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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87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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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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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e1AktxWo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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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초보 사제 시절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납니다. 양육하고 있던 아이의 보호자와 통화하던 중에, 그쪽의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에 욱하는 성격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제쪽에서 포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졌고, 막말을 주고 받다다, 결국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건너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고나서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에 도통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미사를 봉헌하러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하필 복음을 봉독하는데, 글쎄 내용이 기가 막혔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오 복음 5장 23~24절)
미사 내내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정말이지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미사는 솔직히 미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리 자주, 강력하게 용서나 화해를 강조하셨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후 저는 큰 용기를 내서 어제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퍼부었던 말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부끄럽고 미성숙한 언행에 대해서만 정말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순간 기적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분께 용서를 비는 순간,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 형에 처해진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억울한 마음도, 격렬했던 감정도 눈녹듯히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일상생활 속의 형제애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금의 봉헌금을 하느님 대전에 바친다 할지라도 이웃과 불목하고 다투고 있다면 그 예물 봉헌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대한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하면서 드리는 제사나 예물 역시 하느님께서 즐겨 받지 않으실 것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예배를 핑계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틈만 나면 다투고, 수시로 불목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된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한 공동체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울리는 징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예배와 봉헌이 보다 가치 있고 합당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또 다시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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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O2KFwC8dW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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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살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2페니(약 20원)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출근해서 바로 차를 한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값이 2페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머니에 있던 2페니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내는 자신을 도둑으로 모느냐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에 남편도 화를 냈고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고 심지어 상대의 집안을 들먹이며 싸움은 더 크게 번졌습니다.
결국,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20원 때문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댐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집니다. 남편이 화를 참았거나 아내가 화를 참았다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차피 얼굴에 화가 난 것이 다 드러나는데 뭐하러 참느냐 할 것입니다. 혹은 내가 지금 화를 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위선이 아니냐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화를 내야 화가 풀리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화를 참고만 있다가는 화병이 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을 내는” 사람이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으로 표출되면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화를 표출하거나 어디다 분출해버린다면 정말 화가 가라앉을까요? 그렇다고 말한 학자가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는 화라고 하는 감정을 마치 터지기 직전의 댐으로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씩 자꾸 흘려보내 주어야 댐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분노를 베개를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밟아서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분출하면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제임스라고 하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프로이트의 접근방식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화를 내면 더 화가 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방식은 오히려 더 화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의견이 더 맞는 것 같습니까?
1970년대 초 사회학자 머레이 스트라우스는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부부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한 그룹의 부부에게는 자신들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라고 했고 다른 부부들에게는 그런 감정을 삭이라고 했습니다. 부부의 폭력성은 감정을 드러낸 부부들이 더 심했습니다. 말이 점차 격해지며 몸싸움까지 갔던 것입니다. 즉, ‘프로이트 : 제임스 = 0 : 1’이 되었습니다.
에브 에베덴 연구팀은 한 회사가 조만간 대량 해고를 할 것을 알고, 3년 계약을 하고 들어갔는데 1년 만에 해고를 당해야 하는 이들을 면담했습니다. 한 그룹에게는 불만을 마음껏 표출하게 하는 질문을 하였고 다른 그룹에는 그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정도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대한 적대감을 조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분노를 표출한 집단이 회사에 대한 더 큰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 제임스 = 0 : 2’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분야에서도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제프리 골드스타인은 축구와 농구, 풋볼과 같은 경쟁하는 스포츠를 보며 마음껏 소리를 지른 사람들과 체조경기와 같은 소리지를 필요가 없는 경기를 본 두 그룹의 공격성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선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장면을 본 이들의 공격성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저도 로마에 있을 때 축구경기가 끝나고 관객들이 서로 싸워 심지어 사망사고가 잇따르는 것을 본지라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표출해도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증가합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 제임스 = 0 : 3’입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리처드 와이즈먼, 웅진 지식하우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은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냐는 믿음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내가 아무리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운동을 꾸준히 하면 그 사람은 다시 자존감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믿는 대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몸이 망가지면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믿어버려 잘나가던 사업도 실패합니다. 미국의 한 해병대 장군은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거든 이불부터 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동은 곧 나의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화를 내면 나는 화를 잘 내는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버린 이상 폭력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꾹 참더라도 화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이 화를 안 내는 사람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조금 덜 화가 납니다. 그러니 화는 내는 것보다 삭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기에 화내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화를 내면 찌푸려지게 되어 있는 부부에 보톡스를 했더니 화가 덜 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습니다. 화를 내니까 더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표현하는 것이 곧 내가 됩니다. 그러니 좋은 것은 표현하고 나쁜 것은 감춥시다.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지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감정은 드러나게 하고 나쁜 감정은 삭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믿읍시다. 그러면 화가 나야 할 때도 화가 안 나고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십시오. 결국,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나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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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 살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탈출 20,13과 신명 5,17의 ‘살인하지 못한다.’는 계명을 들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3,15)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야고 3,8)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여지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 준다.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너의 사랑이 계속 되도록,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일을 잠시 멈추어라. 네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너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며,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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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비교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들은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착실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좌절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의로움은 계명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이 커지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살인하면 안 된다는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성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물 봉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물을 봉헌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이웃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의로움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향해서 욕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성당에서 예물과 우리의 마음을 봉헌하면서도 원한 품은 사람들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한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 나라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일까요?
