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위천하정(淸靜爲天下正)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을 묻고 빌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어지럽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상정을 떠난 일이 날마다 곳마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고, 부르짖고, 통곡하고, 들뛰는 사람도 없으니, 정말 놀라운 세상이요, 미친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마 3천 년 전에 이사야도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하며 미쳐 부르짖었던 모양입니다.
그중에서도 놀라운 것은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대학생이 백주에 강도질을 했다는 일입니다. 대학생이라면,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최고의 지식인입니다. 알만한 것은 아는 사람입니다. 또 대학엘 다녔다면, 제 돈으로 했거나 남의 돈으로 했거나 간에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사회적으로 그만한 지위에 있다면, 필요한 경우에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나 이웃도 있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대낮에, 얼굴을 가리었다는 것도 아니고, 남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도 아니고 네 사람씩이나.
그런데 씨알 여러분, 놀라운 것은, 그런 보도를 보고도 세상이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신경이 있는 사회인가, 없는 사회인가? 도대체 그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속담에 손톱 곪는 줄은 알아도 염통 곪는 줄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중을 몰라도 분수가 있고, 낌새를 몰라도 정도가 있지, 그것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이상할 것도, 끔찍할 것도 없이, 그저 그런 것이란 말입니까? 이사야 예레미야가 지금 있다면 좀 불러오고 싶은 일입니다. 다리 부러진 황새가 한 마리 와도 서로 다퉈가며 전면을 내서 보도할 만큼 생명애가 있는 신문들이, 부자집 딸이 납치를 당했다면 연 3,4일을 거의 전면을 내서 보도하고 걱정할 만큼 사회정의에 대해 관심 깊은 신문들이 어째서 여기 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닫고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와 종교와 교육과 예술을 한데 묶어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 사건입니다.
대학을 공부하고도 강도질을 하여야만 되게 됐다면, 그들을 길러낸 정치는 크게 잘못된 데가 있을 것입니다. 이 정부는 스스로 민족중흥의 공로로 서 있는 정부이니만큼, 그런 불상사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는 결코 만능이 아닙니다. 정치가 전부이기에는 인간은 너무도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는 “천하신기(天下神器) 불가위야(不可爲也) 위자패지(爲者敗之), 천하는 검스런 그뜻이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는 놈은 무너진다”했습니다. 종교가 있고 교육이 있고 예술이 있는 것은 역사는 결코 권력으로 다스려만 가지고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에서 말한다면, 정치는 도리어 그 가장 피상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혹 깊이, 겸손히 볼 줄을 모르고 교만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는 때에도 종교나 교육이나 예술은 마치 대장부의 뒤에 숨어 있으면서, 지극한 사랑, 겸손한 봉사, 슬기로운 충고로 그를 가르치고 돕고 격려하는 늙은 부모, 아내, 친구 모양으로 그 잘못을 제 몸에 지며 고쳐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맹자가 살벌한 전국시대에 있어서 밤숨(夜氣)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정치인이 낮에 숲을 베고 뜯어먹는 나무꾼, 마소같이 짓밟아도, 종교인, 교육자, 예술가는 뒤를 따라가며 부지런히 그것을 밤이슬 같은 마음으로 고치고 살려내야 합니다. 대학생이 강도질을 하는 것은 이 밤숨, 밤이슬이 말라서 된 것입니다. 뜯어먹고 깎아먹는 놈보다는 더 크고 어진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종교요 교육이요 예술입니다.
끝으로, 고쳐주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고 위로해라(이사야).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을 용서해 줍소서 (예수).
들뛰면 추위를 이기고 가만있으면 더위를 이기지만, 맑고 고요히 하여야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노자).
고치자는 인데 생각을 잘못해서 된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전체의 병입니다. 미움과 폭력으로 세상을 바로잡지는 못합니다.
저들은 불쌍한 터진 창구(瘡口)입니다. 될 수 있거든 입으로 빨아내주tu요. 아니거든 싸매라도 주셔요!
씨알의 소리 1979. 6월 84호
저작집; 9- 277
전집; 8- 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