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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기 333- 하롱베이2
2023년 5월8일 하이퐁 공항에서 하롱베이로 갔습니다. 하롱베이의 아름다움은 베트남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2000년 12월 2일에 하롱베이는 지질학적, 지리학적 가치로 유네스코에 의해 두번째로 세계 자연유산으로 인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세계의 자연경관으로서 방문객들은 이곳의 자연경관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지 사진으로 감히 상상조차 할수 없습니다. 하롱베이 야생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려면 이곳에 발을 들여야 합니다.
이번 여행은 북부 하노이랑 하이퐁, 하롱베이 였습니다. 이곳은 4계절이 있다고 하며 크게 6개월은 우기와 6개월은 건기로 나누어 진다고 합니다.
발음도 북부와 남부가 다르다고 합니다.
(기원전 111년 ~ 220년)한문제 시기에 월남과 화평도 맺어졌지만 한무제가 즉위한 뒤 천하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하자 남월 역시 공격대상이 되었는데, 조타가 살아있을 적에는 한의 군대를 막아내어 한동안은 화친관계가 지속되었으나 4대 국왕 애왕 조흥(趙興 , Trieu Hung, 찌에우흥)과 토착민 출신인 재상 여가(呂嘉 , Là Gia, 라지아)와의 대립이 불거져 쿠데타가 일어나 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趙健德, Tie Kiën Btc, 찌에우끼엔둑)이 추대되자 이에 한은 노박덕을 위시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기원전 111년 남월을 멸망시켰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남월 남부의 쟈오 찌(Giao Chi,交趾,교지)와 끄우 전(Ctu Chân, 년, 九眞구진)의 대표도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여 9개 군이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이 약 1천 년에 이르는 중국의 베트남 지배의 시작입니다.
한나라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자국 변방의 안정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중시되었다. 이 지역은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한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남방물자의 산지인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물자의 집산지였기 때문에 막대한 이권이 존재하였습니다. 이후 한은 기본적으로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했는데, 워낙에 원지라서 수시로 탐관오리들이 등장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결국 탐관오리로 인한 반란, 괜찮은 관리와 이 지역 출신들의 통치로 인한 선정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때 후한의 개국공신이자 복파장군 마원이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트남의 통치를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바꾸었습니다. 이사람은 그 유명한 삼국지의 마등, 마초 부자의 조상입니다. 마원은 또 행정제도를 조정함으로써 중국의 지배통치력을 높이고 동화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조치로 기존의 락장, 락후의 통치력은 약화되었고, 중국인 이주민의 힘이 늘어났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비엣족이 본격적으로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비엣족이 가지고 있던 구비서사시의 전통이 끊어집니다.
한편 137년 베트남 중부의 원주민인 구련(區憐)이 중국령 베트남을 공격하였습니다. 구련은 베트남인이 아닌 참족으로 보인다. 남부 원주민의 공격은 계속되어 192년 중국령 베트남 최남부 넷남(N ât am, , 日南일남)군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웁니다. 이 국가가 베트남의 숙적 참파의 전신인 임읍(林邑)이었습니다. 참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인종에 인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베트남인의 동 썬 문화와는 다른 싸 후인 문화의 민족이었습니다. 임읍 남쪽에는 부남 (扶南) 왕조가 번성했습니다.
