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가지의 외침
함석헌
씨알아, 너는 입이 있느냐? 있거든 주먹으로 네 가슴을 쳐보아라. 으악 소리가 나오나?
눈이 있느냐? 있거든 머리로 문지방을 받아보아라. 불꽃이 거기서 튀어나오나?
입은 먹기만 하잔 것 아니요, 눈은 보기만 하잔 것 아니다. 먹었거든 거기서 나오는 기운을 정의의 부르짖음으로 토해야 하는 것이요, 본 꼴이 마땅치 않거든 그 눈알을 분노의 불길로 내쏘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에 있다. 내가 신실해서가 아니요, 내 심정이 깨끗해서가 아니다. 나는 타다 남은 가시나무 가지요, 똥 찌르고 난 막대기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더러운 내 입에 넣으신 것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다.
도산이 가고, 월남이 가고, 남강, 고당이 다 간 후에, 우리에게 참다운 지도자가 없는 것은, 큰 의미의 새 시대를 앞에 두고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안에 깊이 찾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우리가 거기서 실패했다. 그러므로 오늘의 고통이요 부끄럼이다.
하나님이 씨알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위해 분을 일으켜, 생명의 권위를 도로 찾아, 당신의 참과 의를 증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생각해보라. 이렇게 죽은 민족이 어디 있나? 감각이 있고, 의분이 있고 결단이 있나?
금년이 3.1운동의 예순 돌이니, 한번 크게 뜻있는 기념을 하여, 침체 해가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날이 심해가는 사회부정의를 일소하여, 두 동강이 난 나라를 어서 빨리 하나로 묶고, 남북이 하나로 어우러져 회개와 용서의 눈물로 이 강산을 적시고 감사와 희망의 노래로 저 산천초목을 들뛰게 하며, 그리하여 세계의 모든 압박당하고 찢어진 민족으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하잔 생각을 어느 누가 아니했겠느냐? 그러기 때문에 나는 연초부터 “관민 합동해 만세라도 불러보자”는 소리를 했는데, 그 소리는 다 내 콧구멍만한 방에서 썩었다.
씨알이 살아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이것이 그 속에 새 세계, 역사를 품었다는 씨알이냐?
가시나무 가지가 너희를 꾸짖는다. 입이 있거든 외쳐봐! 눈이 있거든 부릅떠봐!
씨알의 소리 1979. 3월 82호
저작집; 9- 267
전집; 8- 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