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젖 뗀 아이같이
시편 131: 1~3
이 시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겸손하게 지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헛된 영광을 위해서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사울과 그 신하들의 모략에 대하여 그의 태도를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런 어려움을 당한다면 말할 것 없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윗만큼 사울을 위하는 사람도 일찍이 없었는데 공연한 사울의 오해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도 원망이나 시비, 불평도 없이 다윗은 겸손히 참았습니다.
또 다윗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어떤 폭력으로 한 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된 것도 아니요, 억지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다윗의 경우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 것 뿐이었습니다. 한때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할 수밖에 없던 경우도 있었는데 다윗의 마음은 한없이 아팠습니다.
바후림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인데 거기 사울의 친척되는 사람 시므이가 나오면서 저주를 합니다. 다윗 왕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들을 향해서 돌을 던지며 말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대신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위하였느니라”
이때 다윗 왕을 수행하던 아비새 장군이 너무 화가 나서 “이 죽은 개 같은 놈이 어떻게 감히 내 주 왕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저로 하여금 당장 가서 저 놈의 머리를 베게 하십시오.” 하고 나섰습니다.
이때 다윗 왕이 뭐랬는지 아세요? “스루야의 아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신 때문이야. 그러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수가 있느냐? 더구나 내 몸에서 난 아들이 이처럼 내 생명을 해하려 하는데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 그러는 것이야 당연하지. 저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게.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실 거야.” 하면서 분해서 펄펄 뛰는 신하들을 만류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위대했습니까? 그의 겸손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여러분, 교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잠언 8장 13절에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일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시편 31편 23절에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29장 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고 낮아지게 하시며 물리치시고 대적하십니다.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을 찾으려면 한없이 많습니다. 사실 교만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성경에 보면 교만한 사람이 당한 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우심을 얻어 강성해졌습니다. 그때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왕이면 무엇이나 할 수 있을 줄 생각하고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제사장 아사랴가 용감한 동료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들어가 웃시야 왕의 하는 일을 막으며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했습니다.
이때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하나님의 노가 나타나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웃시아 왕은 교만하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가 겸손히 왕의 직책을 잘 감당할 때 얼마나 백성들에게 덕을 세웠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사울 왕의 마음 속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올 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게 되었고, 종래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비참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질 때 눈이 높아지게 되고, 마음이 교만할 때 교만한 일을 하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 마음이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성경이 주님의 마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가령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보면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겸손하셨고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 사실을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생활을 한번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하다든지 또는 자기 것을 나타내 보인다든지 하신 일이 있었습니까?
이사야 53장을 보세요. 이 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글인데 그리스도에 대해서 뭐라고 했어요?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니” 했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의 그 얼굴 생김새와 풍채도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그 분에게서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선 나신 곳이 마구간입니다. 그보다 더 겸손하실 수가 있습니까? 자라나시기를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훌륭한 일을 행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는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말을 주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겸손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항상 겸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팔을 벌리고 기도합니다. 자기 자랑을 합니다. “나는 일 주일에 한 번은 금식을 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합니다. 나는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이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기 서 있는 사람처럼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를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사람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하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안타깝게 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 가운데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했습니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의 기도, 다시 말하면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무시 무정한 곳으로 거처를 삼으셨지만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케 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하신 사도 바울이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는 줄 생각하노라 그러나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이함이요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참된 겸손에 대하여 로마서 12장 3절 이하에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또 그렇게 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라,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오직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는데 이것이 믿음의 분량으로 이 믿음의 분량에 대하여 우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사를 주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마음이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눈이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치 아니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눈이 높지 아니해야 합니다. 사람 가운데는 공연히 눈이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을 “되지 못하고 된 척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큰 일입니다. 요사이 말로 주제 파악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눈이 높은 사람이면 안됩니다. 뭐 꼭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나이가 많이 들도록 결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경우, 눈이 높아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일해야 할 사람이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눈이 높아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자신이 불행한 일입니다.
잠언 6장 16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어요? 첫째가 교만한 눈입니다. 잠언 22장 4절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하는 것은 다 죄니라” 했습니다. 눈이 높은 것은 죄입니다.
시편 105편 5절에는 “그 이웃을 그윽이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잠언 30장 12절 이하는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으니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했습니다.
셋째로 우리의 행위가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사람아 주께서 너희에게 선한 것을 보인 것이 아니냐 곧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야고보도 “주 앞에 서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가운데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분이 세 분 계십니다. 한 분은 모세요, 다른 한 분은 예수님이요, 또다른 한 분은 스데반입니다. 이 세 분의 공통점은 가장 겸손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겸손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그가 받았던 비난과 그가 처해 있던 유혹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같이 걸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사실 높은 지위를 원하지 않았고 세상에서 두드러진 위인이 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그는 양의 우리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것같이 그의 일생은 지내기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의 형은 일선에 위문 나온 동생 다윗이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비난했지만(삼상 17:28)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을 아셨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공로를 자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나이다” 겸손한 사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아니합니다. 자신의 옛 모습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이나 성취한 사업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약한 자를 업신여기거나 강한 자를 높게 바라보는 자세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위에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자기보다 아래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있을 때 교만한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지위보다 높은 일에 종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위해서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크고자 노력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맡은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일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성실했습니다.