지금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우리의 시선을 계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주변의 형제들에게 두어야 한다는 사실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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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먼저 용서를 청하여라.>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
이 말씀의 뜻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입니다.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위선자들의 위선’은, 즉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 거짓 신앙생활은, 자기 스스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들어가려고 해서 못 들어갑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율법의 완성’에 관한, 또는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마태 5,17)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속의 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사람의 마음속도 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분노, 증오, 모욕은 살인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이웃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즉 마음속의 미움을 없애야 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는 일과 이웃을 모욕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와 ‘모욕’에 관해서 유다서의 다음 구절들이 연상됩니다. “미카엘 대천사도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독적인 판결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 하고 말하였을 뿐입니다."(유다 9) <미카엘 대천사는 싸움의 상대방이 악마인데도 불구하고 모독적인 말(욕설)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모욕과 욕설 자체가 죄입니다.> “보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당신의 거룩한 이들과 함께 오시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저마다 불경스럽게 저지른 모든 행실에 따라, 불경한 죄인들이 당신을 거슬러 지껄인 모든 무엄한 말에 따라 각자에게 벌을 내리신다."(유다 14-15) <심판 때에는 ‘행실’뿐만 아니라 ‘말’도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생각으로 지은 죄’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할 일이 있으면 너무 늦기 전에 그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를 용서하여라.”가 아니라, “그에게 용서를 청하여라.”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마태 18,21-22) 그런데 우리는 흔히 용서할 일만 생각하고 용서 청할 일은 생각 못할 때가 많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만 생각하고, 내가 형제에게 잘못한 일은 생각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내고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의 속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또는 “그가 괜히 오해를 해서 그런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속이 좁아서 그러든지, 그가 오해를 해서 그러든지 간에, 그를 탓하지 말고, 어떻든 먼저 그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 실천도, 용서도, 화해도, ‘나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형제와 화해한 다음에 예물을 바쳐라.”라는 말씀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로(이웃과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은 ‘위선’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 예물을 거절하시면서 “먼저 형제에게 가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있는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을,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고...”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하느님 앞에 나서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는지 없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라.”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계명’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함을 느끼셨는지 ‘명령’으로 표현을 바꿔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 말씀에서 ‘서로’ 라는 말은 ‘동시에’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할 때, ‘서로’ 사랑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나를 원망하고 있는 형제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하는 일도, 또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도, 모두 다 사랑 실천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를 ‘지금 당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는 일과 하느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적당한 때에 하겠다고 미루는 것은 사실상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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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씨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대로 공부 못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대본을 성경처럼 읽고 연습했습니다.” 윤여정 씨를 아는 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언젠가 큰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자신만의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였습니다.” 연기생활 55년 만에, 75세의 나이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연기를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려한 외모, 뛰어난 재능, 주위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배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배우들이 모두 정상에 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암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만과 교만이라는 암초가 있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암초가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암초가 있습니다.