후한 시대에 결국은 베트남의 직접 통치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이중지배 상태가 되었는데 사섭이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사섭을 손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섭은 손권의 부하였으나 베트남에서는 절대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에는 교지의 실질적 독립 세력이었던 사섭이 등장하여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다시 사섭이 죽고 오나라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다시 조씨정의 대규모 반란이 터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어갑니다. 오나라가 멸망할 때 곽마가 잠시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나갔고 이후 중국을 통일한 서진을 잠깐 거치고, 이후 중국 육조시대 내내 대체로 남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베트남의 중앙이자 교주자사부의 최남단에 위치한 녓남군(일남군)은 기후가 아주 끝내줬는데, 여기는 덥기도 더운 곳인데다 온갖 풍토병이 창궐했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후한에서는 수도인 낙양으로부터도 가장 먼 곳 녓남인데 넷남군은 낙양으로부터 13,400리나 이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사족들이나 관리들은 유배를 당할 경우 유배지에 따라 자신들의 행보를 예상했는데 녓남으로 유배당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도 녓남으로 유배가 확정되면 고향에서 장례식을 먼저 치르고 녓남으로 출발했습니다.교주자사였던 사섭조차 건드리지 않은 곳이 녓남군입니다. 그래도 녓남군에는 현이 5개나 되었고 인구가 10만명 정도 되었습니다.
중국의 혼란기 사이에는 잠시 찌에우비엣브엉(Triéu Viêt Vuon趙越王)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 리왕조(Nha Tien Ly, 전 이조,544년-602년 )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수나라는 남방의 정복과 튀르크족(돌궐)과의 효과적인 관계 구축에 성공함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확장주의적 정책을 자유로이 펼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2명의 수나라 황제(수문제, 수양제) 모두 주변국과 민족을 정벌함으로서, 옛 한 제국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602년 수문제는 오늘날 하노이 근방을 가르키는 교주(交州)를 손쉽게 탈환했습니다.
605년 봄이 오자 제국군은 베트남 남쪽으로 더욱 깊숙히 밀고들어갔는데, 오늘날 다낭 인근을 수도로 삼고 해안가를 따라 자리잡았던 참파 왕국을 침공했습니다.허나 정작 이 특별한 원정은 한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외려 남방에 전설적인 부(富)가 존재한다는 사실-그리고 상당부분 상상에 가
까웠다-에 현혹된 수문제의 개인적인 욕심에 가까웠습니다.
유방(劉方)이 이끌던 수나라군이 도리강(闍梨江)을 건너자, 코끼리를 동원하여 참파군이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첫 공세를 격퇴한후, 유방은 여러 개의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위를 풀로 덮은 뒤 거짓 후퇴를 통해 코끼리병을 함정으로 유인했습니다. 또한 수나라군은 쇠뇌를 동원하여 코끼리를 쏘게 했고, 이에 놀란 코끼리들은
몸을 돌려 참파군을 거꾸로 짓밟아버렸다. 유방은 참파의 수도를 정복하고 약탈했지만, 중국으로 돌아오는 귀로길에 수나라군은 풍토병에 시달리며 막대한 손실을 냈고 유방 또한 병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결말은 거진 예상된 바에 가까웠다. 현대에 이르기전까지, 기후가 다양한 지역 전부에서 기동하던 군대들은 항상역병에 취약했습니다. 특히나 온화한 지역에 살던 병사들은 남방의 열대에 극도로 허약함을 보였고, 전혀 익숙치 않던 수많은 세균들에 노출되었습니다. 이후 베트남 땅에는 당나라에 의해 안남도호부
가 세워집니다.
당나라가 건국되자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태수 구화가 곧 투항하면서 이 지역에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리 뜨 띠엔(Lyi ,, 李嗣先 이사선), 딘 끼엔(Binh KiënT , 丁建정건), 풍흥(Phung Hung , 馮興풍흥) 등의 반란을 꾸준히 겪어야 했습니다.
당나라는 훗날에 대리국으로 성장하는 현재의 운남성 지역의 국가 남조(南詔)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선기지였던 이 지역에 정해군(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절도사에 임명하면서 완전히 통합정책에 나섭니다. 고병은 고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정을 펼치기는 했지만 도교를 중심으로 한 통합정책은 좀 늦은 감이
있어서 결국 실패. 결국, 880년 황소의 난을 계기로 안남도호부를 철폐하는 수준에 이릅니다.
이후 906년 쿡 트아주(Khú Th,曲承裕곡승유)가 절도
사를 자처하면서 쿡씨 절도사 시대가 개막하였다.