그는 정치가가 되려고 준비한 일도 없었습니다. 병사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형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다윗은 집에서 양을 지키며 머물러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다른 일에 참견하거나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일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 대하여 만족하고 적응을 잘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같이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다윗이 교만하게 왕국을 노리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 부으신 이래로 그는 오만하게 누구에게도 대하지 않았고 때가 이르기 전에 왕관을 얻으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미 품에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했고 높은 것을 바라보거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는 유모의 뜻을 따르는 어린애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아이처럼 한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왕의 자리를 고수하거나 발전된 미래를 전망하면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그 마음이 순수합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어른들은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단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를 해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그 말의 배경을 생각하고 말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말한 사람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저는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계시는 한 아무런 염려도, 근심도, 걱정도, 고민도 없고, 눈치볼 것도 없고, 평화롭게 만족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그 어머니의 품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양의 무리인 우리가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고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따라가면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 이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니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이와 같은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여러분 모두가 다윗이 가졌던 이 귀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짐승은 물질로 만족합니다. 배고파하는 짐승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주면 그것으로 그 짐승은 만족해합니다.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살고 그 본능을 충족시키면 그것으로 다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그는 세상 적인 것에 부족함이 없이 지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바람을 잡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육신의 쾌락도 우리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돈도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보세요. 세상의 물질이나 육신의 쾌락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즉 세상의 물을 마시면 다시 목이 마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면 더 얻고 싶어집니다. 세상의 것을 누리면 더 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옛날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는 이사야 55장 1-2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마실 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갈급 함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종래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와 비로소 행복과 참 만족을 얻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 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여러분! 참된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 우는데 장난감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옷을 주면 좋아하겠습니까? 사탕을 주면 울음을 그칠까요? 어린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품입니다. 어머니의 품만이 어린 아이에게 평안이 될 것이며 만족함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젖 뗀 아이와 같이 어머니의 품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만 이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3절에 결론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과 같이 겸손한 마음, 겸손한 눈, 겸손한 행실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참된 만족과 평안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과 신뢰의 모습
성경본문 : 시편 131:1~3(2절) / 찬송 : 458장-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읽으며 묵상하며 : 겸손과 신뢰의 모습(126:1-3)
본 시편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에게 10년 이상 핍박을 받은 후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긴 고난 속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과 신뢰함을 배웠습니다.
마음과 눈과 행위가 겸손해야 합니다.
다윗은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진정한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실히 믿었기에 매사를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겸손함은 사람 앞에서 겸손한 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눈이 높지 않았고, 과중한 임무나 의무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하지 않았습니다(1절). 겸손과 교만의 차이는 마음과 눈과 행위에 의해서 알 수 있습니다. 겸손과 교만은 마음과 눈에서 비롯되고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태도와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겸손함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고난의 때에 겸손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겸손함을 배우지 않으면 자신을 높이게 되고 하나님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눈을 낮추고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교만한 자를 망하게 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언 18:12).
젖 뗀 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윗은 핍박받으며 쫓겨 다니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때로는 불안하고 죽을 것만 같은 상황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의 심령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온하였는지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음 같았다고 고백합니다(2절). 아이가 젖을 떼기 전에는 배고플 때 엄마의 품에서도 칭얼거리지만, 젖을 뗀 후에는 더 이상 울지 않고 평온함과 만족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불안해하고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평온함과 만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때 걱정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걱정은 전혀 문제해결의 길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염려되는 일을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일용할 양식
**************************************************************************************************
살며 생각하며 :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
어느 백화점 식품 영업부에서 소비자 소비심리 형태 조사를 실시하였다.
실험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똑 같은 10평 넓이의 쇼윈도 위에, 똑 같은 시금치 100단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A코너 위에는 100촉 짜리 전구를 10개 켜 두고,
B코너 위에는 100촉 짜리 전구 6개를 켜 두었다.3시간 후 판매 실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가 어떠하였을까?
그렇다.100촉 짜리 전구 10개를 켜 놓은 A코너 쪽 시금치가 90단이 팔렸고,
100촉 짜리 전구 6개를 켜 놓은 B코너 쪽 시금치는 70단이 팔렸다.
이 간단한 실험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사람들은 밝은 것을 좋아한다.밝은 쪽 시금치가 어두운 쪽 시금치보다 훨씬 싱싱하고 맛있어 보인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도 꼭 이와 같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이기 쉽다.
어둡고, 비판적이고, 게으르고, 우울하기 쉽다.확신이 없으니 항상 불안하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사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어둡다.
믿음 있는 사람은 긍정적이다.
환난을 당하나 찬송한다.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웃음, 여유, 부지런함, 청결, 깨끗함, 자유,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그러므로 믿음 있는 사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밝다.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와 같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간다.
그러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믿음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꾸준히 모여든다.그리하여 그 모여든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력하여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 수영로신문 中 <로뎀나무> -
옮긴 글
**************************************************************************************************
질문하며 적용하며
1. 시인이 고백하는 겸손한 자의 특징이 어떠합니까(1절)?
2. 겸손한 자를 어떤 모습에 비유하고 있으며(2절), 언제까지 유지해야 합니까(3절)?
3. 당신은 겸손함을 어떻게 배웠으며,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
확신하며 간구하며
사랑의 주님!
주님을 사랑하다고 입술로는 늘 말하면서도
오히려 세상의 일들과 저희 자신만을 더욱 사랑했음을
이 시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무산되고,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생이 흘러갈지라도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삶의 인도자가 하나님이심을 바르게 고백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물질보다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사람보다 하나님 두려웁게 여기고
세상보다 천국을 사모하게 하소서
보수보다 헌신을 기뻐하게 하시고
재주보다 은혜를 자랑하게 하시며
수단보다 진실을 잃지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도하게 하시고,
순종으로 받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옵소서.
우리를 날마다 쳐서 복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충만케하시고,
은사로 충만케 하셔서 지체로써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
갑절의 영감과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