일전에 한 형제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형제님은 정년퇴임을 하고나서 매일 성경을 입력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모두 입력했을 때입니다. 주변에서 아직 건강하니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곳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면접관이 원하는 것은 타이핑의 속도였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성경을 입력하면서 타이핑 실력이 늘었고, 다행히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성경을 입력한 것은 아닌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기회를 주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매일 묵주기도를 하는데 한 자매님이 묵주의 9일기도를 권했다고 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묵주의 9일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고, 병원에 가서도 잘 고쳐지지 않았던 병들이 조금씩 좋아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기도하면서 몸이 좋아진 것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지낸다고 합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내면서 두 가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피아노입니다. 모종을 심고 매일 물을 주면 어느덧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는 것을 봅니다. 자연은 시간이 지나면 생명이 결실을 맺도록 해 줍니다. 1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눈으로 악보를 보고, 다음에 손이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손이 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전문가들이 능숙하고, 자유롭게 건반을 움직이는 것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전거입니다. 처음에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좁은 길에서는 겁이 났습니다. 조금만 달리면 숨이 차고 힘이 들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3번 쉬었다 가던 거리를 한 번에 갈 수 있었습니다. 신호등의 흐름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속도를 조절하면서 파란 불이 되는 시간에 교차로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보니 팬데믹 시대를 지혜롭게 지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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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기도하는 마음으로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들>
우리는 하느님을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알고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으며, 또 그렇게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누구나 한 번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맞을 수밖에 없지요.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은 참으로 엄하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 같은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잘 살아야 하는지를 섬뜩하리만치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못마땅해 하시고 늘 야단치셨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는데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그런데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아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단식을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지요.
물론 잘못되고 편협한 율법의 해석으로 예수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 지은 잘못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5,26)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엄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5,21)는 말씀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놓고 가르치고 계시지요.
살인이라면 우리는 단지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고 또 실정법도 그 정도에서 죄 값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단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마음에 관한 것까지도 그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적인 언어,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까지도 갚아야할 죄라는 것이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에 욕 안 해보신 분 있으신가요? 아마 거의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또 지금도 가끔 감정이 격할 때는 마음이나 언어로써 지금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그 정도는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특히 언어적인 폭력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보복하고 싶어하는 감정이나, 함부로 내뱉는 언어적인 폭력들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오래 가게 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정신적인 폭력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험한 말을 하며 치고 받고 싸웠다고 합시다. 심하게 싸워서 한 사람이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5주 동안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한두 달이면 육신의 상처는 없어지지만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말들은 50년이 지나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무서운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증오하는 마음이며 또 언어로써 내뱉는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주 단호하게 이것까지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내면의 감정과 정서는 언어로써 표출이 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말을 내뱉고 책임질 생각도 안 할 뿐더러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함부로 쉽게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 흉기가 될 수 있지요. 말에 대한 경고의 말은 인류 역사의 세월만큼이나 오래 되고 그 양 또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집회서 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중상꾼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고 네 혀로 올가미를 놓지 마라.”(집회5,14)
하지만 혀로 사람을 잡는 일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습니까?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반대로 말 한 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쉽게 천 냥 빚을 지기도 합니다.
또, 집회서 28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28,17)
말로 입히는 피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불화는 물리적 폭력에서가 아니라 언어 폭력에서 비롯되지요. 형제지간에 갈등이 심화되어도 몸싸움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험한 말로 심각하게 싸우지요. 생각만 해도 벌떡 일어나는 말들로 상처를 주고받고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당 공동체를 사목하면서 신자들을 해치고 상처를 주며, 그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갈등은 혓바닥에서 기인한다는 겁니다. 악의 뿌리인 혀가 결국 사람을 잡는 것이지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말한 본인은 곧 잊고 말지만 상대방의 가슴에는 그 말이 평생 남아서 미움의 감정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하는 그 어리석음이 모두 ‘말’을 통해 자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대부분 언어로써 드러나고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 일생을 ‘배’라고 볼 때 내 일생을 조정하는 방향을 잡아주는 키가 바로 ‘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혀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죽음의 바다로 내몰기도 하고, 반대로 생명의 바다로 안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수없이 쏟아놓은 말들 중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많습니까? 죽이는 말이 더 많습니까?
