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밭 / 윤미옥
오름에 오르니 하늘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바람이 불어 깨끗해진 날씨 덕분에 주변의 크고 작은 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나무 숲 사이로 비추는 빛 내림이 눈부시다. 나무와 꽃들이 하늘을 향해 웃고 있다. 휘어진 나무도 힘든 상황을 딛고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하늘을 향하고 있다. 푸른 하늘 아래로 억새의 마지막 춤사위가 물결을 이룬다.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하늘과 구름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다양하게 변하는 구름의 모양과 색은 그림의 좋은 소재이다. 하늘은 무한대의 공간으로 사람의 넓은 마음을 표현한다. 비행기에서 떠다니는 구름을 내려다보면 마법사가 되어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다. 푸른 하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포근한 양떼구름 위에 뒹굴기도 하고 달콤한 솜사탕을 먹기도 한다. 한입 먹다 보면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하늘이 되어 날아오른다.
어릴 적 가을 운동회가 떠오른다. 솜사탕 장사가 학교 정문 어귀에 한자리를 차지한다. 기계가 원을 그리며 솜털을 만든다. 막대기로 휘휘 감으면 하얀 구름 같은 솜사탕이 된다. 둥둥 떠올라 갈 것만 같다.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고무풍선도 날고 있다. 그때마다 나는 주문을 외운다. 달리기 경주에서 3등이라도 해서 상 받는 단상에 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운동회 때 달리기 하면 4등이 내 자리였다. 다행히 등수 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때는 암산 달리기나 보물 찾기를 할 때뿐이었다.
하늘을 향해 말을 할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우면 하늘을 쳐다보며 엄마를 부른다. ‘엄마’라는 단어 한마디에도 양 볼에는 이슬방울이 흘러내린다. 칠 남매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부모님은 오래도록 곁에 계시지 못했다. 인생의 반려자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어쩌면 내 모든 것을 그 곳에다 맡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말로 마음으로 기도한다. 하늘이 '마음 밭'이다. 나의 모든 소중한 것은 하늘의 마음 밭으로 떠났다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었고, 오늘은 땅이 되고 밭이 되었다. 내일은 무엇이 될까.
말을 주고 받으면서 인간관계는 시작된다. 살다 보면 ‘관계’라는 것이 날마다 좋을 수는 없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 밭이 된 하늘은 모든 것을 받아준다. 하늘은 누구에게도 나의 말을 함부로 전하지 않는다. 어떤 말을 해도 흉허물이 없다. 속에 담아놓으면 속병이 생길 것 같은 말이 있으면 하늘에다 읊조린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비밀을 애써 감추려다 오히려 화를 입었다는, 신라 경문왕 시절 왕관을 만드는 복두장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복두장이는 왕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긴 비밀을 평생 숨기려니 답답했다. 참다못해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때 하늘에다 말했으면 어땠을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전한다. 대화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무심코 남긴 말로 상처 주는 일이 더 많아졌다. 위안과 격려가 되는 소리는 더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내가 하늘이 되어 마음속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목소리도 메아리가 되어 누군가에게 전해질지도 모른다. 서로의 진심 어린 소리를 들어줄 하늘이 될 수 있다면 따뜻한 마음이 담긴 세상이 올 것이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고 비행기도 날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날개를 마음껏 펼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은 왜 날 수가 없는지. 인간은 지은 죄를 속죄할게 많아 마음의 날개로도 자유롭게 날지 못 한다. 세상은 욕심의 아우성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하늘에다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 가뭄이 들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하고, 장맛비에는 하늘이 구멍이 났다고 말하고, 태풍이 불면 바람을 멈추게 해달라고 한다. 바라는 것은 많지만 들어주는 하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이런 넋두리를 다 듣고 있는 듯이 오늘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그림을 시작한 후로는 그림이 나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마음 밭이 되기도 한다. 높은 하늘과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만 표현한 그림이 있다. 사람들은 공간과 하늘을 잘 표현했다고 칭찬한다. 외롭고 쓸쓸한 내 마음을 그린 것을 알 리가 없다.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 때문인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그림을 더 많이 그리게 된다. 앞으로는 밝고 예쁜 꽃 그림으로 마음을 채워가고 싶다. 말이 없는 그림은 오로지 나와 대화를 한다.
남실바람이 불어와 살포시 먹구름을 밀어내니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맑게 갠 하늘을 본다. 불현듯 많은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 행복이 넘쳐나는 사람,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마음 밭을 만들고 싶어진다.
화폭에 희망의 개나리와 토끼풀, 행복의 수레국화, 백일홍, 은방울꽃, 사랑의 장미를 가득 그려본다. 노을빛은 더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 아름다운 내 마음 밭에는 희망과 사랑이 가득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