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보았듯이 고구려와 같은 제국이 이념이나 비공식적 방법을 통한 영향력 투사를 하는 까닭은 제국의 확장과
유지가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국은 그 유지에 소요되는 경제 군사적인 비용을 줄임으로서
국력의 한계를 넘는 과대팽창(Overstretch)을 사전에 방지하려
한다. 그러면 제국체제의 유지에 소요되는 현실적인 비용은 어느 정도였을까? 타 제국의 예를 잠시 살펴보자면 제정이전 공화정 로마의 영토는 포에니 전쟁을 전후하여 이탈리아 반도 일원에
한정이 되어있었으나 포에니 전쟁, 그리스 전쟁, 갈리아 정벌등의
과정을 거치며 광역화되었다. 이러한 전쟁은 공화정 로마의 지출을 늘렸음은 물론 정복지에서 획득한 수입이
전쟁을 수행하느라 치른 비용보다 월등히 많아 로마의 정복활동은 오히려 추가 팽창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67년로마가마케도니아를점령한후획득한마케도니아왕실의막대한재산으로인하여로마인들에게는세금이면제되었다. 페르가뭄(Pergamum) 왕국을병탄한기원전 130년에는로마의국가예산이 1억에서두배인2억세스테르치우스(Sesterces)로불었다. 기원전 63년대(大) 폼페이우스가
시리아를 정복하면서 무려 3억 4천만 세스테르치우스를 로마에 가져다 주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얻은 금의 양은 엄청나서 로마에서 금의 가격이 36%나 폭락할 정도였다.[1]그러나 이때 로마의 정치체제는
공식적으로는 공화정이었고 군사제도는 원정에 나가면서 필요한 병력을 일시 징집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정복활동이
지속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력으로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로마 공화적
최대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와의 2차 포에니 전쟁당시 로마가 징집한 인원은 총 24만이었지만 평상시에는 4만 정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말에 게르만 침공으로 인하여 시민군제가 직업군제로 전환된
후 갈리아 정벌과 로마내전(Bello Civili)의 영향으로 카이사르
당시에는 약 60개 군단[2]이 있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평시 체제로 전환하며 약 28개 군단으로
축소하였다.[3]그러던 것이4세기 초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는43만 5천까지 늘어났다.[4]
이러한 패턴은 중국에서도 보이는데 상(商)의 마지막 왕인 제주(帝紂)가
주의 무왕(武王)에 맞서
70만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으나[5]당시의 인구수준을 고려할 시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수치이며 주대(周代)에는 동원병력이
수만정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춘추전국시대에 들면서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기는
하나 이는 생산에 종사하여야 하는 인력들을 총동원한 일시적인 수치이며 전투활동에만 전념하는 정규병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규병으로서의 대군은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제국을 이룬 후 장군 몽념(蒙恬)에게 30만군을 이끌게
하여 북쪽의 호인(胡人)들을 치게 한데서 등장한다.[6]일개 도시국가였던 아테네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침략군에 맞서 불과 1만정도의 군대[7]를 모았으나[8]무역을 통하여 해상제국(海上帝國)을 구축한 후 기원전
415년에 감행한 시라쿠사[9]원정시에는 45000명에서
50000명이 동원되었다.[10]다른 예를 들자면 아케메네스朝
페르시아의 창건주인 키루스는 건국초기인 기원전 546년의 팀브라[11]전투에서 5만의 병력으로 리디아[12]군과 접전하였다. 제국 체제가 확립된 후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커지기 시작하여 그의 후손인
크세룩세스는 기원전 481년의 그리스 원정에 전투병만 15만을
동원하였으며[13]다리우스 3세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와 싸운 가우가멜라의 전투에 20만을 동원하였다.[14]
군대의 증가는 비용의 증가라는 말과 동일하다. 로마제국에서 군단증설에
따른 재정적 압박은 필연적이었다. 제정(帝政) 이전의군단병들은약 112.5 데나리우스의급료를받다가카이사르시절에250데나리우스로올려받은적이있다.[15]군단병의 급료는 1세기말도미티아누스황제시절에이르러 300데나리우스로상승하였으며 3세기초셉티미우스세베루스황제때는약 450 데나리우스였다. 앞서 말하였듯이 로마의군대는 4세기에이르러제정초기의거의 3배에달했으니국가재정에 대한 부담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로마의 군제(軍制)개혁을 이끈 마리우스[16]는 비록 게르만족에 로마군이 패한 것에 자극받아 시민군제를 직업군제로 변화시켜 게르만족에 대한 승리를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직업적인 전문군대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재정에 의존하는 존재들이었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무조건 반길 수만은 없는 않은 제도였다. 다행히 제정 초기 로마의 팽창은 엄청난 수입으로 이어졌고 직업군대로의
전환에 따른 부담은 가시화되지 않았다. 이후 제국의 팽창이 둔화되면서 높아지는 군대와 관료들의 급료는 심각한 인플레를 야기하였다.국가재정에 대한 압박은 농민들에
대한 세율의 증가를 초래하였고 심지어 로마가 멸망하고 야만족 군대가 들어올 때 이를 반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17]
표 11. 네로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재위시까지의 로마 데나리우스의 인플레이션
황제명 (재위년도)
데니리우스중 은의 함량(%)
비고
네로 (54-68 AD)
91.8
로마대화재 (68년)
갈바 (68-69)
92.6
오토 (69)
98.2
비텔리우스 (69)
86.1
베스파시아누스 (69-79)
84.9
유대전쟁 (70년)
티투스 (79-81)
80.3
도미티아누스 (81-96)
90.8
네르바 (96-98)
90.7
오현제(五賢帝) 시기개시
트라야누스 (98-117)
85.4
하드리아누스 (117-138)
84.1
하드리아누스성벽구축
안토니누스피우스 (138-161)
80.0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161-180)
76.2
게르마니아전쟁
코모두스 (180-192)
72.2
페르티낙스 (193)
76.0
디디우스율리아누스
(193)
81.0
셉티미우스세베루스
(193-211)
58.3
출처: Tainter, Joseph A.,『The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P. 135
[1]Tainter, Joseph A.,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 P.129
[2]당시의 로마군
편제는 1군단(Legio)당 6000명이니 60군단은 36만명에 해당하나 이는 정규병수이기 때문에 보조병 (군단당 500명에서 1000명)의 숫자까지 합치면 39만에서 42만까지
늘어난다.
[3]Goldsworthy, Adrian, 『The
Complete Roman Army』(London, UK: Thames & Hudson, 2003), P. 50
[4]Parker, Geoffrey (ed.),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Warfare』(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