혹시라도 내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죽음의 바다로까지 내몰린 이웃이 있다면 중앙 법정에 넘겨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특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도 닦는 마음으로 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인은 ‘말’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이 상처받은 마음에 새로운 살을 돋게 해주는 치유의 말, 또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 화해를 샘솟게 하는 말,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언어와 사랑의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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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의 형벌에 넘겨질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단에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우리가 작은 것부터 사랑과 화해의 선물로 승화시켜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위대한 사랑은 작은 용서와 화해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주거나 받은 상처들은 용서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미움의 악순환을 벗어나기를 고대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매우 열심하고 엄격한 규율을 따르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겸손과 진실한 마음이 사라지면 사람들에게 엘리트 신자, 위대한 성자로 보이려는 허영심이 채워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위선과 독단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섬기면 하느님과 멀어지면서 주위의 선한 사람들과 불화하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는 작은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합니다. 작은 화해와 용서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큰 은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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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화->바보->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매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매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을 나무랐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 받을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하신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점 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도려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화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후자(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자격이란 상태적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상황적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뿐만 아니라 "바보"라는 욕하는 자는 중앙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번 삼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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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산상설교의 핵심주제로, 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또 다시 거듭 말씀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그러나 그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의로움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의 “살인하지 말라”는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도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한편, 사도 바오로는 “그(아브라함)가 하느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갈라 3,6)되었음을 말하면서, 옛 율법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갈라 3,11)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본질을 꿰찔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합니다. 곧 용서와 형제애, 우애가 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를 소중하게 여기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우애와 사랑을 중요시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느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우리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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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소서.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는 합당한 예물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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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진정한 의로움: 사랑과 화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리사이들의 형식적인 의로움을 넘어 진정으로 형제적 사랑을 드러내는 “화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이들과 늘 잘 지내는 참 힘듭니다. 때로는 화를 내기도하고 욕도하고 불평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화해가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우리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힘겨운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먼저 오늘은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다 아는 내용입니다. 종교 생활과 윤리 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착하게 살면 되었지 왜 굳이 성당에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과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착하게 살아야 그리스도교 신자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교 신자이기 때문에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죠! 후자가 맞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Agere sequitur ess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즉, 착하게 살아야만 천주교 신자인 것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바라보면 관점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서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고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집에서 살기 위한 기본적인 삶의 방향이요 지표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이라면 서로 이해하고 나누고 희생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나라에 사는 이들이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까! 하느님의 집에 사는 이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고 지내겠습니까! 천국에 사는 이들이라면 바리사이들처럼 외적인 형식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원망을 품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화해하지 않겠습니까!
산상설교의 말씀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원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무참히, 묵묵히, 그리고 고통 속에 죽어간 사형수,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은 온 인류를 구원하였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며 이제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런데 사실 막상 삶의 자리에서 미운 사람을 받아들이고 화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가까이에 있던 믿었던 배우자나 자식, 이웃의 배신은 진정 받아들이기 힘든 일 중에 하나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람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가 끓어 올라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분들 가운데 이런 상황에 놓인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복음에 비추어 다음의 사항들을 잘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첫째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내가 변할 뿐이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우선 그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도록 하십시오.
둘째로, 용서는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억지로 용서하려고 너무 애쓰다 보니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속에선 부글부글 끊는데, 얼굴은 웃고 있는 거죠. 감정을 억누르다 보면 오히려 병이 되어 언젠가는 폭발하고 맙니다.
누구나 화내고 짜증내고 분노에 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억지로 용서하려고, 혹은 용서한 척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을 상대에게 표현하기 보다는 예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그분께서 우리에게 위로와 치유, 평화와 화해의 길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에 깊이 들어가다 보면 어느 틈엔가 그 미운 사람, 나를 배반한 그 사람을 원망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그의 영혼도 주님께로 올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요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길인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들인 저희도, 용서와 사랑의 길을 통해 완전한 이들이 되게 하소서.
결점 없는 완벽을 추구하다 쓰러지는 오만함을 없애 주시고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사랑으로 오롯이 당신께 의지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저희를 한없이 용서해 주시는 당신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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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화해하여라!"(마태5,24)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율법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간과한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 율법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살아야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 선포되어지는 '산상설교'는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얼른 화해하고 타협하여,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율법의 본질인 사랑이며,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율법의 본질인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땀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아주 구체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노!'
