생이 뭐냐고 또 한 번 새삼 생각에 잠기려는데, 우리의 차는 새 전장 아닌 서울 종로에서 나가려 하지를 않고 서 있습니다. 창밖을 보니 일로전쟁이나 하는 듯 미쳐서 아우성하는 연고전의 젊은이의 물결과 또 거기서 무슨 일이 나나 투구 쓰고 무장한 경찰대가 묵묵히 어둠 속의 괴물처럼 버티고 서 있어 길이 막혔습니다. 나는 또 한 번 멍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요새 길거리 육교마다 나붙는 구호들을 보고 “병 주고 약 준다” 는 옛말이 생각나서 그것만 자꾸 생각하고 있는데, 이 가을 소식과 그것과도 어딘가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을 보호하자!” 옳은 말입니다. “왜 잘했다는 건 하나 없이 밤낮 못했다고만 하느냐?”고 정부편 사람들로부터 힐문을 받는 나도 이 “자연보호만은 뒤늦게나만 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연보호 헌장까지 제정한다는 말을 듣고는 정말 “병 주고 약 주는데” 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이라 해서가 아니라 옳은 일이기에 말입니다. 그렇게 부산을 피울 것을 왜 하루 이틀 전에 생각 못했을까? 근대화 속에 자연 파괴의 알이 들어있기를 매독장이의 갓난아기에게 매독균이 그 탯집에서부터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왜 그때에 미리 생각을 아니했을까? 그러기 때문에 이제 새삼 열심을 내도 마치 돌팔이 의사가 병 주고 약 주어서 겹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일찍이 어느 학자라는 사람이 있어서 통일교를 파헤친 일이 있는데 요새 와서 그것을 내가 잘못 알고 했던 것이다 하니, 이것도 병 주고 약 주는 것 아닌가? 무슨 학자가 그렇게 한번 으름장에 굽실굽실 절하며 사과할 것을 연구라고 발표했을까? 그야말로 씨알을 병도 사고 약도 사는 바보로 아는 것인가? 그것 역시 그렇게 해서도 먹고 저렇게 해서도 이익만 먹잔 속셈 아닌가? 그래 나는 이젠 흐린 것과 밝은 것이 바뀌었구나 했습니다.
그것만입니까? 세상에 말로 글로 정치로 종교로, 우리 씨을 향해 말해 주는 것이 대개는 있다가 약 팔아먹으려고 주는 병의 씨인 것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눈이 밝고 귀가 뚫렸어야 합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자연 아닌 것은 다 병입니다. 새삼 아는 듯, 새삼 친구인 듯, 새삼 애국인 듯, 새삼 역사 생각하는 듯 하는 것이 다 다 병의 씨요 약입니다. 자연보호라지만, 자연이 뭔지 아십니까? 이것은 씨알 보고 하는 말 아닙니다. 새삼 씨알의 지도자라 학자라 봉사자라 하며 나서는 사람들 보고 하는 말입니다. 자연 중의 자연은 자유하는 인간 바탈입니다. 그것이 정말 자연, 스스로 그런, 첨부터 그런, 영원히 그럴 진리 자체입니다. 약이 사실은 (자연에 대하여는)병입니다. 제도도 병 입니다.
씨알 여러분 속지 말고 속을 모으십시오!
씨알의 소리 1978. 10월 77호
저작집; 9- 229
전집; 8- 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