907년 중국도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기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역시 정해군절도사 유은이 세운 남한과 전쟁을 벌이면서 톡탁톡탁했습니다.
1 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여 철수했으나 베트남 지역은 무정부 상태였고, 프랑스인들은 아직 억류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호치민의 베트민은 중북부 지방 대다수를 장악해 9월 2일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하며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한편 북위 16도 북부는 중화민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각각진주했으며,1이] 북부를 지배했던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탓에 거기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으며 1946년 4월에 장제스 총통은 중국 내 프랑스 조계 및 할양지 반환, 쿤밍-하구철도 판매, 하이퐁 1개 특구 양보, 인도네시아 주재 화교의 지위 회복 등을 전제로 프랑스 정부와 중-불 협상을 맺어 프랑스에 양도토록 합의했습니다. 반면 남부 촉은 영국군은 스핏파이어를 비롯한 영국제 무기를 넘겨주고, 별다른 마찰없이 프랑스인들을 석방시켜 프랑스에 남부 지배권을 맡기게 됐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으나 프랑스 제4공화국은 프랑스 식민제국의 유지를 원했습니다. 미국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한 나라라도 우방국을 골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의 입장을지지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1946년 3월, 베트민과의 하노이 예비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대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협상이 맺어졌으나, 사실 이는 프랑스의 눈속임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옥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
에 전면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1946년 11월 20일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 세관업무를 가지고 충돌이 있자, 프랑스가 함포로 쏴제껴 베트민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됩니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프랑스군은 통킹 삼각주 일대의 각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기타 요충지를 습격했습니다. 이후 프랑스군은 1947년 2월에 중부의 다낭, 후에 지역에 상륙했습니다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 임시정부. 베트남말로는 꽁호아 뜨찌 남끼(CÔng hoa tu tri Na 이라고 합니다.18 후에 의mky 남기 자치공화 ,共和自治南圻)이라고 합니다. 후에 의회와 프랑스의 동의로 남베트남(베트남국 - 왕정)에 자치를 전제로 흡수됩니다. 프랑스 시민권자였던 응우옌반틴(Nguyên Vän T, 阮文廳 완문청)이 총리였으나, 1946년 11월 10일, 응우옌,반틴이 사망하였으나,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뒤는 1949년 바오다이 황제(1913~1997, 재위1925~1955)가 이었습니다. 바오다이는 즉위 직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32년까지 머물렀으며,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즉위초에는 내정개혁과 자치독립에 힘썼으나, (당연히) 프랑스의 방해로 갈수록 성과 없는 이런 노력에 지쳐 이후엔 사냥과 자동차등 향락에 빠지게됩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으로 호치민에 의해서 고문으로 밀려났지만, 1946년에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한편 같은 시기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을 준비중이었습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를 명분으로 친 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입니다. 1946년 성립된 괴뢰국인 코친 차이나 자치공화국을 이어받아,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설립했다. 그 후, 1949년 3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프랑스-베트남 협정을 체결하여, 같은 해 6월 14일에 정식으로 '베트남국'이 성립됐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쟁지속 정책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Dién Biên
에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병력 대부
분을 상실하고 대패하면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됩니다. 이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네바 협정입니다.
프랑스와의 제네바 협정(1954년 4월 26일 ~ 7월 20일)의 결과 그해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21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주장을 했습니다. 저우언라이가 16도선22을, 몰로토프가 16~18도선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월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달 1월을 기점으로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호찌민의 결의와는 달리 남베트남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1956년에 해야 할 남북통합 총선거도 없었습니다. 남베트남의 친미 정부는 베트민 지지자들에 대한 테러를 가했고, 결국 이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내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되며 분쟁이 격화됐습니다.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비엣콩(베트콩)'빨처산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미국과 남베트남의 방해공작으로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 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1964년 8월 2일)이 중국 공산화와 연이은 한국전쟁 등으로 공산주의가 동남아로 퍼질까 봐 통킹만 사건을 핑계로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돌입하지만(베트남 전쟁 혹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이라는 치욕을 남긴 채 1973년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떠나야 했습니다.