분노는 죄의 일곱 가지 뿌리인 칠죄종의 하나로써, 이것으로부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죄', '바보라고 하는 죄', '멍청이 라고 하는 죄'가 나오고, '살인 죄'가 나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2코린3,16)
너의 잘못만 바라보지 말고, 나 자신을 바라봅시다! 나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분노의 너울을 먼저 치워냅시다! 그래서 너와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고,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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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화>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화>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무릎 꿇지 않는
단 하나의 길은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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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혹시 동물원에서 기린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기린의 키는 클까요? 아니면 작을까요?
아마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 “크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기린의 키는 자그마치 3.5~4.8m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게도 550~1,930kg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까. 기린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작다고 말해야 할까요? 인간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프리카코끼리가 보기에는 너무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이 코끼리는 6.5~7.6m, 무게는 6t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동물도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흰긴수염고래입니다. 몸길이가 23~27m, 체중은 80~150t입니다. 아파트 8~9층의 높이입니다. 이 고래가 기린을 보면 너무 작은 미니어처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누가 보느냐에 따라 크다 작다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대단한 존재일까요? 별것 아닌 존재일까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면 크게 웃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부족함과 나약함이 가득하지요. 그래서 항상 겸손한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을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즉, 계명을 확장시키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은 화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고, 원망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그 정도만 지키고 그 이상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이 정한 선에서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 모습을 따라야 할까요? 따르지 않아도 될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이만하면 됐다며 선을 그어 놓고 사는 것을 반대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는 노력을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겸손하게 주님 말씀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옥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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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 남성>
한 여성단체에서 ‘모범 남성’을 선정하겠다고 홍보했습니다. 이에 수만 통의 추천서가 접수되었지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천한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야말로 최고 모범 남성이 분명하다면서 심사의원 모두 이견 없이 동의했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음식의 정량 외엔 절대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운동 시간을 정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나 아이들을 절대 구타하지 않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몸에 익혀서 질서 정연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비디오로 시간을 축내는 법이 없습니다. 규칙적인 삶을 위해 휴대폰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합니다. 이런 생활을 7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상대방의 전화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교도소입니다!”
완벽한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 사람은 통제당하는 사람일뿐일까요? 아무튼 어쩔 수 없는 통제를 따르는 사람은 ‘최고의 남성’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잘 통제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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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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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무지, 성령, 자유, 온유, 겸손-
제대로 바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허무라 믿으면 허무한 인생이 되는 것이고,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라 믿으면 사랑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참 사람이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 사랑의 여정, 온유와 겸손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얼마전 어느 신부님의 책을 선물받았습니다. 면담고백성사를 드렸던 분입니다. 성사를 드리면서 ‘아, 지긋한 나이에도 참 성실하게 사시는 분이구나!’하는 느낌을 지녔던 분입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를 배운다’, ‘내적인 삶으로 초대’ 라는 책명에서 보다시피 영적 삶과 직결되는 책이었습니다. 책 표지 안에 글귀도 좋았습니다.
“환대와 친절에 감사드리며 신부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즉시 핸드폰 전화를 확인해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사진과 함께 감사의 답신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귀한 책 잘 받았습니다. 틈틈이 읽어보려 합니다. 예수님 감사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곧 신부님의 답신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온유와 겸손의 처방을 잘 실천하여 예수성심을 닮고자 하겠습니다.”
참 지금도 기분 좋은 여운으로, 향기처럼 남아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 6월11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계속된 대축일이 내일 예수성심 대축일로 마감되는 느낌입니다. 마침 면담고백성사시 신부님께 써드린 처방전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예수성심의 사랑이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닮의 여정, 즉 예수님을 날로 닮아가는 여정은 바로 점차 온유와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제가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여정’입니다. 아마 남은 평생도 끊임없이 반복될 주제가 여정입니다.
늘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 보자, 또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자. 일일일생 하루중 어느 시점에, 일년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겠나’하는 물음입니다. 참 절박해지는 물음에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제 경우는 하루중 오후 4시쯤, 계절로 하면 초겨울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예닮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온유와 겸손의 예수 성심을 닮아가고 있는지요.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참나의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제가 ‘삶의 여정’과 더불어 참 많이 강조한 것이 ‘무지無知의 병’입니다. 동방영성에서 극히 강조하는 바, 마음의 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온갖 탐욕, 교만, 어리석음, 완고, 분노, 질투, 허무 등 끝없이 이어지는 무지의 부정적 현실들입니다. 바로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뿐입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성심을 닮아갈수록 무지의 치유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무지에서 벗어나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이겠습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살인이요, 형제에게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살인에 앞서 마음의 분노를,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 무시하는 살인의 근원적 뿌리를 뽑아 버릴 것을 명하십니다. 형제들에 대한 무시와 차별이 정말 큰 죄이며 이 또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인성의 사람이라면 ‘존경과 사랑’은 못해도 ‘존중과 배려’는 기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에 전제되는 바, 회개와 화해를 통한 이웃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형제들과의 화해와 더불어 하느님과의 화해, 바로 이것이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자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구체적 처방임을 봅니다.
바로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예닮의 여정의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여기서 너울은 무지의 너울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무지에 눈이 가려 제대로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무지의 너울에 눈이 가려 주님은 물론 자기도 모르고 이웃도 모릅니다. 헛것같은 유령의 삶을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닮아갈수록 무지의 너울도 치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요 예닮의 여정에 관한 묘사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감히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매일 미사 은총뿐이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닮아가면서 무지의 너울을 치워주기 때문입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영이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 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너울을 점차 엷게 해주시어 더욱더 영광스럽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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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이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이야기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 준수로 자동 획득된다고 여겨온 의로움을 넘어서라고 이르십니다. 이는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대충 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 이상을 살라는 뜻이지요. 율법을 무시하고 마구 살아제끼는 삶이 아니라, 문자로 새겨진 율법 없이도 충실히, 하느님 뜻을 새긴 영혼과 심장으로 살라는 촉구이십니다.
"형제 존중, 화해, 양보"
예수님께서 율법 준수 이상의 삶이 어떤 것인지 세 가지 경우를 들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그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준수한 것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음을, 그리고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 믿음은 율법을 포용하는 동시에 율법을 초월하는 투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자취를 닮아가다 결국은 사랑으로 변모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율법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2코린 3,15-16)
구약의 백성 중에 하느님을 마주하고 그분 마음과 접촉하도록 허락된 이들은 성조들, 모세, 다윗, 그밖의 참 예언자들 등 일부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들이 살아갈 지침으로 율법이 주어졌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감지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마치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드리워진 너울과 같아, 간절히 하느님 마음에 파고들기를 열망하는 이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율법 너머로 시선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율법 준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이들은 굳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까지 이르려 애쓰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아도 율법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5)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빛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고백합니다. 그 빛 덕분에 우리 앞에서 너울이 치워지고,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앞에서 이제 율법의 너울이 벗겨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관상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사랑을 관상하는 이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가 바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이에게 율법은 최소한의 지침일 뿐입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이를 선동하고 불붙이고 끌어당겨 사랑에 합류시키고 결국 사랑이 되어가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율법 너머로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라고 초대된 이들입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이 곧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우리에게 맡겨주신 형제와 이웃들을 더 섬세히, 따뜻하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서툴고 미숙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도 주님은 큰 영광을 받으신답니다. 사랑을 통해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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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fZpPeV2U4c&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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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화해는
절박함에서
시작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화해의 참된
길이다.
화해와 회개는
길을 바로잡아
주는 공통점이
있다.
성찰과 반성은
그래서 화해의
참된 본질이 된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화해가 치유로
영글기 위해서는
상처와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물이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빈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참된 봉헌이다.
우리모두
부족한
사람들임을
인정한다.
먼저 이해와
화해, 기도와
용서가 필요한
우리 자신이다.
화해의
첫 발걸음은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자신을
만날 수 없다면
형제도 제대로
만날 수 없고
하느님께로
나갈 수도 없다.
화해는
우리 마음에
눈을 뜨는 것이다.
마음을 만나야
살아난다.
마음을
살리시는
주님께서
먼저 화해를 위해
우리마음을
어루만져 주신다.
화해는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의 길이며
마음으로
다시 만나는
관계 회복의
은총이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해라는
새로운 변화이다.
화해의 기쁨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참기쁨이다.
화해가
살아있는
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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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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