1973년 1월 27일으로 파리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는 미국이 발을 뻘 핑계거리나 다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워터게이트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미국 정국이 혼란에 빠진것이 결정타였습니다. 1975년 3월 10일에 협정을 팬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보름 만인 3월 26일에 다낭 함락, 1달 20일 만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전쟁은 끝났습니다.
1975년, 북베트남은 기어이 남베트남을 드디어 멸망시켰고, 남베트남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졌습니다. 다음 해의 총선거로 2,400만명의 북베트남과 2,000만 명의 남베트남이 합쳐져 4,400만 명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이로서 독립국 베트남은 통일을 완성했습니다. 물론 통일 이후 들어서 중국과의 관계로 인해 사실상 추방당하여 난민이 되거나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재교육 등으로 고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두는 이야기지만 베트남 공산정권이 호치민 같은 미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고, 정치적 탄압이나
수용소 같은 것도 분명 존재했긴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토지개혁을 결정과정 같은 건 생략한 채 강제로 시죽거나 다치고 수십만에 이르는 난민이 대거 될남했고, 권력투쟁 과정에서 트로츠파를 숙청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할 사실은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베트남 또한 지엠 정부 하에서 수만 명이 죽고 또 수십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감금당했습니다.
즉 남베트남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친미 반공 독재국가였다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감이 충만해진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공산화, 지배하여 동남아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19세기에 현태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과 함께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베트남은 당시 막 공산화된 캄보디아 정권과 당초엔 큰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당시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고 있던 크메르 루주는 원래 베트남공산당의 지도로 성장했고, 그 보답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북베트남을 돕고 있었지만, 1972년 미군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이 승기를 잡기 시작하자, 크메르 루주는 곧바로 미래에 다가올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73년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베트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고 중공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계획경제체제의 경직성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떠안은 데다가 동시기에 크메르 루주를 퇴격하겠다고 캄보디아를 점령했는데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은 베트남보다 휠씬 안좋은 데다가 크메르 루주가 장기간에 걸쳐 저항했기 때문에 전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해야 했고, 덕택에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모자를 판에 캄보디아 전쟁에서 상당량의 예산을 투입해야 투습니다 그런 데다가 전쟁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중국과의 전쟁도 터지는 바람에 전비가 추가로 지출된 건 덤이었고,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 침체로 인해 통일 베트남에 대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통일 이후 베트남은 경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매년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보트피플이 되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엘리트였기 때문에 두뇌유출도 통일 베트남에 상당한 타격이 되었습니다.그러나 1985년부터 집권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쳐 1986년 말에 공산당은 6차 인민
회의에서 도이머이 (Bõi mói)개방정책을 승인후 실시했고, 1989년에 캄보디아 철수 후 공산주의 통제경제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장률에 비해 소득이 상당히 낮은 데다가 빈부격차가 심하고물가 상승률도 높다는게 문제점으로 지적받았습니다.
도이모이 추진 후 1990년대 초반 들어 한국 등 주변국들과 관계를 좋게 만드는 한편 ASEAN에도 1992년 옵저버가 되었고, 1995년 정식 가입했다. 1967년에 일종의 반공정권 5개국 간의 단결기구였던 ASEAN은 그렇게 동남아 전체를 포괄하는 기구가되었고, 뒤따라 여러 공산국가가 가입하면서 실질적 경제-정치적 공동체가 구성될 힘을 얻게 되었다. 이외에도 적국이던 미국과도 관계 개선에 주력해 1995년 통상금지가 풀려 외교 관계가 재개됐고 이제는 한술 더떠서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한 미국의 군사 동맹국이 되면서 미군도 주둔하고 있고 합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